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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2)

동숭동지킴이 2011. 8. 23. 15:17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2)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글에 이어서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주로 본인이 직접 보고 들은 걸 가지고 그 문제를 다뤄볼까 합니다. 단편적인 경험으로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할 위험성은 있지만, 반면에 그래야 생생한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단서를 달아야 하겠습니다. 본인이 진보파의 잘못을 다룬다고 하니, 독자들은 혹시 진보파는 온통 잘못만 저지르는 집단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파는 우리 사회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엄청난 자기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끌어 왔으며,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의 삶을 개선시켰습니다. 지금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주도세력도 이쪽이지요.

 

물론 진보파는 선(善)이고 보수파는 악(惡)이란 식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의 책(<경제학 포털>) 서문에 썼듯이, 진보(좌파)는 음(陰) 또는 모성(母性)을 대변하며 보수(우파)는 양(陽) 또는 부성(父性)을 대변합니다.

 

사회연대를 강조하는 음(陰)과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양(陽)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 바람직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사회연대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으므로 이를 바로잡는 데 진보파가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보수파는 동시에 낡은 특권을 유지하려는 수구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의 부패와 시장의 불공정경쟁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세력이 보수수구파의 중심이었습니다. 특권관료, 재벌, 수구언론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수구적 보수파가 아닌 합리적 보수파가 보수파의 중심이 되어 합리적 진보파와 생산적 경쟁을 하는 게 바람직한 선진사회의 모습입니다. 본인의 이번 글은 보수파뿐만 아니라 진보파도 보다 합리화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살아오면서 겪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 진보파의 문제점을 따져보겠습니다. 자서전을 쓰려는 건 아니므로 본인이 진보파의 문제점을 깨닫게 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먼저 간단히 개인소개를 하겠습니다. 본인은 현재 서초구에 살고 있으므로 거주지를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강남좌파입니다. 하지만 중학교 무렵까지는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으므로(끼니를 굶은 건 아닙니다), 출신성분(?)으로 따지면 ‘강남’좌파는 아닙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본인을 좌파가 아니라 우파로 생각합니다. 좌파냐 우파냐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들 사회주의자보다는 오른쪽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한국사회의 전체 이념지형에서는 본인은 왼쪽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단칸방에서 살았지만 그렇게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고, 이른바 ‘범생’으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시절에도 대체로 범생이어서 이념써클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1974년 민청학련(이철, 유인태 등이 주도한 독재반대 전국시위사건)집회 때 괜히 한마디 했다가 경찰서에서 일주일을 보냈고, 그게 사회의식에 눈뜬 계기였습니다. 그래도 본격적인 이념 스터디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공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휴학하고, 사회가 어떤 건지 알고 싶어 재벌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대농’이라고 하는 지금은 사라진 방적회사입니다.

 

입사해서 몇 달 간 공장연수를 받았습니다. 청주에 큰 공장이 있었는데, 화이트컬러들의 식당과 블루컬러들의 식당이 나눠져 있었습니다. 오세훈 시장이나 수구언론들이 밥 먹는 걸 가지고 아이들을 차별하려 하는데, 70년대 공장에선 바로 그렇게 밥 먹는 걸 가지고 직원들을 차별했습니다. (74년 현대중공업 파업에서도 식당차별이 주요 이슈의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어떤 블루컬러 노동자가 이런 식당차별을 없애자는 요구를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공장장이 그 노동자를 ‘빨갱이’라고 하면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셈이지요. 다만 화이트컬러-블루컬러의 차별 대신에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이 등장했지만요.

 

그리고 당시 그 공장에선 블루컬러 노동자 사이에서도 묘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공장 현장에서도 방직기가 돌아가는 작업현장과 현장사무실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작업현장은 시끄러운 방직기 소리로 견디기 힘든 반면에, 서류정리를 하는 현장사무실은 훨씬 나은 형편이었습니다. 어떤 여공이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작업현장으로 옮기게 되자 너무도 가기 싫어했던 게 기억납니다. (혹시 상사의 성적(性的) 요구를 거부했던 게 원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萬國)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국 내에서도 노동자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화이트컬러-블루컬러,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노동자-중소기업노동자는 물론이고 본인이 근무했던 공장의 사례에서 보듯이 블루컬러 내에서도 분열이 존재합니다.

 

화이트컬러 내에서도 분열은 존재했습니다. 당시 대농은 은행관리 하의 회사라 근무가 느슨했습니다. 그래서 6시 땡 하면 직원들이 고스톱 판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스톱 판에서 K대를 나온 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3급직원과 4급직원이 같은 줄 알아”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상대 직원은 지방대 출신이고 하는 일도 약간 허드레 일이었지만, 둔감한 본인은 당시까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대 출신 직원은 아무 말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본인이 순발력과 용기가 있었더라면 “씨팔, 고스톱 판에 3급직원이 뭐고 4급직원이 뭐냐”고 판을 뒤집어엎어야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럴 땐 욕이 필요합니다.)

 

본인은 K대보다는 세간에서 높게 쳐주는 대학 출신이고 그 회사에서 출세할 생각도 없었으니 마땅히 일갈했어야 했는데 그냥 있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후회되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우리 진보파는 이런 노동자 사이의 차별이나 자본가 사이의 차별을 경시합니다. 그저 교과서대로 자본과 노동의 대립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도 조남호 회장과 노조의 대립에만 주목했습니다. 먼저 잘려나간 수천 명의 비정규직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다 이런 도식적인 사고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1년 반 회사생활을 보내고 대학원에 복귀했습니다. 대학원에선 학점을 따기 위해 주류 경제학도 공부해야 했지만 관심은 비주류 쪽이었습니다. 늦깎이 이념화였던 셈이지요. 그래서 맑스, 레닌, 모택동을 읽었습니다. 당시엔 마치 거기에 진리가 있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북한 자료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 와서 비로소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이 아니라 진짜 항일 빨치산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주사파(주체사상파)도 바로 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의해 ‘뿅’ 가버린 집단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엉터리 반공교육을 받다가 진실에 접하면서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교육에서 김일성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했더라면 주사파가 그렇게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박정희나 전두환 스스로가 군사독재를 펼치는 형편에서 그런 교육을 할 자신이 없었겠지요.

 

본인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에서 충격을 받았지만 북한 자료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북한의 역사학자가들이 쓴 논문에, 심할 때는 페이지마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라고 하면서 진한 고딕체로 김일성의 어록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신이 아닐진대 학자의 논문에까지 그의 어록을 실어야 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게다가 남한 사회에 관해 북한당국이 출간한 저서를 보니 더욱 황당했습니다. ‘매판지주’를 남한의 주요한 적대계급에 포함시키고 있었습니다. 한국농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봤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컨대 북한은 남한 사회의 변화 발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방’된 북한과 달리 남한은 일제 치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을 펴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북한당국은 남한에 대해 조금 진전된 이론이랍시고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라는 규정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점은 여전했습니다. 그리하여 본인은 주사파(이른바 NL national liberation파)와는 인연을 끊습니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를 진전시키고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는 민족적 자세는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체제를 바람직한 사회로 간주하는 극소수 주사파는 역사발전의 장애물인 수구파고 아울러 극우파의 존재기반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NL파와 거리가 멀었으므로 당연히 본인은 PD(people's democracy)파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하던 몇몇 선후배들과 함께 한국사회혁명을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볼셰비키 당사(黨史)나 스탈린 저술 따위를 읽었습니다. 그 때 읽은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주타방(주요 타격 방향)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반성의 대상입니다.

 

이는 혁명운동을 해 나감에 있어서 어디를 주로 공격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주타방을 수구보수세력보다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자유주의자들로 잡아야 한다는 사고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1차대전 이후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을 열심히 공격해 결국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습니다. 최근 미국의 랄프 네이더도 열심히 민주당 후보의 표를 잠식해 부시의 집권에 한몫 했습니다.

 

한국의 극좌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똑같다고 하면서 열심히 민주당을 공격합니다. 그런 공격의 이론적 바탕이 바로 잘못된 소련체제의 형성과정과 관련해 나온 주타방론인 셈입니다.

 

이런 이론에 입각한 극좌파는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단일화를 결단코 거부합니다. 본인은 단일화를 주장하는 글을 계속 써 왔었고 그 때문에 욕을 좀 먹었습니다. (이에 관해선 http://blog.daum.net/kkkwkim/90 을 참조하십시오.)

 

어쨌든 맑스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중에 소련·동구 체제가 붕괴했습니다. 소련·동구의 현실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아예 붕괴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NL파만큼은 아니지만 PD파 역시 현실의 변화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민주적 사회주의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던 본인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다행히 본인의 박사학위 논문은 맑스 이론과 무관한 실증연구였으므로 학자적 기반이 붕괴된 건 아니었지만,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참에 일본 동경대학에 1년간 체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동경대학은 맑스주의자들의 소굴이었으므로 그들이 소련·동구 체제의 붕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가봤더니 신통한 건 없었습니다. 일본의 맑스 학계는 이미 한물 간 상태였습니다. 맑스 경제학회는 양로원 비슷했습니다. 사회주의를 계속 신봉하는 학자들 중에도 사회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경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젊은 학자들은 맑스이론보다 산업연구 등 실증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다만 일본 학자들의 연구자세는 배울 게 많았습니다. 일본 말의 열심히(一生懸命)는 ‘목숨을 걸고’라는 뜻입니다. 본인을 받아준 동경대 교수는 본인이 체재했던 1년 동안 4번이나 쓰러졌는데도 정말로 목숨 걸고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또 일본 교수들은 지적 겸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과장하자면 한국 지식인들은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고” 일본 지식인들은 “열을 알면 하나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라도 틀린 이야기를 하면 지식인으로서의 생명이 끊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은 워낙 급변하는 사회라서 다른 사람이 이전에 틀린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수파든 진보파든 함부로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장하준 교수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본인이 그를 비판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본인도 일본에서 귀국할 땐 “하나를 알면 하나만 말한다”는 방침을 세우긴 했는데 한국 분위기에서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용엔 우파어용만 있는 게 아니라 좌파어용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두고두고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정권이나 자본에 대한 어용만 있는 게 아니라 노조(및 좌파정당)에 대한 어용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을 해준 사람은 우파학자가 아니라 좌파학자였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대우자동차 사태를 둘러싸고 본인이 어떤 노동경제학자에게 노조의 방침이 옳은가 의견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옳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런 취지의 글을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랬다간 노조에 밉보여 연구에 지장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우파권력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좌파권력이지만 그래도 거기에도 싫은 소리를 못하게 되는 게 좌파어용인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본인이 대우차 사태건 한진중공업 사태건 자꾸만 악역을 맡게 된 셈입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 본인은 노조의 협조를 받아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는 일 따위를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재벌체제를 비판하니 기업의 협조를 받을 길 없고, 노조를 비판하니 노조의 협조를 받을 길이 없어진 셈입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한편, 이야기를 다시 돌리자면, 일본에서 돌아와선 한국 자본주의를 연구할 생각으로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공장의 노조들을 방문했습니다. 삼성의 해고자들도 인터뷰했고, 조선소 배 밑바닥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일본학자들과 공동으로 자동차공장들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모그룹의 사사(社史) 편찬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선 재벌 연구를 하려면 먼저 그 그룹에 입사해서 몇 년간 지낸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사사 팀에 참여하게 된 것은 나름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래서 약 1년간 그룹의 고위층을 비롯해 중간간부, 노조를 인터뷰하고 전국 각지의 공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비서실 사람들과도 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1년 반쯤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만, 이 사사 편찬팀에서의 조사는 기업이 무엇인지 감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진보파는 원래 자본주의를 쳐부순다는 목적을 갖고 출발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업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또 관심이 있다손 치더라도 기업 내부를 들여다 볼 기회가 좀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한국 진보파의 큰 약점입니다.

 

대우차, 쌍용차, 한진중공업 사태 등등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게 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약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업을 직접 들여다보지는 못하더라도 기업에 근무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데 그런 일도 잘 하지 않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아예 포기해버렸다고나 할까요.

 

이런 속에서 1997년 IMF사태가 발발했습니다. 본인은 아직 기업에 대한 공부가 충분치 않은 처지였으나 불가피하게 재벌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알면 하나를 말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역시 많은 사회계층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관료나 외국인투자자도 만나게 되었고 컨설팅업체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구조조정 중의 노조원들도 만났습니다.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살아있는 현실과 접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한국의 진보파와 충돌을 빚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어찌 보면 시장의 논리를 알게 된 것이고, 본인과 충돌한 진보파쪽에서 볼 때는 시장의 논리에 투항했다고 하겠지요.

 

글이 또 길어졌습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한국 진보파와 충돌하게 되는 사례들은 다음 글에서 다룰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