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개혁과 재벌해체(1999.2)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49

 재벌개혁과 재벌해체


  김대중 정부 1년을 맞이하여 국민대토론회 등 많은 행사가 열렸다. 그런 속에서 대통령은 재벌개혁의 중단없는 지속을 거듭 강조하였다. 재벌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이러한 흔들림없는 의지표명은 우리를 마음 든든하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쉽게도 대통령은 앞으로 재벌개혁 중 특히 어떤 부분을 주력 보완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그저 경영투명화 등 재계와의 5대 합의사항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미국 밀켄연구소가 내린 평가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들에 따르면 그동안 5대재벌로의 경제력집중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재벌의 가족지배체제가 해체되지 않음으로써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은 온존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 후자 즉 총수지배체제 문제는 일찍부터 국내외 학자.언론들이 지적한 바이며 이의 해결은 전자의 해결로도 연결되는 재벌개혁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에 소홀하였다. 물론 작년 12월 대통령은 무능한 재벌총수는 퇴진해야 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재벌개혁의 본질에 다가서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을 현실화하기 위한 아무런 후속조치도 내놓지 않음으로써 단순한 엄포에 그치고 말았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실 재벌개혁이란 별 게 아니다. 첫째로 대기업 내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둘째로 그 대기업이 타부문과 균형적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의 실현을 위해선 그 걸림돌인 [재벌의 이중적 독재체제]를 해소해야 한다. 즉 재벌 내적으로는 총수의 왕조적 독재체제가 자리잡고 있고 재벌외적으로는 그 재벌이 국민경제를 독재적으로 지배하는 구조를 혁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치의 핵심은 재벌체제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책임전문경영체제]의 선진적 대기업으로 환골탈태시키는 일이다. 흔히들 재벌해체라고 하면 재벌을 박살내자는 과격한 주장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재벌해체는 재벌죽이기가 아니라 재벌 거듭나게 하기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2차대전 이후 재벌해체를 통해 자본주의의 한 단계 도약을 이룩했던 것이다.


  원래 재벌체제란 후진국의 압축적 공업화과정에서 발생하기 쉬운 체제이며 이 체제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바로 재벌해체이다. 재벌해체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조치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재벌기업은 총수개인이 멋대로 해도 되는 사유물이 아니다. 총수가 출자한 재산은 기업자산의 3%에도 미달하므로, 총수는 자기재산의 40-50배에 달하는 국민재산에 대한 일종의 수탁관리자일 따름이다.


  따라서 총수가 경영을 잘못하는 경우엔 유능하고 성실한 인물로 교체되어야 기업도 살고 국민경제도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벌체제 하에선 총수가 의사표현이 불가능할 때까지 경영권을 행사하고, 또한 그 경영권이 아무런 검증절차없이 세습되므로 경영진의 이러한 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원리와도 부합되지 않는 전근대적인 시스템이다.


  시장에 맡겨서 망할 기업은 망하도록 내버려 두자는 주장도 있다. 중소기업이라면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재벌기업은 너무 커졌기 때문에 망할 때까지 그냥 두면 나라가 결딴날 판이다. 창업주의 시대에는 그런대로 효율적으로 작동했지만 2,3세로 접어들면서 그 모순이 심각해진 재벌체제를 해체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앞날이 캄캄한 것이다. 구미 선진국에선 장기간의 자본주의발전 과정을 통해 이런 종류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가한 처지가 아닌 것이다.


  과연 현재의 법질서하에서 재벌해체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도 있다. 그러나 찾아보면 방법은 있다. 예컨대 현재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재벌의 부채를 주식으로 바꾸어주는 조치가 있다. 이를 재벌에 일방적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총수의 소유지배구조를 혁파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능이 판명난 총수들은 자연히 경영일선에서 퇴출된다.

그동안 재벌개혁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벌개혁에 역행하는 조치가 등장하는가 하면 빅딜이니 뭐니 하면서 허둥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제대로 맥을 짚지 못한 때문이다. 이제라도 재벌개혁은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 방향은 바로 재벌총수의 왕조적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재벌해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