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기업가정신과 재벌개혁(1999.11) - 경향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58

기업가정신과 재벌개혁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구속되었다. 바이 코리아 펀드로 한참 잘 나가더니만 덜컥 꺽이고 만 셈이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하지만 시장질서를 파괴한 범죄행위가 용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같으면 이런 경우엔 경영진이 민형사상으로 처벌받음은 물론이고 해당 회사까지 폐쇄당한다고 한다. 시장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중대한 體制事犯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수가족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와 처벌은 무산되었다. 고용경영자와는 달리 총수는 역시 성역인 모양이다. 최순영회장과 같은 라이트급 총수 한 명 잡아넣고도 옷 사건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쳤는데, 어찌 감히 헤비급 총수를 건드릴 자신이 있겠는가. 외환위기 청문회에 재벌총수들을 소환하지 않은 것이나, 삼성의 상속과정에서 저질러진 불법혐의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법의 심판이 제대로 내려지지도 않고 단지 눈앞에 어른거리기만 했는데도 재계는 심한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안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럴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 것이 기업가정신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모 재계원로는 '기업인이 존경받을 때 선진국이 된다'는 교시까지 내려주었다. 


  백 번 지당한 논리이고 교시인 것 같다. 일찍이 슘페터도 이야기했듯이 기업가란  새로운 상품, 시장 및 생산.경영방식을 개발하는 존재이다. 자본주의의 발전도 바로 이러한 혁신(innovation)을 추구하는 기업가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기업가정신과 사기꾼정신.노름꾼정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익은 주로 총수 개인이 챙기고 손실은 주로 일반주주와 국민에게 떠넘기는 사기꾼정신'과 '능력도 없으면서 총수 자리에 앉아 함부로 기업을 경영하는 노름꾼정신'이 판치면 시장경제는 오히려 문란해지고 퇴보하는 것이다. 물론 선진국에는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으며 우리도 이렇게 되면 참 좋겠다. 그러나 존경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경받도록 행동함으로써 저절로 주어지는 법이다. 무능 부패하지 않고 유능 성실하다면 누가 미워하겠는가.


  사실 재벌개혁이란 것이 다름 아니라 바로 진정한 기업가정신을 발전시키고, 존경받는 기업인을 배출시키는 일에 귀착된다. 재벌개혁이란 흔히 오해하듯이 기업을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기업경영이 잘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첫째로 유능한 인물이 최고경영진에 들어서야 하며, 둘째로 그 인물이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자들을 위해서 성실히 일해야 하며, 셋째로 그렇지 못할 경우엔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삼척동자라도 이해할 극히 당연한 조건이다. 그러나 재벌의 세습독재체제 하에선 총수가 의사표현능력을 상실할 때까지 경영권을 행사하고, 경영능력의 유전자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2세가 기업을 물려받으며, 그 총수는 봉건시대의 제왕처럼 전횡한다. 이런 재벌구조에선 기업경영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위 세 조건의 충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유.지배구조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중소기업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장 개인재산이고 망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재벌기업은 총수의 출자재산이 기업재산의 3%도 안되며 나머지는 국민재산이다. 또 재벌기업이 망하면 국민경제가 흔들거린다. 이 때문에 재벌구조를 혁파하여 선진국의 대기업형태인 책임전문경영구조, 즉 능력 있는 인물이 책임성 있게 경영하는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정부도 깨닫는 듯했으나 구체적인 조치들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주요 제2금융권에 대한 산업자본의 소유제한도 물 건너갔으며, 불법비리 총수에 대한 엄정 처리도 기대난망이다. 부채의 출자전환도 소유구조 개혁이 아닌 일방적 특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배구조 개혁에서도 채권단.소액주주.노조의 추천인사로 감사위원회나 사외이사를 구성할 생각은 안 하고 여전히 총수의 들러리인 사외이사의 숫자만 늘리려 한다. 집단소송제도 도입하지 않았고, 집중투표제도 실효성 없는 권고에 그칠 모양이다. 시장이 더 이상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 8.15 선언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려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개혁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