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구조의 발전적 해체(1999.8) - 한겨레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55

재벌구조의 발전적 해체


  대통령의 8.15 경축사 이후 어이없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은 일단 경축사의 내용을 재벌해체로 받아들였다. 이는 사실 올바른 해석이었다. 시장이 더 이상 재벌구조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재벌구조의 소멸·해체가 아닌 다른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리고 정책수단으로 제시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든가 변칙상속의 규제를 철저히 밀고 나가면 재벌구조는 적어도 반쯤은 해체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의 이런 해석에 대해 청와대는 화들짝 놀라서 갑자기 발을 빼버렸다. 재벌해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단지 선단경영 종식 정도의 의미라는 것이다. 자기 말을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야당의 행태는 더 가관이었다. 재벌해체가 좌경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왜 이런 혼란이 빚어졌는가. 정부 내의 정책조율 부재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여기에는 재벌구조와 재벌해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오류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재벌해체라고 하면 흔히들 재벌기업을 박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해체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아마도 그런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재벌해체는 역사적 용어이며, 재벌 죽이기가 아니라 재벌 거듭나게 하기이다. 일본에선 1930년대부터 지금 우리처럼 재벌구조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은 다음에, 2차대전 이후 맥아더의 지시 하에 재벌해체가 단행되었다. 그런데도 재벌해체를 좌경이라고 모는 것은 반공주의자를 좌경으로 규정하는 정신병자 짓이 아닐까. 맥아더의 재벌해체는 총수의 왕조적 독재구조라는 봉건적 요소를 타파한 조치였고, 그 결과 일본자본주의는 한 단계 도약하고 고도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우리 재벌개혁의 방향도 일본의 예에서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재벌구조는 '총수세습지배체제 + 선단문어발경영'이다. 일본의 재벌해체 과정은 이 중에서 전자에 초점이 맞춰졌다. 즉 재벌총수와 기업을 분리시킨 것이다. 우리의 재벌개혁도 기업과 씨름하기보다는 총수와 씨름해야 한다. 무능 부패한 재벌총수들을 퇴출시키고 선진국기업과 같은 소유-지배-경영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선단문어발경영의 모순도 해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큰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우선 기업간 제휴와 다각화가 무조건 나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무능한 1인 총수가 계열기업들을 지배하고 있는 한, 자기 계열사끼리의 상호지원 방법을 어쨌든 강구하기 마련이며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치닫기도 쉽다.


  따라서 철저한 재벌개혁 즉 '재벌구조의 발전적 해체'는 일단 총수세습체제를 타파하고, 이를 통해 선단문어발경영의 폐해도 시정하는 게 올바른 접근이다. 그러려면 총수의 소유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일본에서처럼 총수의 소유지분을 강제로 매수하지 않고서도 가능하다. 즉 첫째로 생명보험사·증권사·투신사에 대한 산업자본의 소유제한 조치를 즉각 실시하며, 둘째로 현재 시행중인 부채의 출자전환을 확대 강화하여 고부채 재벌과 빅딜관련 재벌의 총수지배권을 이양받으며, 셋째로 총수들의 불법 비리를 엄정 처벌하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게 사유재산권 침해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재벌기업은 총수의 호주머니 속 장난감이 아니다. 재벌총수의 출자재산은 기업자산의 3%도 안되므로, 총수는 자기 재산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국민재산에 대한 수탁관리자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창업주라도 이미 판단력이 흐려졌고, 경영능력의 유전자란 게 존재하지 않는 탓에 2세 총수들은 대부분 무능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 관리자들을 교체키 위한 소유구조의 변화는 절박한 시대적 과제이다. 그것은 재벌기업을 선진국과 같은 책임전문경영의 대기업으로 환골탈태시키고,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더 고양시키는 길이다. 이제 우리에겐 기업과 국민경제의 거듭남을 위한 결단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