김기원 (방송대 교수)
김대중정부 등장 이후 1년간 재벌 구조조정은 일정한 진전을 보였다. 소수주주권의 강화는 특히 내세울 만한 뚜렷한 성과이며, 그밖에도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한 조치나 일부 부실기업의 정리가 이루어졌다. IMF·IBRD의 요구, 국민대중의 압력, 극소수 개혁관료의 노력, 재벌자체의 필요성 인식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아니 재벌문제의 본질에는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이하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그 문제점을 검토해보자.
첫째는 경제청문회에 재벌총수를 소환하지 않은 점이다. 그들에게 따져 물어볼 것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 기업활동에 지장을 줄까봐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하루 이틀쯤 국회에 나오는 게 무슨 대수인가. 사실 꼭 불려나와야 할 모 재벌총수는 회사에 출근도 잘 하지 않고 비디오 즐기는 날도 많다고 한다. 결국 재벌측의 집요한 로비가 작용한 소치일 것이고 벌써 새로운 정경유착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IMF사태로 그 무능이 판정난 대부분의 재벌총수들은 오히려 퇴출되어 주어야 기업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이런 점을 망각하고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재벌개혁이 지지부진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재벌기업과 재벌총수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고 재벌기업과만 씨름해 본들 개혁이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재벌기업은 어쨌든 국민경제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에게는 재벌기업은 선진적 대기업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주고, 반면에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재벌총수의 소유-지배구조는 혁파한다는 관점이 분명히 세워져 있지 않다.
둘째는 작년 11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자동차의 부당내부거래 증빙서류를 압수하고도 이를 그 회사직원에게 탈취당한 사건이다. 재벌이 마피아집단이 아닌데도 이런 불법폭력 행위를 버젓이 저지르는 사회가 한국이다. 선진국 같으면 이런 경우 회사대표가 구속되는 등 엄벌에 처할 터인데 우리 정부는 얼마 안되는 과징금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재벌은 초법적 존재이고 정부는 능멸을 당해도 볼멘 소리만 하고 있는 처지인 것이다.
지난 김영삼정부 당시 모 재벌회장이 기업은 2류인데 정부는 3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이렇게 정부가 보잘것없어지고 재벌이 오만방자해 짐으로써 IMF사태를 야기한 셈인데, 이런 양태가 현정부 하에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정부(및 정치권) 금융기관 언론계 학계에 대하여 구축된 재벌의 지배망이 다소 동요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결과이며, 국민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재벌의 과잉지배 문제가 엄존함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셋째는 얼마 전 상법에 도입된 집중투표제(누적투표제)와 관련된 일이다. 이 제도는 총수가 아닌 일반주주도 표를 몰아서 투표하여 일부 이사라도 선임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회를 실질화하고 총수의 독재체제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기로 정관에 규정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첨가하였고, 회사들은 잇따라 그런 방향으로 정관을 개정하고 있다. 결국 집중투표제는 껍데기만 남아버린 것이다.
이처럼 오른손으로 개혁조치를 내놓고는 왼손으로 그 효과를 상쇄시키거나 반감시키는 일은 빈번하였다. 상호채무보증 해소를 요구하면서 출자총액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선단경영을 지속시킨 것, 비서실해체를 지시해 놓고는 순수지주회사를 허용하여 총수의 이중적 독재체제를 오히려 강화시킨 것, 재벌에 대한 은행의 감시 견제체제를 강화하겠다면서 재벌의 은행 소유를 허용하려는 것, 부채비율 감축을 요구해 놓고는 자산재평가를 허용하여 부채비율 감축울 숫자놀음으로 만든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넷째는 재벌 구조조정과 관련된 갈등의 처리방식이다. 퇴출기업이나 빅딜기업 등에서의 거센 노동자 반발에 올바르게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원래 재벌 구조조정은 재벌체제의 대내적 대외적 개혁과 과잉투자 해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재벌체제의 개혁에서와는 달리 과잉투자 해소를 둘러싸고는 사회 제세력간의 심각한 갈등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잉투자 해소를 위해선 과잉설비 처분, 과잉인력 감축, 수익성 회복이 필요하고 이 중 어디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총수 채권자 노동자 사이의 고통분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조정 과정은 이해관계의 대립이 첨예화되는 정치적 과정이다. 구조조정이라는 경제문제에 정치논리를 개입시킨다는 비난이 많지만 실제 문제는 정치논리의 개입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논리의 민주성 여부이다. 그런데 IMF사태 이후의 기업 구조조정과정에서는 막대한 국민부담 속에 재벌, 그 중에서도 5대 재벌에 주로 특혜가 제공되었다. 재벌기업내에서도 노동자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는 반면 정작 위기의 주범인 재벌총수는 도마뱀 꼬리자르기 정도의 고통만 분담하고 있다.
이렇게 구조조정 과정이 비민주적이다보니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일반에 대한 반대라는 집단이기주의로 비치는 반사적인 행동마저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개혁과 구조조정의 핵심은 단순한 사람 목자르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업시스템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노동자의 소유경영 참가제도를 마련하여 재벌개혁과 노사관계개혁을 결부시키는 것과 같은 미래지향적인 노력은 전혀 도외시되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구조조정의 의사결정과 고통분담에서 이중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재벌개혁은 어정쩡 뒤죽박죽 상태에 머물러 있다. 현 정부의 권력적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고려할 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국민대중의 힘을 결집하여 왕조적 독재체제를 해소하고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새로운 대기업체제를 구축하는 일, 즉 재벌체제의 발전적 해체에 매진해야 한다. 그를 위해 부채-출자 전환등을 통해 총수지배체제를 혁파하고, 기관투자가 노동자대표 소액주주대표로써 사외이사 사외감사를 구성하며, 은행등 주요 금융기관에 대한 재벌의 소유를 저지하고, 선단적 지배력 완화를 위한 출자총액제한을 부활하는 등의 조치들을 적극 추진해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과잉투자의 해소를 위해 인력감축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목자르기 일변도보다는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보다 유연한 방식을 적극 활용토록 해야 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도 책임에 상응하도록 공평하게 분담시켜야 한다. 위기를 기화로 병영적 전제적 노사관계를 부활시켜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기득권세력의 기도를 강력 저지하여야 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구조조정은 경제적 과정임과 동시에 정치적 과정이고, 국민대중의 정치적 역량에 따라 그 귀결의 퇴행성 진보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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