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IMF, 김대중정권과 노동자(1998. 8) - 금속연맹 기관지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44

  IMF, 김대중정권과 노동자


  IMF 날벼락이 떨어진 지 9 개월, 김대중 정부가 등장한 지 6개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어리둥절했겠지만 주위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 거리로 내쫓기면서 점차 사태의 심각성이 온몸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한편에선 안도감을 느끼겠으나 다른 한편으론 동료를 내보낸 데 대한 미안함이 가슴을 짖누르고 있다. 게다가 자신도 언제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휩싸고 있으며 근로조건이 악화되어도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사실 수십년 동안 재주는 곰(노동자)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재벌총수, 고급 정치인 및 관료, 졸부 투기꾼)이 챙기다가 이제 조금 나아져 가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왕서방이 위험성도 잘 모른채 함부로 해외자본을 들여와 방만한 투자와 낭비를 일삼는 분탕질을 친 탓에, 억울하게 노동자등 일반국민만 흙탕물 아니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하지만 탄식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선 원래 경기가 좋았다 나빴다 하기 마련이다. 여기다가 우리의 경우엔 압축적 고도성장 속에 압축적으로 누적된 문제점이 한꺼번에 폭발함으로써 소위 6.25 이후의 최대 난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어려움을 타개하려면 우선 우리를 옥죄이고 있는 IMF라는 외압의 성격과 김대중 경제정책의 실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IMF가 인류애에 가득찬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제적 자본의 이익을 위한 조직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즉, 외국빚을 상환하기 힘들어 구제금융을 신청한 나라들에 대해 빚을 꼼짝없이 갚아 가고, 나아가 국제적 자본이 제멋대로 활동할 수 있게끔 이런저런 요구를 들이대는 것이 IMF이다. IMF의 구체적 요구들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신자유주의에 입각하고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이 돈버는 데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없애버리자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개방화,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정리해고), 사회보장 축소 따위를 추진하고자 한다. 따라서 IMF는 우리에게 외국자본을 위해 문을 더 활짝 열 것, 공기업을 민영화할 것, 정리해고제를 도입할 것 등을 강제한 것이다. 한편 IMF는 이밖에도 긴축정책을 강요하였고, 그 결과 기업이 대거 도산하고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러면 김대중정부는 이러한 IMF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여 왔는가. 물론 빚을 제대로 못갚는 처지라 당당하게 대처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현 정부는 IMF의 요구에 지나치게 순종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사실 현 정부는 IMF의 모든 요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처방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IMF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왕 몸을 뺏길 바엔 상대방이 애인이다라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물론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국가부도를 각오하고 IMF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 IMF의 요구가 무조건 나쁜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외국자본이 한국기업을 인수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강요한 것이긴 하지만, 기업경영의 투명성 강화는 어쨌든 이루어져야 하는 사항이다. 그리고 개방화라는 대세를 완전히 되돌려 놓을 수는 없으며 외국자본이라고 못된 짓만 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IMF는 병 주고 약 주는 식이긴 하지만, 실업대책을 위한 적자재정을 허용하는 등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정책도 시행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처지에 걸맞게 IMF의 요구를 수용하고 부당한 요구엔 대해선 거부할 자세를 정부가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기껏 고금리 문제에 대해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는 척 했을 뿐이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는 IMF의 입맛에 딱맞게 외자도입 지상주의를 내세우고 있다고 보여진다. 재차 강조하지만 외자도입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으며 필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자도입을 위한답시고 공공성이 강한 공기업도 모조리 헐값에 팔아치우려는 등 간도 쓸개도 다 내주고 있다. 그리고 외국자본과의 형평를 유지한다는 명분 하에 재벌의 은행 소유를 허용하는 등 재벌개혁에 역행하는 조치도 서슴지 않고 있다.


  좋게 봐주자면, 현 정권도 과거 재벌과의 유착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으며 공동정권이라는 제약도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심하지 않은가. 자신들이 좌우명으로 내걸고 있는 '민주적 시장경제론'만 하더라도 그렇다. 김대통령 자신의 이전 저서에 따르면 '민주적'이란 표현은 경제적 민주주의까지 포괄하는 개념임에도 현 정권은 '민주적'을 정치적 민주주의로 왜소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시장 만능주의를 받들어 모심으로써 시장의 불완전성과 폭력성에 대한 대처가 지극히 부족한 것이다.


  각종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재벌개혁은 기껏 IMF가 요구하는 수준 정도만 추진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 즉 재벌총수의 왕조적 독재체제를 타파하고 민주적 책임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거의 내팽개치고 있다. 한편 요즘엔 개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구조조정이란 말만이 난무하게 되었다. 구조조정은 공공부문, 금융 및 기업의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되어야 개혁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런데 현 정권은 구조조정을 통폐합과 인원축소로만 왜곡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재벌총수의 소유경영체제를 혁파한 다음 경기부양정책으로 전환하면 해고자 숫자도 크게 줄일 수 있을 터이다.


  사상 처음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뭔가 나아지지 않겠는가 했는데 해고나 근로조건 악화의 칼날이 휘날릴 뿐이라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부실대출, 부실경영을 초래한 장본인들이 정치권, 관료와 재벌총수들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빼돌리거나 모아둔 재산없는 노동자들이 왜 그 죄를 덮어쓰고 벼랑끝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인력배분이 잘못되어 있다면 고용조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 우선 부실의 책임에 상응하는 공평한 고통분담이 있어야 한다. 또 고용조정시엔 사전협의가 전제되어야 하며 충분한 해고회피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대통령이 자택 이외의 모든 재산을 국가재건기금에 헌납하고, 재벌총수들은 자산의 재산 절반(현물 및 주식)을 국가재건기금과 해고자 보상금 및 임금삭감 보상금으로 헌납케 하고, 고소득자 및 재산가에게는 한시적으로 국가재건특별세를 부과하면 어떨까. 이런 정도의 획기적 조치가 없다면 우리 노동자와 국민들이 참을 수 있을까.


  물론 노동자들도 억지를 써서는 안된다. 난국에 직면하여 양보할 것이 무엇이고 지키거나 발전시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욕만 덮어 쓸 우려가 있다. 가급적 당면의 물질적 이익은 일부 양보하더라도 노동자의 단결과 권리는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들은 어려운 때일수록 굳게 힘을 모아 개인과 노조를 지킴은 물론 기업과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