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어설프고 빗나간 재벌개혁 (1998.12) - 매일노동뉴스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47

 

어정쩡·뒤죽박죽 재벌개혁

김기원(방송대 교수, 경제학)

 

  이번에야말로 5대 재벌을 제대로 손볼 듯이 요란하였다. 그러나 결과가 '역시나'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물론 현 정부의 이데올로기적·권력기반적 한계를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개혁에 만족해야 할는지 모른다. 특히 무능한 재벌총수는 퇴진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에는 약간 놀라운 느낌마저 든다. 5대 재벌의 과잉투자 해소에 합의한 것도 어쨌든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총수 사이의 12. 7 합의는 개혁의 원칙과 본질에서 떨어져 있으며 과대포장되어 있다. 첫째로 개혁의 원칙문제부터 살펴보자. 모든 개혁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개혁의 기본원칙은 책임에 상응하는 고통분담의 공평성이다. 그런데 IMF사태를 초래한 주범인 5대 재벌총수에 대해선 사실상 아무런 책임추궁도 없이 지나갈 모양이다.

 

  물론 지배 계열사가 줄어드는 등 총수에게도 손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별 책임도 없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도마뱀이 꼬리 자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구조조정을 위해 금융·세제상의 막대한 지원을 제공받고 있으므로 재벌총수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국민부담으로 처리하면서 엄청난 특혜를 받는 셈이다.

 

  이는 6대 이하 재벌에 대한 처리와 비교해서도 특혜이다. 6대 이하에선 지원 제공시 경영권을 박탈하거나 조건부로 인정했는 데 반해 5대의 경우엔 경영권을 그대로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사재 출연도 자기 기업에 대한 출자가 대부분으로 이는 총수재산의 단순한 형태변환에 지나지 않는다. 사재출연이니 뭐니 하면서 국민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재벌개혁의 본질은 여전히 건드리지 않고 정부는 파생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진정한 재벌개혁이란 민주적 '책임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러면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를 개혁하여 총수의 왕조적 독재체제를 타파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IMF의 지시대로 책임경영(및 투명경영)과 독립경영의 구축에만 힘을 쏟아 왔다.

 

  물론 책임경영과 독립경영의 구축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총수의 소유-지배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책임경영·독립경영을 구축하는 데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게다가 부패·무능한 총수가 기업을 망치고 국민경제를 결딴내는 일을 사전에 예방할 수도 없다. 선진국의 기업발전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대기업체제를 (민주적인 데서는 미흡하지만 어쨌든) 책임전문경영체제로 발전시켜 온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과제도 바로 이것이다.

대통령의 무능총수 퇴진발언이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면 이는 책임전문경영체제의 구축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실제 5대재벌 총수는 IMF 사태로 그 무능이 판명되었으므로 자신의 소유지분을 국가에 헌납하고 퇴진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재벌총수가 책임과 고통을 분담하는 올바른 방식이며 동시에 대기업체제를 선진화하는 길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무능총수의 퇴진을 구체화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없다.

 

  셋째로 과잉투자 및 선단경영의 해소에 대한 정부의 선전은 과장되어 있다. 우선 5대그룹의 계열사 축소를 살펴보자. 전체 계열사 숫자를 265개에서 130개 정도로 줄인다고 되어 있으나 매출액 감소는 0.2-10.4%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구멍가게 같은 사업체들을 줄여놓고는 과잉투자가 해소되었다고 떠벌릴 심산이다. 한 마디로 숫자놀음이고 눈 가리고 아웅이다.

 

  게다가 6월의 1차 퇴출에서 보았듯이 계열사축소 약속도 제대로 지켜질 지 의문이다. 사업은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합병하는 형태를 취할 공산도 크다. 물론 무조건 줄이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느 만큼 과잉인가의 판단도 세계경제 여건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5대 재벌의 '배째라'는 너무 심하다. 족벌체제로 얽혀 있어 정리가 쉽지 않은 데다, 버텨서 끝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자기 몫은 더 커질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듯싶다. 그 사이에 우리 경제의 상처는 자꾸만 깊어질 터인데도 말이다.

 

  빅딜도 마찬가지이다. 빅딜 한답시고 막대한 특혜를 베푸는 것도 문제이지만 빅딜 그 자체로는 과잉투자가 해소되지 않는다. 두 회사를 한 회사로 만들면 과잉인 설비와 인력이 하늘로 사라지는가. 물론 두 회사로 따로 있을 때에 비해 과당경쟁의 소지는 줄어들고 과잉해소도 용이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빅딜 이후(post 빅딜)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정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독점강화에 따른 폐해 방지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의 일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상호지급보증을 금지시키고 부당 내부거래를 단속하면 선단경영이 근절된다는 정부의 생각도 지나치게 순진하다. 금년에 외국자본과의 역차별 해소라는 명분 하에 출자총액제한이 철폐되었다. 이는 바로 약 주고 병 주는 식의 정부정책으로서, 선단경영을 강화하는 조치에 다름 아니다. 곧 국회에서 통과될 지주회사도 경제력집중 강화와 선단경영을 위한 장치이다. 애당초 1인 재벌총수의 소유-지배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 휘하에 있는 계열사끼리의 관계를 끊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이다.

 

  넷째로 구조조정 과정이 노동자를 배제한 채 진행되고 있다. 물론 과잉투자를 해소하기 위해선 고용조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별로 책임도 없는 노동자에게 구조조정의 피해를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방식의 고용조정은 부당하다. 노동자들의 엄청난 반발도 예상된다. 총수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노동시간 단축 등 다양한 고용조정 방안을 강구하며, 부득이 회사를 떠나야 하는 노동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는 등의 대책이 요구된다.

그런데 재벌측은 이참에 기강을 잡겠다는 듯, 노동자들의 목을 함부로 자르고 임금을 삭감하고 근로조건을 악화시키고 있다. 1987년 이후 노동자들의 피나는 투쟁의 성과를 단번에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구조조정 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고는 있다. 하지만 노사정위원회에 대통령이 힘을 제대로 실어주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이 또한 요식행위에 그칠 게 뻔하다.

 

  그렇다면 올바른 재벌개혁 방향은 무엇인가. 우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5대 재벌 총수를 퇴진시키고 책임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미 부채의 출자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이를 확대 적용하면 현재의 법질서 하에서도 이러한 개혁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 이렇게 하면 계열사 처리도 훨씬 용이해지고 정부도 부담 없이 경기부양에 나설 수 있으므로 고용조정의 폭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동시에 국민경제에 대한 재벌의 독점적 지배 문제도 상당히 완화된다. 이게 바로 재벌체제의 지양 즉 발전적 해체이다.

 

  아울러 12. 7 회동에서 합의한 '사외이사와 감사제의 실질화'를 위해 기관투자가, 노조대표, 소액주주대표가 반드시 사외이사와 사외감사에 포함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재벌개혁을 노동자의 소유·경영 참가와 연결시킬 때 비로소 우리 자본주의는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고 진정한 국제경쟁력도 확보되는 것이다.

그리고 재벌체제의 개혁은 대통령과 재벌총수만이 만나서 얼렁뚱땅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재벌체제에 오염된 관료·전문가가 아닌 인사들로 재벌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올바른 재벌개혁방안을 강구하고 이행상황를 점검토록 해야 한다. 또 구조조정의 구체적 추진시에 노동계를 실질적으로 참여시키는 국민적 구조조정이 필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부의 재벌개혁은 본질적 문제보다는 파생적 문제에 치중하고, 한 발 나가는가 하면 한발 후퇴하고 있다. 어정쩡하고 뒤죽박죽인 개혁인 셈이다. 아니 노사관계의 악화나 노동자의 피해를 생각하면 개혁이라기보다는 개악인 측면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대중은 정신을 차리고 힘을 모아 재벌개혁을 바르게 이끌고 국민경제를 재건하고 보다 선진적인 경제체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최영민 님 : 관련 논문을 두 개 같이 보내니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