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고유의 글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1)

동숭동지킴이 2011. 8. 6. 15:21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1)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며칠 전 창비주간논평에 쓴 글(‘한진중공업 사태의 올바른 해결은’)이 파문을 조금 일으켰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서 지지도 받고 욕도 얻어먹었습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로서,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던 셈입니다.

 

영어로 “Bad publicity is better than no public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이나 발언이 아예 무시당해 버리면 아무 보람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적어도 반응을 보인 분들 중에선 지지자가 더 많았습니다. 물론 진리가 다수결은 아니지만.

 

오늘은 그런 파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문재인 변호사의 <운명> 시리즈 3탄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은 좀 기다려 주십시오. 한진중공업 관련 이야기는 지금 아니면 따로 하기 힘드니까요. 또 블로그 글쓰기는 제 취미생활이지 주업이 아니라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1) 먼저 소생의 글에 대한 언론의 반응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창비 글에 앞서 이미 6월 19일에 제 블로그에 ‘한진중공업 사태와 공평한 고통분담’이란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문화일보 기자가 7월 22일에 전화로 의견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는 자꾸 희망버스에 올라탄 정치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유도해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정치란 민생을 살피는 일인데, 정치인이 갈등의 현장을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정치투쟁에만 전념하지는 말고 경영진, 노조, 정부, 시민대책위가 논의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원래 문화일보의 논조라는 게 있는지라, 거듭 “본인 뜻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다짐했고, 기자 이름을 정확히 확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고도 그날 오후 신문이 나올 때까지는 불안했습니다.

 

다행히 기사는 정치인의 희망버스 참여를 비난하는 걸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에선 기자와 전화 인터뷰하는 일도 이렇게 힘듭니다.

 

다음으로, 8월 4일자 조선일보에서는 저의 창비 글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저에겐 아무 연락도 없었고, 제 사진도 제 홈페이지에서 그냥 가져다 썼습니다. 창비 글이 공개 글이니까 이렇게 한 것 자체에 대해 뭐라 하기는 그렇겠지요.

(기사 링크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04/2011080400052.html 입니다.)

 

문제는 본인 글을 일정하게 왜곡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글 첫머리에서 분명히 희망버스에 대해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는 증거’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건 싹 빼먹고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나 그들의 관점을 바로잡은 것만을 들어서, 마치 본인이 일방적으로 희망버스를 비판한 걸로 편집을 했습니다.

 

게다가 제 글에선 야당 정치인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제가 야당을 비판한 걸로 왜곡했습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해 단식 중인 노회찬·심상정 씨를 야당지도자들이 방문한 사진 옆에 그 기사를 배치했습니다.

 

뛰어난 ‘조선일보 식 왜곡기술’입니다. 희망버스 운동은 야당이 아니라 송경동 시인 등이 주도한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문화일보 기자에게 말했듯이 정치인의 그런 현장 방문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묘하게 색깔론까지 걸어서 야당을 비난했습니다.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사회주의라는 제 글의 내용을 야당을 언급한 부분에 같이 연결시킴으로써 야당이 마치 빨갱이 주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게 만든 것이지요.

 

또 제 글에 분명히 정리해고나 비정규직은 모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없을 수 없지만 무분별하게 하지 않고, 고통분담도 공평해야 하고, 부당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규모가 적절했는지 논의해야 하고, 조남호 회장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기사만 보면 한국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무조건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인이 주장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조선일보 보도가 나온 후 어느 분이 흥분해서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찌 교수가 되어 가지고 이 비참한 비정규직 문제를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뭘 보고 말씀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조선일보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창비주간논평에 실은 원래 글을 읽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글의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다행히 금방 납득해 주었습니다.

 

또 제 아는 분이 자기 (보수 수구적인) 이웃으로부터 제가 돌아셨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졸지에 제가 김문수지사나 뉴라이트 같은 꼴이 된 셈입니다.

 

이렇게 조선일보에게 당하는 것이지요. 저야 일개 교수이니 당해도 별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의 평가가 선거 당락을 좌우하는 정치인들에겐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보수신문들의 위력은 막강합니다.

 

물론 저도 글을 쓸 때 조선일보가 왜곡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했습니다. 하지만 지면 사정도 있었고, 논리가 왜곡되지 않도록 제가 할 말은 해 놓았습니다.

 

문화일보의 예를 생각해 야당에 대해서도 언급했더라면 좀 나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마 조선일보는 왜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조선일보를 배려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작은 오류입니다만 저는 예전에 참여연대의 재벌개혁 운동을 도왔고 여전히 재벌개혁에 관심을 갖고는 있습니다만, 지금은 조선일보 기사에 언급된 참여연대 재벌개혁 감시단 실행위원은 아닙니다.

 

조선일보가 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도 발생한 것이지요. 그런데 조선일보는 저에게 전화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제 글을 조선일보가 다루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여러 차례 조선일보에서 저에게 글을 청탁했을 때 제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안티조선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한 적은 없지만, 보수수구 신문의 우두머리인 조선일보에 글을 쓰거나 인터뷰하는 건 찝찝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한국 신문기자 중에선 열심인 편인 것 같습니다. 제가 <경제학 포털>이란 책을 출간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자주 기고했던 진보신문사의 기자는 무성의하게 서평을 쓴 데 반해, 조선일보 기자의 서평은 제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일보가 이런 실력을 자주 나쁜 데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진보개혁세력 공격이나 복지 문제를 다룰 때 그런 게 드러납니다. 분단 문제에선 가스통을 든 수구꼴통들의 천박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조선일보가 재벌문제나 양극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자체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게 기회주의적이고 정략적이란 의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IMF사태 직후에도 재벌개혁에 열심인 척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종편TV에서 보다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미지를 잠시 위장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바뀌려는지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말입니다. 물론 조선일보가 수구보수에서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회도 나아지고 저도 집필 청탁을 거부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ㅎㅎㅎ. ( 진보신문엔 글을 써도 거의 연락이 없는데, 조선일보 기사가 나가자 너댓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ㅎㅎㅎ)

 

하지만 아마도 남북한 사이에 대화와 화해가 뿌리내리기 전까지는 조선일보의 변신은 힘들 겁니다. 조선일보의 수구노선은 남북한의 적대관계가 큰 원천이니까요. 그게 백낙청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분단 모순의 한 형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조선일보의 왜곡보도에 따른 피해는 그 다음날 한겨레신문의 기획을 통해 좀 바로잡아 졌습니다. 제 진의를 보도해 줬으니까요. 진보파의 이병천 교수는 그런 한겨레 기획이 못마땅하다는 식으로 자기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희망버스 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이교수에겐 저의 글이 불편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참 어렵습니다.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490493.html 입니다.)

(이병천 교수의 관련 트위터는 http://twitter.com/#!/leepolis/status/99467486587654144 입니다.)

 

그리고 창비주간논평의 제 글은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그 동안 한진중공업 사태를 다룬 프레시안의 논조와는 잘 맞지 않는데도 실어준 셈입니다. 물론 제 글을 약간 암묵적으로 비판한 글도 그 후에 싣기는 했지만, 바람직한 언론의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은 다소 당황한 모양입니다. 얼굴이 약간 화끈거렸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주식 배당 174억원 같은 문제는 조선일보도 잘못 보도했고 국무총리도 역시 잘못 말했으므로, 너무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아예 제 글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혹시 제 글을 1991년 강경대 학생을 경찰이 구타 치사한 사건 때 김지하씨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반동적인 부류의 글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글이 모든 언론이 다루어야 할 만큼 훌륭한 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동안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해서 줄기차게 보도한 언론들인 만큼, 제 글에 대해 한번은 짚어줘야 독자들의 올바른 판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이어서 제 글에서 지면사정 상 충분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약간 부연설명 드리고,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말해볼까 합니다.

 

먼저 주식 배당금 174억원이 실질적으로 주주들에게 아무 혜택도 없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문용어를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사용하면서 부연설명 드리겠습니다.

 

회사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좌변은 자산 항목이고 우변은 자본총계와 부채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자본총계는 자본금, 자본잉여금, 이익잉여금으로 나누어집니다.

 

주식배당은 이익잉여금 항목의 금액을 자본금 항목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한진중공업은 작년에 적자였지만, 과거의 이익 등을 쌓아놓은 이익잉여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전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이익잉여금을 옮길 때는 주식의 액면가로 계산해서 처리합니다. 그러니까 시가가 3만6천원이었다 하더라도 5천원으로 치고 거기다 주식배당을 위한 신규발행주식량(기존 주식물량 전체의 대략 1%)을 곱합니다.

 

그리하여 그 금액만큼 이익잉여금 항목에서 자본금 항목으로 옮깁니다. 그게 회사측이 말하는 23억원입니다. 하지만 그 23억원도 회사에서 주주쪽으로 빠져 나온 돈이 아닙니다. 회사에선 아무것도 빠져 나온 것은 없습니다.

 

(신규로 주식을 발행하는 데 약간 비용이 들고, 소규모의 자사주에는 주식배당이 없었으므로 그만큼 회사에는 손해입니다만, 그건 무시할 수 있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회사에서 주주 쪽으로 빠져 나온 게 없는 데 주주가 혜택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회사에서 빠져 나온 게 없는 데 주주가 혜택을 본다면 그건 요술 방망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재주를 부릴 수 있다면, 회사 자산에는 아무 변화 없이, 주식배당을 1%가 아니라 100%로 해서 주주들의 재산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다는 말이지요. 허경영씨보다 더 허무맹랑하다고나 할까요.

 

실제로, 주식배당을 하면 배당락(配當落)이라고 해서 주식물량이 늘어난 만큼 주가를 하향조정합니다. 1%가 배당되었으면 1% 하락시킨 가격에서 주식 거래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만 증권거래소에서 그렇게 시작한 주가는 시황에 따라 올라갈 수도 있고 더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글에서 ‘원칙적으로’라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실익도 없는 주주배당을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일종의 조삼모사(朝三暮四)입니다. 특히 이전에 현금배당을 해온 판이라 아무 것도 안 주기가 미안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배당에 의해 유통물량이 늘어나서 거래를 활성화시킬 수는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정리해고가 무분별하고 그에 따른 고통분담이 불공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정규직도 남발되어서는 안 되고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회적으로 복지가 강화되어야 하고, 개별 기업이 정리해고를 할 때는 노사 간에 충분한 협의가 이뤄져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사회복지가 미비해 있고, 한진중공업에선 노사협의도 불충분했습니다. 그게 문제인 것이지요.

 

한편, 제 글에서 수주물량이 ‘계속해서’ 늘어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고용을 늘린다고 썼습니다. GM 대우에서도 그렇게 해서 정리해고자들이 대부분 복직되었습니다. 쌍용차에서 해고자들이 복직되지 않은 것은 경영이 아직 충분히 정상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건 일반론입니다. 수주물량이나 생산물량이 늘어나더라도 언제 어느만큼 복직시키는 게 합당할지는 노조나 경영진 모두 정확한 답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서로 협의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고용을 늘리더라도 정규직을 먼저 늘릴 것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사내 하청)을 늘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게 노동자 사이의 고통분담 문제입니다. 물론 회사측은 가급적 비정규직을 늘리고 싶겠지요.

 

이와 관련해 노조측은 정규직을 먼저 늘리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그렇게 되어 있고. 실제 GM대우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한진중공업에서도 그에 관한 협의를 하자고 했는데, 노조측이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협의 자체가 정리해고를 정당화시킨다는 논리입니다.

 

제 글에서도 썼듯이 노조는 정리해고를 무조건 부정할 게 아니라 정리해고 규모가 적절한지 따지고, 아울러 복직조건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해 두는 게 좋습니다.

 

8월 5일 한겨레 기획에서 저의 반대편 입장에 선(꼭 정반대는 아닙니다만) 강신준 교수는 “정규직을 해고시킨 뒤 조금 회복되면 정규직 자리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규직 일자리가 보호되지 못하면 후세대인 청년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정확한 서술이 아닙니다. 정년퇴직 등으로 비게 된 정규직 자리에 비정규직을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량의 정리해고로 빈 자리에 비정규직을 쓰기는 곤란합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걸 방치했다면 노조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노조가 따질 수 있으니까요. 노조가 정리해고 무조건 반대 투쟁하느라 그걸 소홀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내하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조가 따지려고 들면 따지지 못할 사안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 조선사업장에서는 비정규직의 비율이 대단히 높습니다. 80%에 달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정규직들은 정규직이 해고되고 난 자리에 들어온 게 아니라, 회사가 성장하면서 고용규모를 늘릴 때 비정규직을 주로 늘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교수 주장과는 달리 정규직 고용이 과도하게 경직적이면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기업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보수파뿐만이 아니라 진보파들도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잘 할 줄 모릅니다. 자본의 논리에 맹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패턴을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경기불황에 따라 고용을 조정해야 할 때 현대차, GM대우, 쌍용차, 한진중공업에서처럼 노동자들의 결사적인 투쟁에 직면하면 다시는 정규직을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확대에는 싼 인건비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고용경직성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조선소에서는 노동자 대부분을 해고가 용이한 비정규직(사내 하청)으로 채웠습니다. 거기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비슷하게 싼 임금일 텐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기아차의 계열사인 동희오토에서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입니다. 기아차에서 정리해고된 자리에 비정규직을 채운 게 아니라 아예 출발부터 그렇게 해버렸습니다.

 

그 다음으로 글에 대한 반향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 분들이 성원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선 제가 용기 있다고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옛날에 시국사건으로 피해 다니던 친구를 집에 재울 땐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그냥 담아두지 못하는 체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의사는 소양체질이라고 했고 다른 한의사는 태양에 가까운 특수 소양체질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체질들이 대체로 저 같은 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욕도 꽤 먹었습니다. 주로 소위 진보파들로부터입니다. 특히 희망버스에 열심히 동참하신 분들은 자신의 운동이 부정당하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희망버스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 들으면 불편합니다. 


어차피 욕먹을 각오 하고 쓴 글이고 또 욕먹는 데 어느 정도 단련은 되어 있습니다. 재벌개혁 부르짖는 과정에서 수구보수파들로부터 몹시 욕먹었습니다. 아주 가까웠던 재벌 고위층 친구는 저와 사실상 의절한 상태입니다.

 

또 그동안 이따금 진보파들로부터도 욕먹었습니다. 그렇게 고달프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이골이 났으므로 괜찮습니다. 또 사람 일을 알 수 없긴 하지만, 제가 교수직 말고 다른 일 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욕먹는 게 인생에 별 지장 없습니다. (다른 일은 체질에 맞지도 않지만 교수직처럼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잘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fact나 논리에 입각해서 저를 비판한(상대할 가치 있게) 경우는 드뭅니다. 주로 말은 맞는지 모르겠는데(반박논리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지요), 차갑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런 지적엔 대응하기 곤란합니다. 막연한 비판이니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저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수도(修道)하는 삶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물론 업(業)이 많아서인지 수도가 잘 진척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수도하는 삶에선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에서 자유로운, 마음의 평정상태를 추구하니까요.

 

하지만 실제 저는 다혈질이고 눈물이 많습니다. 노통이 세상 떠났을 땐 몇 시간 울었습니다. 슬픈 영화 보면 남자이고 나이도 많은데도 잘 웁니다. 잘 우는 것과 차가운 것이 양립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두뇌’입니다. 이는 만사에 다 해당되는 논리이니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이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뜨거운 가슴의 진보파는 조절이 잘 안됩니다.

 

제가 고교 때 공부하던 영어 참고서 <정통종합영어>에 지금도 기억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The good life is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라는 문장입니다.

 

러셀(Bertrand Russell)이 한 말입니다. 그는 ‘knowledge without love’의 사례로 세계대전을 들었고, ‘love without knowledge’의 사례로서 유럽에서 페스트가 휩쓸었을 때 교회에 모여 기도한 일을 들었습니다(병이 더 잘 퍼졌겠지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왜 제가 한진중공업 사태에서처럼 진보파의 통념과 부딪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제 살아온 경력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진보파의 문제점이 무엇이지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과 관련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

(추가) 8월 7일

 

제 글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간 날에 EBS 강사가 소위 빨갱이 교육 같은 걸 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보도 중에 얼마큼이 사실이고 얼마큼이 왜곡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원래 방송을 통해 강의를 하는 본인이 볼 때 좀 황당한 보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방송은 PD가 있고, 심의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같은 날 본인과 더불어 다른 분도 피해를 본 셈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 오마이 뉴스  기사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07217&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그리고 원래 조선일보 보도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04/2011080400150.html

 

 

---------------------------------------------

(추가)  8월 9일

 

오늘(8월 9일)  경향신문에서도 한진중공업 사태에 관한 본인의 주장을 이병천 교수의 주장과 대비시키면서 소개했습니다.

다음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81843115&code=960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