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개혁의 성과와 과제(1999.4) - 이코노미스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50

재벌개혁의 성과와 과제


   IMF사태 이후 우리 재벌은 전례 없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왔다. 6대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배째라 하던 초대마 5대 그룹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행태를 개선시킬 조치들도 어느 정도 제도화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재벌개혁의 사실상 종료를 선언하고 뒤치다꺼리나 잘 마무리하면 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아니 정작 재벌개혁의 핵심과제엔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이를 재벌개혁의 세 차원과 관련시켜 검토해 보자.


  첫째로 재벌개혁은 재벌기업 내에서 의사결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회계의 투명화, 소액주주 권한의 강화, 사외이사 제도의 도입을 시행하였다. 이는 물론 중요한 성과이다. 그런데 이것들의 효과에는 한계가 있으며, 특히 기관투자가·소액주주·노조(노사협의회)의 추천인사로 구성되지 않는 사외이사제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유능하고 성실한 최고경영진의 안정적 재생산이다. 그런데 이것을 재벌총수의 세습독재체제가 저해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지배구조의 개선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재벌개혁은 빈껍데기이다. 즉 재벌체제를 해체하고 선진적인 대기업체제인 책임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재벌개혁의 핵심인 것이다. 대한항공의 경영진 교체를 계기로 재벌들의 소유지배구조를 전면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재벌기업은 총수의 주머니 속 장난감이 아니다. 재벌기업을 살리기(work) 위해 무능·부패 총수를 퇴출시키는(out) 진정한 work-out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부채의 주식전환을 확대 강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단행할 수 있다.


  둘째로 재벌개혁은 국민경제에 대한 재벌의 과잉지배를 해소하는 일이다. 정부가 실시한 은행의 구조조정과 같은 조치가 이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엉뚱하게도 재벌의 은행소유 허용방침을 심심찮게 흘리는가 하면, 제2금융권에 대한 재벌의 지배력 확대를 방치하고 있다. 이럴 게 아니라 은행은 물론이고 투신·보험과 같은 제2금융권의 소유-지배-경영 구조도 그 공공성에 걸맞게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아울러 정치권·관료·언론·학계에 대한 재벌의 지배망도 하루빨리 타파되어야 한다.


  한편 재벌의 과잉지배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는 부당 내부거래를 단속하고 상호지급보증 해소를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자본의 유연성을 크게 훼손한 선단경영을 혁파하고 공정경쟁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지주회사를 허용하고 출자총액 제한을 해제함으로써 오히려 선단경영을 강화시키는 조치도 실시하였다. 이처럼 오른손으로 개혁정책을 내놓고 왼손으로는 그 정책의 효과를 상쇄·반감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으면 개혁은 도로아미타불이다.


  재벌개혁의 셋째 과제는 과잉투자의 해소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강제퇴출, 워크 아웃, 빅딜과 같은 여러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 결과 적어도 6대 이하 재벌의 경우엔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난 셈이다. 그러나 5대 재벌에서는 기껏 영세 사업체 처분이나 친인척 지분정리에 치중하였다. 그러다가 벼랑 끝에 몰린 대우만이 겨우 의미있는 조정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과잉의 정도를 판가름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자칫하면 지나친 축소지향(overkill)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5대 재벌들의 경우 총수의 세습독재체제와 국민경제 지배(인질삼기)가 버티기를 지속시키고 있음도 명백하다. 따라서 재벌체제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지 않는 한 구조조정의 지지부진은 불가피하다. 아울러 단식원에 잠깐 다녀온 비만환자처럼 과잉투자가 조만간 재발할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