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사외이사제, 대폭 강화되어야(1999.10) - 신용경제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56

 

사외이사제, 대폭 강화되어야

                                

  국가의 통치는 입법부·행정부·사법부 세 기관의 견제와 균형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에 한 사람, 한 기관이 국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른다면 그것은 독재정치이다. 또 그 권력이 세습된다면 전근대적 왕조체제이다. 이러한 독재정치와 왕조체제는 정치발전 과정에서 근대적인 민주국가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의 통치도 본질적으론 이와 마찬가지이다. 구멍가게라면 주인 멋대로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공적 성격을 갖는 주식회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기업 내에 견제와 균형이 작동해야 하고, 그것은 주주총회·이사회·감사 제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재벌구조에서는 총수의 왕조적 독재권력이 행사되어 많은 폐해를 초래하였고, 이를 바로잡자는 것이 바로 재벌개혁인 셈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위원회를 조직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내용이 담겨 있지만 재계로부터 특히 커다란 반발을 산 것이 사외이사 관련조항이었다. 자산 1조 또는 2조 이상의 기업에 대해 사외이사의 비율을 절반 이상으로 하고, 이 사외이사 2/3 이상으로 감사위원회를 구성토록 한 것은 지나친 규제라는 것이다.


  과연 재계의 불만은 정당한 것일까. 이른바 재계가 재벌총수 1인의 이익만을 위한 집단이라면 그들의 불만도 납득이 간다. 왜냐하면 총수 멋대로 하기가 과거보다 조금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과 그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자(주주, 종업원, 채권자, 고객, 지역주민)를 위하는 입장에서 보면 재계의 반발은 가당치도 않다.


  그리고 정부안은 우리 현실과 유리된 것일까. 그건 그렇다. 그러나 재계의 주장대로 너무 강력한 규정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취약한 규정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집단소송제나 단독주주권도 도입하지 않았고, 집중투표제도 유명무실한 권고사항으로 해 두었으며, 사외이사제도 강화된 듯하지만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인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이 다 자기 뜻대로 되었으므로 조용히 있을 법한데도, 형식적으로 강화된 듯한 사외이사제조차 재계로선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사외이사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주식회사의 집행기관인 이사회는 일반적으로 사내이사(집행이사 inside director)와 사외이사(outside director)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이사회는 대표이사를 선출하고, 기업의 주요사항을 결정하며, 대표이사를 감독.견제한다. 그런데 과거 우리 기업들에선 모든 게 총수 마음대로였고 이사회도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그러니 정태수 한보 총수가 경영진들을 머슴이라고 지칭했던 것이며, 사외이사제가 도입된 후에도 대표이사인 총수가 이사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재벌기업도 있었다.


  이러한 총수의 전횡을 방지하려면 이사회의 활성화는 너무나 당연한 조건이다. 그러려면 그 이사회에는 총수가 임명하는 집행이사만이 아니라 총수의 행동을 감시·견제하는 독립적인 사외이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재벌총수의 방만하고 탈법적인 경영이 IMF사태의 한 요인이었으므로, 사외이사제의 도입·강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IMF사태 이후 상장사의 경우 우선 25%의 사외이사를 두도록 했었다. 그것을 이번에 좀더 강화시켜 비율을 늘리고 상장사만이 아니라 주요 금융사에까지 확대하려는 것이다.


  재계에선 이런 사외이사제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조목조목 따져보기로 하자. 첫째로 사외이사제의 강화는 총수의 신속 과감한 의사결정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는 사외이사가 절반을 넘는 70%인데도 그 때문에 최고경영자의 의사결정이 지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총수의 졸속 무모한 결정 때문에 피멍이 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사회는 기업의 모든 사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요 사안만 다룬다. 그래서 잦아야 한 달에 한번이고 보통은 세 달에 한 번 정도 열리는데 그게 어찌 경영의 장애물이 되겠는가. 경영진의 불법 비리를 체크하는 게 주된 역할이고 어쩌다가 기업경영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게 사외이사들의 몫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것은 불법 비리가 기업 내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사안들과 관련하여 재계에선 약방의 감초처럼 들고 나오는 것이 기업가정신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들 말대로 기업가 정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기업가정신과 사기꾼정신·노름꾼정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익은 주로 총수 개인이 챙기고 손실은 주로 일반주주와 국민에게 떠넘기는 사기꾼정신'과 '능력도 없으면서 총수자리에 앉아 함부로 기업을 경영하는 노름꾼정신'이 판치면 시장경제는 오히려 문란해지고 퇴보하는 것이다. 사외이사제는 바로 이런 사기꾼정신·노름꾼정신을 막아내자는 것이다.


  둘째로 사외이사가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고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일면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사외이사에게 대단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원래 무리이다. 회사에 상근하는 게 아니라 1년에 몇 번 회의에 참석할 뿐인데 회사 사정에 어떻게 정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업계의 전문가라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아이디어가 있다면 자기가 직접 사업을 할 것이다. 사외이사의 주요 임무란 그저 회사가 순리대로 움직이는가를 감독하고 크게 잘못하고 있을 때에는 경영진을 교체하는 일이라는 것은 선진국의 예에서도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기업구조에선 총수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 즉 시끄럽지 않을 사람만 사외이사로 고르고 있으므로, 도대체 전문성 운운하거나 제 역할을 못한다고 비판할 형편이 못된다. 아니 총수의 입장에서는 들러리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하는 셈이다. 다만 그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아깝기는 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사외이사가 경영진을 감독하고 필요한 경우엔 교체권도 행사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하면 그건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외이사의 임명을 총수가 마음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외이사의 비율을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고, 후술하겠지만 사외이사의 선임방식을 개혁해야 한다. 


  셋째로 사외이사를 늘리라고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불평도 있다. 그리고 사외이사를 통해 기업비밀이 유출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은 사외이사 비율증대 대상은 모든 기업이 아니고 자산 1조 이상의 대규모 기업과 정부출자기관 및 주요 금융기관이라는 점이다. 현재 사외이사는 2.000명 미만인데 1조원 이상의 기업이 약 140개이므로 300여명 정도가 더 필요할 뿐이다. 이런 정도의 충원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리고 총수의 들러리 노릇할 사람 중에서만 뽑지 않는다면 인적 자원은 얼마든지 있고, 사외이사꾼만 좋은 일 시켜주지 않나 하는 우려도 사라진다.


  기업비밀이 유출될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도 억지다. 비록 있다손 치더라도 장 담그는 데 생기는 구더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선진국에선 사외이사가 유사 업종의 경영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만약에 기업비밀이 유출된다면 어떻게 그런 사외이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업비밀이란 것은 주로 생산기술에 관련된 경우가 많으며, 영업과 관련된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것들이 이사회에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외이사에게도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기업비밀을 누설하면 처벌받기 마련이다. 


  넷째로 사외이사제 강화는 강제규정보다는 업계의 자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한국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재벌구조하에선 자율에 맡기면 대부분이 채택하지 않을 게 뻔하다. 사외감사제도 권고사항으로 했더니 새롭게 도입한 기업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재계의 주장이 총수의 이익만을 대변한 억지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부안이 썩 잘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정부안은 선진국 지배구조의 핵심을 빠뜨렸을 뿐만이 아니라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에는 재벌구조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즉 집단소송제.단독주주권.집중투표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특히 사외이사의 선임방식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다. 


  정부안은 미국제도를 많이 모방했는데 미국현실과 한국현실은 상당히 다르다. 미국의 대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창업기업을 제외하곤 대부분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책임전문경영기업이다. 따라서 사외이사의 임명에 경영진이 아닌 주주 등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사외이사제가 나름대로 기능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재벌총수의 세습독재가 자리잡고 있으므로 사외이사 비율을 늘려본들 다 총수가 임명하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외이사로 감사위원회와 사외이사후보 추천위원회 등을 구성하더라도, 그 사외이사 자체를 총수가 사실상 임명하는 한 별 효과가 없다. 물론 앞으로는 사외이사에 대해서도 소송이 제기될 수 있으므로 약간은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임원배상책임보험을 통해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되어 있다. 


  사외이사제에서는 양도 중요하지만 질이 더욱 중요하다. 사외이사제가 정말로 제 구실을 하려면 총수의 무능·전횡을 견제할 의사와 능력을 가진 인물들로 사외이사가 구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의 감독이사회제도를 응용하여 사외이사는 '채권단 또는 기관투자가', '소액주주', '노동조합 또는 노사협의회'의 추천인사가 각각 1/3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참여와 협력에 기초한 생산적 노사관계도 발전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외이사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사외이사제를 포함한 지배구조의 개선과 더불어 소유구조의 선진화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재벌기업의 세습독재구조를 선진국과 같은 책임전문경영체제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개혁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새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