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삼성총수의 책임 (1999.6) - 한겨레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51

 


               삼성총수의 책임      
                                                김 기 원(방송대 교수, 경제학)

 

  

  삼성자동차는 사실상 파산상태이다. 온갖 로비를 총동원하여 자동차산업에 억지로 진출하더니 결국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자동차산업 전반과 한국경제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말았다. 8천억원의 자본금과 4조원 가량의 부채로 투자했지만 현재의 자산가치는 1조원 남짓이고, 계속 공장을 돌릴 경우의 손실을 감안하면 그 가치는 0에 가깝다고 한다.

 

  게다가 수많은 부품협력업체도 6천억원 이상의 손실을 입을 전망이고 삼성차의 근로자 4천명과 그 몇배에 달하는 협력업체 근로자의 앞날도 막막하다. 이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장래 자동차산업 재편과 관련한 공장설비 처리문제는 별개로 치더라도, 기존의 손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이를 둘러싸고 현재 삼성과 정부 및 이해당사자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혼란국면을 타개하려면 '책임에 상응한 고통분담'이라는 구조조정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터무니없는 투자를 총지휘한 삼성총수가 그 손실을 부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무슨 큰 선심이나 쓰듯이 몇푼 내고 얼렁뚱땅 넘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시장경제란 무책임경제가 아니다.


  주식회사이므로 지분만큼의 유한책임만 지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회장은 주식회사 원리에 입각해서 회사를 운영한 게 아니다. 이사회나 감사도 허수아비로 만든 채 황제처럼 투자를 주도한 것이다. 그런데 현상황에서 채권단의 부담은 결국 국민이 짊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삼성총수가 사재를 제대로 출연하지 않으면 아무 책임도 없는 일반국민이나 삼성계열사 소액주주가 4조원 이상의 피해를 덮어쓸 수밖에 없다. 이건 공정한 경제논리가 아니다.


  사실 여느 회사에 대한 경우처럼 채권단이 총수 등의 지급보증을 받아뒀더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런데 대부분이 신용대출이므로 복잡해진 것이다. 채권단의 경영진에게도 물론 이런 부실대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부채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한편 채권단이 바보멍텅구리도 아닐텐데 왜 그렇게 했을까를 고려해야 한다. 당시 반도체호황으로 막대한 자금을 굴리던 삼성에 비해 현저한 열위였던 채권단은 감히 지급보증을 요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삼성생명이 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삼성자동차에 대출토록 했다면 무보증은 불가피하다. 


   미국에선 1980년대 저축대부기관들의 부실화와 관련하여 수천명의 경영진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철저히 추궁하였다. 우리의 재벌개혁에서도 책임경영 강화가 필수적이다. IMF사태 이후 파산한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은 알거지가 되었으며, 개인재산을 거의 다 내놓은 6대 이하 재벌총수도 있다. 그런데 5대 재벌총수들은 1기 노사정위원회와 대통령간담회에서 자신들도 합의한 '총수재산에 의한 부채상환'은 안 지키면서 정리해고제만 강행해 왔으니 어찌 노동계가 반발하지 않겠는가. 삼성총수부터 우선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몇조원이나 되는 부채와 협력업체손실 등을 어떻게 총수의 사재로 다 갚을 수 있을까 하는 기우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능력되는 만큼 갚으면 되지 않겠는가. 수천억원의 계열사주식과 수조원으로까지 평가되는 비상장사주식, 그리고 막대한 부동산 및 금융자산 중에서 처리하면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한 삼성생명의 비상장주식 보유분과, 불법에 가까운 편법상속이 저질러진 삼성에버랜드의 부동산을 넘긴다고 해보자. 그러면 생명회사의 공공성도 회복되고 상속과정의 비리도 동시에 해소될 수 있다. 삼성총수의 책임부담은 그의 그룹지배력을 꽤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바로 선진적인 책임전문경영체제로 가는 길이다. 기업과 국민경제를 위한 삼성총수의 결단을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