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고유의 글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3)

동숭동지킴이 2011. 9. 18. 22:32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3)

 

김 기 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곽노현 교육감이 구속되었습니다. 곽 교육감의 행동이 선의에 입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본인에겐 안타깝고 우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블로그 글을 이어갈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재하던 내용에 대해선 일단 마무리는 지어 볼까 합니다. 그게 본인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답답한 느낌 속에서 쓰는 글이라 글의 분위기가 좀 어둡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지난 글 ‘고달픔(2)’에 이어서 이번 글에선 본인의 실제 무용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싸움꾼은 체력과 정신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본인은 둘 다 형편없어서 사실은 무용담이 아니라 고생담입니다.

 

본인의 싸움은 1997년 IMF사태의 발발로 시작되었습니다.  IMF사태는 1997년 초 한보그룹의 도산을 필두로, 무분별한 투자를 일삼았던 재벌들이 줄초상을 맞이한 게 주요한 하나의 요인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시엔 재벌개혁의 절박성이 크게 대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재벌관련 공부를 해 오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참여연대의 재벌개혁 운동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재벌개혁을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전경련 등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싸움은 골목에서 갈비뼈 부러질 각오하고 맞장 뜨는 게 아니고 주로 말과 글을 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삿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싸우는 당사자로선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학술논쟁이 아니라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의 싸움터라서, 논쟁에서 밀리면 곤란하다는 강박관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TV토론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일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실(fact)과 논리를 둘러싼 논쟁이라면 그래도 괜찮은데, 전경련 등의 논객 중엔 지저분한 방식으로 공격을 해 오는 경우가 있어서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맑시스트가 아니냐” “당신은 기업을 전혀 모른다” “당신의 주장은 너무 낭만적이다” 따위의 공격이 그런 예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격들에 대해서도 뭐라고 반박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니 참으로 못해먹을 노릇이었습니다.

 

이렇게 몰상식한 논쟁이 이뤄지는 판이니, 본인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이 재벌을 죽이거나 혼내주는 게 아니라 선진적인 대기업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는 걸 수구진영에 이해시킨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재벌 쪽에선 본인의 뜻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손을 좀 보는 게 어떤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 논의는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아 본인은 아직 건재합니다. 하하하)

 

어쨌든 이렇게 재벌개혁 운동에 끼어들면서 재벌에 근무하던 친구들과 사실상 의절상태가 된 것은 당연한 업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진보파가 재벌로부터 부적절한 지원을 받은 걸 비판하자 그들과도 척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IMF사태 이후 본인의 고달픔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재벌체제를 고수하려는 수구파뿐만 아니라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진보파와도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수구-개혁, 진보-보수라는 개념들에 대한 본인의 정의는 https://kkkwkim.tistory.com/111 을 참고하십시오.)

 

이하에서는 바로 그처럼 진보파와 본인이 충돌한 몇 개의 사례를 통해 우리 진보파(다수 또는 일부 진보파)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IMF사태 이후 한국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본인은 다수 진보파와 의견을 달리 했습니다. 그들은 IMF사태 이후 오늘날까지의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IMF사태를 맞아 IMF가 사실상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는데, IMF는 감세·규제완화·민영화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이므로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듯하지만, 재벌개혁에 참여하던 본인에게는 그러면 재벌개혁도 신자유주의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 시대에 자리 잡은 재벌체제를 바로잡는 게 어떻게 신자유주의인가 하는 것이었지요.

 

재벌개혁의 내용을 보더라도, 과잉채무를 정리하고 총수의 책임을 강화하는 걸 어찌 신(新)자유주의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개발독재 즉 중상주의를 탈피하는 구(舊)자유주의 개혁이라 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재벌개혁뿐만 아니라 노동부문에서의 노사정위원회 설치라든가 분배 악화를 방지하려는 기초생활보장제 같은 것들 역시 신자유주의로 규정할 수 없는 정책들이었습니다.

 

이처럼 IMF사태 이후의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보자기로 덮어씌우는 진보파 논리의 문제점에 대해선 김대중 정부 당시에 이미 본인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https://kkkwkim.tistory.com/37).

 

DJ정부는 신자유주의인가 (2000/11/22) - 한겨레신문

DJ정부는 신자유주의인가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지금 우리 사회에는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논란이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한국에도 본격

kkkwkim.tistory.com

 

한편, 우리의 많은 진보파는 김대중정부뿐만 아니라 노무현정부나 이명박 정부도 모두 똑같은 신자유주의로 규정함으로써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단순논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정권들의 정책 차이를 외면함은 물론이고, 정책의 성격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MB정권의 4대강 사업은 개발독재 시대의 전형적 정책인데도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게 너무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일부는 나중엔 ‘토건형 신자유주의’ 또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라는 규정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자유주의라는 규정에 집착해 형용모순적 개념을 사용하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선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 등등 여러 이데올로기(및 정책)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모두 신자유주의 정당이라는 단색으로 색칠하는 사고체계에선 군사독재 시대처럼 오직 투쟁만이 정답입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권과의 ‘일면 연대, 일면 투쟁’ 같은 유연한 전략 전술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 이전까진 우리 진보정당들의 자세가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진보파는 왜 이렇게 현실을 과도하게 단순하게 파악하게 되었을까요. 가혹하게 평가하자면 이는 지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보수적 지식사회는 구미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적 지식사회도 마찬가지로 구미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습니다. 다만 전자에선 구미의 주류 지식사회, 후자에선 비주류 지식사회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한국 진보파의 신자유주의론은 구미 비주류의 신자유주의론을 한국 현실과 제대로 대조해 보지 않은 채 직수입한 결과물인 셈입니다. 구미의 선진이론을 열심히 공부하기는 해야겠지만 이렇게 비주체적인 자세로서는 한국적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선진화된 구미에서는 시장만능주의와 복지주의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압축적으로 발전한 한국에선 그 두 가지 사조와 아울러 아직껏 강력히 잔존하고 있는 개발독재(중상주의)와 구자유주의도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게 구미선진국과 한국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나아가려면 개발독재를 극복하는 구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시장만능주의에 빠지지 않고 복지주의를 강화해야 합니다.

(참고로 조선일보가 최근에 소개하고 있는 ‘자본주의 4.0론’도 신자유주의론과 마찬가지로 한국적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은 구미의 이론일 뿐입니다.)

 

한국의 진보파 특히 노동운동권이나 진보정당들이 오랫동안 내걸어온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운동의 구호란 긍정적인(positive) 내용을 담아야 하는 법인데, 이런 부정적 구호로 대중을 획득하려는 게 참으로 답답합니다.

 

도대체 그런 구호로 어떤 사회를 목표로 하는지도 알기 힘듭니다. 자본주의를 타도하자는 것인지 개혁하자는 것인지, 그리고 만약에 개혁하자고 한다면 어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구호를 내건 당사자 자신도 잘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리 된 것은 운동의 구호가 한국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진보파 일각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에 그치지 않고 ‘복지사회’라는 목표가 제기된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고 사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대중과 유리된 용어이고, 아울러 시장이 갖는 긍정적 측면이 경시됩니다. ‘시장만능주의’라는 더 적합한 용어를 본인이 주창했건만 아직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https://kkkwkim.tistory.com/97 을 참고하십시오.)

 

신자유주의 타령을 넘어 <한겨레> 2008. 7. 17

한겨레> 2008. 7. 17 신자유주의 타령을 넘어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이명박 정권의 본색은 이제 꽤 드러났다. 그런데 진보인사 중엔 현 정권의 경제노선을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경우가

kkkwkim.tistory.com

 

원래 신자유주의는 진보파가 비판하는 neo-liberalism의 번역어인 셈인데, neo-liberalism과는 달리 미국의 뉴딜과도 통하는 new liberalism도 신자유주의로 번역 가능합니다.

 

이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도 neo-liberalism과 같은 뜻인 market fundamentalism을 우리 식으로 번역한 시장만능주의가 더 적합한 용어입니다. 시장근본주의(시장지상주의)라는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대중의 귀에 더 쏙 들어오는 용어가 낫지 않을까요.

 

또한 진보파의 신자유주의론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진보와 개혁’이라는 두 개의 과제 중 개혁의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시장의 긍정적 기능을 외면하다보니 '공정한 시장경쟁'을 위한 개혁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것입니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선 자본시장에서의 재벌개혁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부당한 차별 즉 대기업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부당한 차별을 바로잡는 개혁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노동시장에서 상대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조조직과 연결된 진보파로선 이런 개혁이라는 과제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미 선진국에선 시장과 국가의 개혁이란 게 우리만큼 절실한 과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구미의 비주류 지식사회에서도 개혁이 화두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진보파는 이런 흐름을 맹목적으로 수입함으로써 개혁의 과제를 경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오류와 싸우는 본인의 고달픔은 한국의 진보파들이 본인의 주장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뭔가 논쟁을 해야 서로가 발전할 텐데 본격적인 반론을 접한 바 없습니다. 본인의 주장은 외로운 메아리에 그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론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꽤 길어졌습니다. 한국의 진보파는 걸핏하면 신자유주의를 입에 올리고 있으며, 또한 그런 신자유주의 타령의 문제점이 한국 진보파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의 근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압축적으로 발전해온 한국현실의 특수성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개혁의 과제를 경시하고, 시장의 기능을 나쁘게만 생각하는 오류가 바로 그런 것들이지요. 아래에 언급할 사례들도 다 이런 오류에 기인합니다.

 

두번째로, 2001년 대우자동차의 해외매각을 둘러싸고 본인은 진보파와 격렬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김우중 회장의 방만한 부실경영으로 대우차가 파산했습니다. 이 파산한 대우차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노조(및 그와 결합된 진보파 학계)와 본인이 한판 붙은 것이었습니다.

 

노조-진보파는 GM에 대한 매각과 노동자 일부의 정리해고에 결사반대했습니다. 대우차는 2011년의 한진중공업과는 달리 이미 파산한 처지였으므로 노조가 대들 상대도 마땅찮았습니다. 김우중회장은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정부가 세금으로 대우차를 끌고 가라는 요구였던 셈이지요.

 

본인은 예전에 연구조사차 대우차 경영진과 노조를 인터뷰한 일이 있었으므로 이런 위기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구조조정 담당자를 비롯해 자동차 전문가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 결과 노조의 요구가 무리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위기상황의 자동차회사를 정부가 지원한 외국 사례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선 현대차라는 더 큰 회사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어서, 경쟁사인 대우차를 정부가 적극 지원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정부는 기껏해야 지원하는 시늉만 할 뿐이고 그러다간 대우차는 말라죽을 게 뻔했습니다. 따라서 GM으로의 매각이 그다지 내키지는 않더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게 경영진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일반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지 않는 대우조선이나 하이닉스 같은 경우엔 은행관리 상태에서도 회사의 재건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소비자의 인식이 중요한 대우차에선 은행관리로 계속 끌고 가면 회사는 시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또한 IMF사태와 파산으로 가동률이 떨어진 상황에서 일정한 정리해고 역시 불가피했습니다. 나중에 경영이 정상화되어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조는 GM 매각과 정리해고에 반대해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심지어 정리해고에 앞서서 무급 순환휴직을 시행하자는 제안조차 거부했습니다.

 

무조건 버티면 수가 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사고였습니다. 정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한국의 자동차업계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고려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진보파는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군사독재 반대투쟁(정치투쟁) 방식을 그와 사정이 판이한 시장투쟁에서도 그대로 답습했던 셈입니다.

 

본인은 노조-진보파의 이런 투쟁은 결코 노동자를 위한 길이 아니라고 신문에 칼럼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민주노총에선 “등에 비수를 꼽았다”고 비난했습니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신당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신문 칼럼과 공청회 토론문은 https://kkkwkim.tistory.com/45https://kkkwkim.tistory.com/47 등을 참고하세요.)

 

그리고 이와 관련해 대우차가 소재한 인천의 공청회에도 여러 번 참가했고 거기서 봉변(?)도 당했습니다. 발표자 자격은 주지 않고 토론자로서만 참가한 공청회였습니다.

 

인천 시민단체가 주최한 행사에선 노조측 교수가 발표했고 그 다음에 본인이 토론을 하게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토론할 차례가 되자 청중석에서 노동자 한두 명이 철제의자를 집어 들더니 고함을 치면서 본인에게 집어던지려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대우차 노조가 직접 와서 깽판치기 뭣하니까 인천의 다른 노조원에게 시킨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청회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 노동자가 본인에게 정말로 폭력을 행사할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공청회를 중단시키는 게 목적이었겠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인천지역 한나라당이 주최한 공청회에서였습니다. 역시 발표자는 노조측 교수였습니다. 본인은 토론자 중 한명이었는데, 이때는 한나라당 주최라서 그런지 앞에서와 같은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토론을 하려니 청중석 일각에서 야유가 일었습니다. 이런 야유 정도야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공청회가 끝나자 인천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가 본인에게 다가와 신변 보호를 제안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습니다. 대우차 노동자들을 위해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데 그 노동자들로부터는 야유를 받고, 본인이 대학 때부터 싫어해온 정보과 형사로부터 도움을 제안 받다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 후 사태의 전개는 본인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GM이 인수한 후 경영이 정상화되자 해고됐던 노동자는 복직되었습니다. 이게 시장의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논리를 진보파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대우차 노동자 다수도 본인의 생각이 옳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차마 그걸 입 밖에 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그들이 말 못하는 진실을 대변했을 뿐입니다. 본인의 발언 이후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어 갔다고 들었습니다.

 

한편, 본인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회사 측과는 일체의 연락 없이 본인의 주장을 펼쳐 나갔습니다. 나중에 회사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면서 본인에게 기념식 초대장을 보냈지만 참석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우차 노동자 중엔 방송통신대 학생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당시엔 본인을 미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진보파의 오류와 싸우는 건 이처럼 고달픕니다. 싸울 당시에 오해받는 건 각오한 바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이해하게 되면 그땐 미안했다든가, 사실은 고맙게 생각한다든가 해주면 좋을 텐데. 아마도 그들의 삶이 너무 각박해서겠지요.

 

세번째로, 2004년의 성매매처벌법과 관련해서도 진보파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선 이미 본인의 블로그 글 https://kkkwkim.tistory.com/131http://kkkwkim.tistory.com/133 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여기선 거기서 빠트린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이 신문사에 관련 칼럼을 썼더니 진보적 여성단체 분들이 해당 신문사로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선 글 내용에 항의를 하고 본인을 칼럼진에서 제외시키라는 요구를 했답니다. 어쩌다가 본인이 진보파의 배척 대상으로까지 전락했나요. 아하---.

 

신문사에서 그건 수용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의 반론을 싣고 본인이 재반론을 썼습니다. 신문 글이 명예를 훼손했거나 거짓을 늘어놓았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자기들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필진에서 빼라는 건 건전한 상식에 위배되지 않을까요.

 

비판적 지식인들을 독재정권이 지하실에서 두들겨 패거나 극우파가 가스통 들고 언론사에 쳐들어온 것만큼은 아니라도, 이 역시 개혁되어야 할 비상식적 처사로 생각됩니다. 진보적 집단이라고 항상 옳지는 않겠지요.

 

최근의 안철수 현상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부분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진보든 보수든 건전한 상식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보수수구파가 몰상식한 방식으로 나라를 지배해 왔기 때문에 그와 싸우는 진보파도 거기에 물들어버린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이게 이른바 “싸우면서 닮는다.”는 것이지요. 한국사회 개혁의 과제란 바로 이런 부분까지 포함합니다.

 

성매매 처벌법과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하겠습니다. 심상정의원이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 등장했을 때 신문사의 의뢰로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심의원은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진보파입니다. 국회의원 때는 재경부장관을 쩔쩔매게 했을 정도로 능력도 뛰어납니다. 그런 심의원에게 성매매 처벌법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무렵 성매매처벌법에 반대하는 성매매 여성들이 국회 앞에서 수십일 동안 천막농성을 벌인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의원에게 그 여성들과 대화를 나눠 본 적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매매처벌법 관련 공청회에는 참가한 적이 있는데 정작 그 법의 당사자인 성매매여성은 만나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니 국회를 매일 들락거리면서 목격하게 되는 농성여성에게 한 번도 들려보지 않다니.

 

물론 국회에는 온갖 사람들이 민원을 제기하러 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은 짜증도 날 테고 그런 민원에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심의원의 태도는 우리 진보파의 문제점을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심의원이 소속되었던 민노당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단히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들이야말로 민노당이 뿌리칠 게 아니라 손길을 내밀어야 할 대상이 아닐까요.

 

민중을 위한다고 하지만 민중을 가르치려고만 들지 그들과 더불어 호흡을 나누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게 우리 진보파입니다. 수십 일이나 농성을 하고 있으면 한 번쯤은 거기 들려서 그들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안철수 현상과 관련해 진중권씨는 ‘전위(前衛)와 멘토(mentor)’의 차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진보파의 소통방식이 아직 전자에서 못 벗어났다면 안철수교수의 소통방식은 후자에 가깝지요.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민주화 바람 덕에 국회의원이 된 재야인사가 지역구 행사에 내려오면 늘어선 그 지역인사들과 악수를 합니다. 그럴 때 그 국회의원의 눈길은 자신과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다음 사람에게 가 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요.)

 

악수하는 행위 자체가 그 국회의원에겐 별로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자연히 다음 사람에게 눈길이 간 것이겠지요. 전위로서 대중 위에 군림하려 하지 대중과 마음을 나눌 생각이 없었던 탓이라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요. (참고로, 노련한 보수정치인들은 악수 한 번 한 번에 온 정성을 쏟습니다.)

 

노무현정권의 중요한 잘못 중의 하나가 대중의 삶과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본인이 쓴 일이 있습니다. 이는 노무현 정권만이 아니라 우리 진보파 다수에게 해당되는 걸로 보입니다. ‘생활진보’가 아니라 ‘관념진보’라 할까요.

 

물론 무조건 대중의 요구를 추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대중의 삶과 정서를 무시하고 진보파 자신의 관념을 대중에게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참 어렵지요.

 

예전에 DJ는 이를 “대중보다 반 발 앞서 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진리는 서커스 외줄타기” 같은 느낌도 듭니다. 어쨌든 대중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수불가결하다는 정도로 하지요.

 

네번째로, 본인은 장하준 교수와 충돌했습니다. 세계적 명문인 캠브리지대학 교수이고 책도 100만 권이나 팔린 그와 싸우려니 이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주장에는 허점이 많았고 특히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등 한국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두 번이나 그를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https://kkkwkim.tistory.com/115 및 https://kkkwkim.tistory.com/117  을 참고하십시오.)

 

장하준 교수 재비판 <오마이뉴스> 2011. 2. 18

<오마이뉴스> 2011. 2. 18 장하준 교수 재비판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필자는 한 달쯤 전 장하준 교수에게 논쟁을 제기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장교수 본인이 아니라 장교수 책을 출

kkkwkim.tistory.com

 

그랬더니 그가 반론을 쓰지는 않고 엉뚱하게 그의 책을 펴낸 출판사 사장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장교수는 기껏 신문사들의 인터뷰에 응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본인이 제기한 비판과는 동떨어진 답을 해왔습니다. 한국의 진보파들이 떠받드는 장교수와 싸우려니 싸움터도 제대로 마련이 되지 않은 셈입니다.

 

특히 안타까운 일은 일부 진보 신문사의 태도였습니다. 본인은 그 신문사에 기고를 많이 한 바 있고, 장교수도 여러 번 기고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가 난처했는지 아예 본인이 제기한 논쟁을 소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앙일보나 한국일보처럼 본인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신문들은 논쟁을 다뤄줬습니다. 물론 진보 신문사가 본인의 장교수 비판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쟁점과 정면에서 부딪치기를 꺼려했거나, 장교수와 같은 지적 권력자에 주눅 들어 있었던 탓이라면 그건 큰 문제입니다.

 

장교수를 비판하기 이전에 장교수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모교수와 논쟁을 벌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노무현 정권 당시 정책기획위원회의 프로젝트를 그 교수가 수행했고, 그 보고서를 위에 올리기 전에 최종 점검하는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본인은 그 교수 주장의 문제점을 여러 페이지로 써서 지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토론이 파했을 때 “조심하시오”라고 마치 조폭이 협박하는 것 같은 말투를 던졌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우리 진보파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피터지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제대로 된 논쟁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패거리 의식만 남았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요. 이건 우리 사회 진보조직 여러 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논쟁을 걸어도 고달플 뿐이지요.

 

다섯번째 사건은 예전에 이미 다룬 바 있는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된 것이므로 특별히 재론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본인으로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일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트위터에서 “김모는 앞으로 대가를 치를 날이 있을 것이다” 따위가 돌아다닌 것은 차라리 별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일시적 흥분에 따른 해프닝일 테니까요.

 

그런데 본인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분과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왜 희망버스 관련 글을 썼느냐고 질책에 가깝게 따져왔습니다.

 

이어지는 그분 말씀은 김진숙씨가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추궁에 너무 황당해서 그 자리에선 제대로 답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이 김진숙씨를 나쁜 사람이라고 쓰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불쌍한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더라도 무조건 다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닐 터인데 두고두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본인이 글을 그렇게 이해되기 어렵게 형편없이 썼는가 하는 자책마저 들었습니다.

 

사람의 사고라는 게 어떻게 형성되는지 앞으로 찬찬히 연구해봐야 할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호불호(好不好) 또는 이해관계가 먼저 자리잡고, 그 다음에 그런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갖다붙이는 게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바 자기편이라면 무조건 옹호하려 하고 반대편이라면 무조건 비난하는 경향도 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논리의 힘이 이렇게 취약하다면,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을 본인이 논리로써 바로잡으려는 게 허망한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10년 전 대우차 사태 때 지적한 사실을 또다시 한진중공업 사태에서 반복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9월 15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김인규 교수는 한진중공업 관련 글을 갖고서 필자가 우클릭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요즘이 아니라 이미 10년 전에 우클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김교수의 글은 본인이 주장하는 '개혁과 진보의 결합'이라는 과제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매일매일 경쟁자와 생사의 투쟁을 벌이는 기업가나 정치가나 조폭에 비하면 본인의 싸움은 감히 싸움이라고 명함을 내걸 수도 없습니다. 다만 교수로서 본인만큼, 게다가 ‘좌충우돌’하면서, 싸운 사람은 그다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싸움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싸우면서 깨닫게 된 우리 진보파의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해야 진보파도 거듭나고 한국사회도 바람직한 선진화로 나아갑니다. 그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습니다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 진보파 다수의 문제점은 한국현실의 특수성에 기인한 개혁의 과제를 소홀히 하고, 시장의 논리를 무조건 배격하고, 대중의 삶과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논쟁을 제대로 꾸려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것들이 본인을 고달프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달픔도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하. 이제 블로그 글을 이어 쓰게 된다면 앞에서 쓰다가 일시 중단한 ‘운명’ 시리즈 3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