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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변호사의 <운명>과 노무현정권의 정치력 문제 (1)

동숭동지킴이 2011. 7. 14. 19:05

 

문재인 변호사의 <운명>과 노무현정권의 정치력 문제 (1)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문재인 변호사(이하 문변)의 자서전 <운명>을 읽었습니다. 문변이 운동권 학생, 그리고 인권변호사로서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책의 한 부분입니다. 문변 가족 이야기도 조금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또 한 부분은 문변이 노무현대통령(이하 노통)과 변호사 활동, 청와대 운영을 어떻게 같이 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퇴임 이후 노통이 MB정권에 의해 죽음으로 몰리는 과정도 물론 기술하고 있습니다.

 

문변은 본인의 고교 선배이기도 해서 그의 개인적인 삶에 관해선 원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수부대 훈련 중 전두환 여단장에게서 최우수표창을 받은 일화처럼“야, 이런 면도 있었구나”하는 대목들도 꽤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변 책의 중심은 이런 문변 개인 스토리라기보다 역시 노통과의 관계입니다. 앞날이 창창한 문변이“왕년에 어쨌는데”하는 노인네 흉내 내려고 책을 쓴 건 아니지요.

 

세상 떠난 노통을 되돌아보고 노무현정권 시대를 복기함으로써, 노통을 극복하는(6쪽)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커다란 쟁점이었던 정책들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를 고백한 부분(3장)에서 특히 그런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노통이나 노통 시대를 다룬 책들은 이미 여러 권 나왔습니다. 대표적으론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이진, 2005), <있는 그대로, 대한민국>(대통령 비서실, 2007), <불멸의 희망>(이백만, 2009),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2010), <운명이다>(유시민, 2010), <진보와 권력>(한국미래발전연구원, 2011) 등이 있습니다.

 

문변의 책은 여기다 그저 한권 추가하는 의미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권양숙 여사 이외엔 노통과 가장 가까웠던 문변의 기록인지라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노통 관련 책들 중 제일 많이 팔렸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계기로 삼아, 그리고 다른 책도 참고하면서, 본인도 노통시대를 한번 돌이켜볼까 합니다.

 

물론 지면의 제약도 있고 해서 문변 책은 노통시대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10권쯤의 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그렇더라도 노통시대에 큰 논란을 빚었던 사안들은 대체로 다루고 있으므로 짚어볼 소재는 제공합니다.

 

노통정권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선 이미 그 정권이 끝날 무렵에 본인 나름으로 정리를 한 바 있습니다. (<황해문화> 2008년 봄호. 관심 있는 분은 본인의 학교 홈페이지 http://faculty.knou.ac.kr/~kwkim/papers/frame.htm 를 클릭해서‘노무현정권 경제정책의 평가와 반성’을 보십시오.)

 

그래서 이 연재물에선 노통 시대의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 논해 보고자 합니다. 본인은 정치학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김대중대통령(이하 DJ)시대 특히 노통 시대를 지내면서 정치문제의 중요성에 약간 눈이 떴습니다. 진보개혁정권이 왜 이렇게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를 곰곰이 따져본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래봤자 정치 고수 앞에 가면 여전히 형편 없는 아마츄어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다만 과문한 탓이겠지만, 우리나라 정치학자들이 노무현정권에 관해 쓴 글 중 "야 이거다" 싶은 걸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문변 책 등에서 드러난 정책결정 과정상의 고민을 전제로 한 분석은 아직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제 제기 차원에서 이런 글을 써 보는 것입니다.

 

노통시대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자 부분은 주로 노통정권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한나라당쪽과 수구언론에선 노통을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류의 과장된 비판을 하자면 노통은정포대(정치를 포기한 대통령)라 불러야 합니다.

 

정치를 포기했다는 말은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데서 정치적 고려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자기편을 축소 약화시키고 반대편을 확대 강화시켰습니다. 뺄셈의 정치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권이 힘을 쓸 수가 없어 자신이 바라는 경제정책이든 뭐든 제대로 관철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역으로 지지기반을 더욱 축소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번 글에서 상세히 분석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런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되는 노통의 개인적 특성을 살펴볼까 합니다.

 

본인은 노통 정권에선 위원회 위원 자리도 하나 맡은 바 없습니다. 제의를 받았더라도 사양했겠지만, DJ정권 하에서 있었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제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노통을 잘 안다고 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몇 차례 만난 적은 있고, 또 노통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통해 노통 이야기는 좀 접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 나름으로 노통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도 약간 해봤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본인도 1988년 청문회의 노통을 보고 반해버렸습니다.“아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뒤 부산에서 연거푸 떨어질 때마다 그는 계속 감동을 주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정치인!”이게 노통이었습니다. DJ의 경륜을 존경하긴 했습니다만, 그는 노통만큼 감동을 준 바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노통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찡할 때가 있습니다.

 

닳고 닳은 기존 정치인과는 너무 달랐던 것이지요. 보수수구파가 대중의 탐욕을 조종하는 데 반해, 진보개혁파는 대중의 감동을 사야 합니다. 노통은 집권 시기를 제외하곤 바로 그런 감동의 정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단아(異端兒)적 특성은 노통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습니다. 이 단점 문제에 대해선 차차 이야기할 텐데, 어쨌든 DJ와 노통의 장점만을 갖춘 정치인이 나올 수는 없을까요.

 

그러면 노통과 직접 만났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통과는 세 차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첫째 만남은 90년대 초 상갓집에서였는데 호상(好喪)이 아니라 흉상(凶喪)이었던 탓에 자리를 같이 하긴 했지만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은 2001년 봄 노통이 대선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노통은 대선출마를 염두에 두고 본격적인 정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노통 쪽에서 다리를 놓아 본인이 그에게 재벌 문제에 대해 특강을 한 셈입니다.

 

1시간 남짓 본인이 말했더니 그가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본인이 재벌개혁이란 게‘재벌 죽이기’나‘재벌 혼내주기’가 아니라,‘재벌 거듭나게 하기’ 즉 재벌이 선진적인 대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통은 그 자리에서 본인 보고 자기 캠프에 들어와 달라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당신을 좋아하지만 시민단체 일을 도와주고 있는 처지라 곤란하다”고 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알았다면서 강준만 교수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란 책을 건네주었습니다. 발표 사례(謝禮)이기도 한 셈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책으로 사례를 하면서“사례금을 드릴 형편이 못되어서 죄송합니다만”이라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습니다.

 

분위기 탓에 그런 말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례금을 준다고 해도 받을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노통의 말투도 좀 딱딱했던 탓도 있어선지 그에게 여유나 따뜻함이 부족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가진 정의파이긴 했으나, 그러다 보니 적개심이 너무 강해져서 마음의 여유나 따뜻함을 갖기 힘들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단아의 단점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중에 집권해서 보수수구 언론의 중상모략에 대해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라든가, 노동자가 죽었을 때 따뜻한 발언을 던지지 못한 것을 보면 본인의 판단이 영 엉터리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뜨거운 분노와 따뜻한 여유를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거의 도사의 경지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포기할 게 아니라 큰 지도자가 될 사람은 둘 다 갖추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걸 보완할 수 있도록 주위 참모들을 배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노통의 참모들은 노통의 보완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 힘듭니다.(뒤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겠습니다.)

 

세 번째 만남은 2002년 대선후보 민주당 당내경선 때였습니다. 당시 본인은 한겨레신문의 대선보도 자문단의 일원으로 민주당 후보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때 노통이 특히 헤매었던 사안이 북한 문제와 관료들과 어떻게 상대할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른 민주당 후보들에 비해 노통은 비교적 답변을 잘한 편이긴 합니다. 한겨레 인터뷰 이후 민주당이나 국민들 여론이 나아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문제 등에 대한 답변 실력도 그 이후의 언론 인터뷰에선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집권 이후 노통 정권이 기대에 못 미친 걸 보면 역시‘준비 부족’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노통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개혁 진영 전체의 문제입니다.

 

진보개혁진영 교수·연구자들을 통해 노통이 공부를 했을 텐데, 집권 이후 정작 커다란 문제가 터지자 그런 공부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북핵 위기든 노조파업이든 신용불량자 문제든 비상사태를 헤쳐 나갈 매뉴얼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회창 후보 진영에선 당선 후의 국정 운영 프로그램을 연도별, 분기별, 월별, 나아가 주별, 일별로까지 마련해 두었다고 합니다(<운명>, 459쪽). 노통정권과 진보개혁진영은 그런 것 없었습니다.

 

노통도 그랬고 진보개혁인사들도 큰 그림, 이른바 로드맵 그리는 건 좋아했으나 실전능력은 키워나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가를 논할 줄만 알았지 그걸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해선 소홀히 한 셈입니다.

 

정치력이란 어떻게 관철시키는가의 문제입니다. 노통정권은 바로 이 부분이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과장하자면 정포대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점차 진보개혁 인사들의 발언권은 약화되고 관료들의 입김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DJ 때도 마찬가지였고, 노통 때는 그래도 진보개혁인사들이 비교적 오래 살아남은 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본인이 노통과 직접 만난 것은 세 번째가 끝이었습니다. 집권 기간 중엔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2004년 본인이 한겨레에 “민주노동당에 바란다”는 칼럼을 썼더니 노통이 직접 e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본인에게만이 아니라 노통은 이렇게 칼럼을 쓴 사람들에게 가끔 e메일을 직접 보내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대통령이 직접 e메일을 보내는 것은 보수수구 신문들에 의해 고립된 마음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는데, 어쨌든 소탈한 노통의 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노통은 e 메일에서 잘 읽었다는 말과 함께 약간 뜬금없이 중선거구제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래야 민주노동당도 의석을 늘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현가능성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노통은 정당의 지역구도로 쓴 맛을 톡톡히 본 정치인입니다. 따라서 지역구도를 타파해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3당 야합으로 설 자리를 잃은 경상도 민주진영 전체에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노통은 지역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본인에 대한 e 메일에서까지 그 문제를 들고 나왔고 (ㅎㅎㅎ), 결국에는 대연정 제안이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이게 되는 것이지요.

 

민주투사 노무현에겐 민주화에 대한 집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슨 문제든 집착이 지나치면 그르칩니다. 노통 자신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참모가 그걸 견제해 줘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노통이 지역구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우선 나라 통치를 잘 해서 경상도 사람들도 자신을 지지하게 만드는 게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야 선거구든 뭐든 고칠 수 있으니까요. 정치적 지지를 잃으면서 정책적 대안을 내어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편에선 정략적 대안으로 몰아붙이게 되지요.

 

본인과 노통의 관계 이야기는 이쯤 하겠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통해 노통의 특성을 검토해 보지요.

 

유시민 대표에 따르면 노통은“부끄러움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운명이다> 16쪽). 이런 말은 몇몇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들은 바 있습니다. 본인이 신정아 씨 관련 글에서 언급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치사한 MB 등 한국의 저명인사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수줍다는 것은 기(氣)가 약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통은 기가 대단히 센 편이었습니다. 불굴의 투사였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가 세니 결정적 순간에서 주위 참모들의 조언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노통은 이단아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주위 조언을 거슬러 성공한 경우였습니다. 조선일보와 싸우고 부산에서 떨어지고 한 일들을 누가 권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노통은 정치적 판단력에서 과도한 자신감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집권 이후엔 부정적으로 작동합니다. 선거와 통치에 다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권 이후엔 노통의 센 기를 감당할 수 있고, 또 정치적 판단에서 노통도 귀를 귀울일 만한 고수가 참모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습니다. 문변도 청와대 참모진의 정무기능이 취약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운명> 341쪽).

 

어쨌든 노통은 기는 강했으나 낯을 가리는 편이었습니다. 정치가 체질인 정치인들은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즐깁니다. 싫어하든 좋아하든 간에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에너지를 흡수한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노통은 자기가 불편한 사람들과는 자리를 같이하는 걸 견디기 힘들어 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 되기 전 일인데, 기자들이 노통과 식사를 하고 2차로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기자들이 보니 노통이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혹시 노통에게 뭔가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는가 해서 다음날 전화했더니, 그 자리가 취미에 맞지 않아 집에 가서 책 읽었다고 하더랍니다.

 

기자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별로 좋은 느낌을 받았을 것 같지 않습니다. 무시당한 것 같지 않았을까요. 노통에겐 그렇게 어울리는 시간이 아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학자입니다.

 

이정우 교수는 노통을 좋은 의미로 호학(好學)군주로 표현했습니다(<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하지만 본인은 그게 정치가의 자질로서 꼭 좋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집권하기 전까지 가급적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좋지만, 집권해서까지 사람 만나는 것보다 책을 좋아할 정도라면 정치가가 아니라 학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DJ도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건 주로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나 해외에 유배당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노통은 좀 지나치게 낯을 가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민주화 투사로서는 이것도 괜찮습니다. 보수수구 세력과 만날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그러나 집권해서 자기편을 확대 강화하고 반대편을 축소 약화시키려면 온갖 잡놈(?)을 다 만나야 하고 끌어당길 때는 당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노통 체질에 맞질 않았습니다.


세속정치에 깊이 들어갈수록 노통 자신도 점점 이질감을 많이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직을 내던지기도 했고, 농이 섞이긴 했지만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도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말하자면 출세욕도 있었겠지만 체질에 맞아서라기보다 정의감 또는 의무감에서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다고 보여집니다.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기 2달 쯤 전 그는 "정치하지 마라"는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정치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좋아서 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성공할 수 있다. 그래도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다"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해서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은 거짓말, 정치자금, 사생활 검증, 이전투구, 고독과 가난의 수렁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치가 체질에 맞는 사람에겐 정치가 힘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즐겁습니다. 그런데 노통은 정치를 즐기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주요 원인은 한국의 정치문화가 낙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치문화를 바로잡아 노통 같은 인물이 즐겁게 정치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을 주어진 조건으로 생각한다면, 노통은 그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타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운동가를 계속 했다면 그건 잘 했을 것 같습니다.


단순화하자면, 수줍은 정의파가 불의에 대한 분노에서 보수수구세력과 피 끓는 투쟁을 벌였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하지만 수줍음이라는 노통의 특성은 집권 이후엔 부정적 요소로도 작동했습니다.

 

특히 진보개혁진영 전체의 실력이 부족한 상황에선 노통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주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노통, 그리고 노통 시대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노통은 정치적으로 단점만 있는 걸로 생각되기 싶습니다. 그건 결코 아닙니다. 노통은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 중에서 감동을 안겨준 드문 사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것이지요.

 

노통 정권의 업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자만 있는 게 아니라 빛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복기에선 주로 잘못된 수(手)를 가지고 논합니다. 그래서 여기선 노통의 문제점을 다루었을 뿐입니다.

 

다음 글에선 노통정권의 정치력에서 뭐가 문제였는지를 구체적 정책을 가지고 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마도 노통에 대해 본인보다 훨씬 더 잘 아는 분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혹시 본인 글을 보시고 바로잡을 내용이나 보완할 내용이 있으면 댓글이든 메일(kwkim@knou.ac.kr)로든 연락 주십시오. 노통 시대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므로 같이 의논하면 좋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