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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변호사의 <운명>과 노무현정권의 정치력 문제 (3)

동숭동지킴이 2011. 10. 5. 11:12

 

문재인 변호사의 <운명>과 노무현정권의 정치력 문제 (3)

 

김 기 원

 

오늘은 노무현정권의 정치력 문제를 구체적 정책과 관련해서 다루었던 지난 글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비상사태(?)가 발발해 연재가 한동안 중단되어서 죄송합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정책은 문재인 변호사도 과오를 인정한 대연정 제안과 기자실 개편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선 문변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정책들을 평가해보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선 정책 집행 당시에도 논란이 들끓었고, 지금도 여러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정책적 의사결정 과정의 비밀스런(?) 부분을 알지 못하는 본인이 헛짚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다만 문변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정책결정과 관련된 사정을 어느 정도 털어놓은 지금 상황은 정책 시행 당시보다는 많은 정보가 우리에게 주어진 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정보가 주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므로 일단 용감하게 시비를 걸어보겠습니다.

 

물론 본인과 다른 생각을 가진 분도 많을 것이고, 본인이 모르는 중요한 정보를 알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댓글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긴 댓글일수록 환영입니다.)

 

바둑의 복기는 원래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이지요. 정책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명> 시리즈가 그런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본인도 본인 주장을 고집할 생각은 없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댓글에 반박하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같이 토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글의 핵심은 노통이 집권 이전(선거시기)과 집권 이후(통치시기)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점에 대한 인식부족이란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이라고 했습니다.

 

노통은 선거시기엔 국민의 감동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통치시기엔 그런 일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단순화하자면, 통치시기에 와선 감동을 끌어내는 정치가 아니라 실리를 따지는 행정에 매몰되어버렸습니다. 선거 때의 노무현 정신이 실종된 것입니다.

 

이하에서 따져볼 정책들의 공통적 오류는 바로 그 점입니다.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원칙을 저버리지는 않는다는 노무현 정신이 실리를 따지는 행정관료나 관료화된 참모에 의해 맥을 못 추게 된 것입니다.

 

물론 주위 사람들만이 아니라 노통 자신도 그런 사고에 빠져 들었겠지요. 그러면 주요 문제정책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1) 대북송금 특검

 

문변은 <운명>(227~232쪽)에서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안은 노정권 정치력의 첫 시험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노정권 행로를 예측케 해주는 일이었던 셈입니다.

 

문변에 따르면, 의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통과시킨 특검을 노대통령이 거부하기 위해선, 대북송금이 남북관계 대전환을 위한 통치행위였음을 내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DJ가 그 일을 지시했거나 적어도 허용 또는 묵인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해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DJ는 기자회견에서 대북송금에 대해 몰랐다고 해버렸고, 그래서 통치행위였음을 내세우기가 불가능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특검에 의한 수사냐 일반검찰에 의한 수사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검 수사는 수사의 목적과 범위가 특정되기 때문에 국민들 인식과는 달리 일반검찰 수사보다 위험성이 오히려 덜하다고 합니다. 일반검찰의 경우엔 온갖 정치자금이나 기업비자금까지 수사범위를 확대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변의 해명엔 일리가 있습니다. 노정권이 검찰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면 일반검찰 수사의 위험성이 더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취임초기의 노정권에 시퍼런 칼을 겨누고 있는 검찰을 제압할 능력을 노정권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이건희회장 비자금 사건이 불거져 삼성특검이 임명되었을 때, 검찰 출신의 김변호사도 특검 임명이 오히려 사건조사를 어영부영 하게 만들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시 특검은 수사기간도 제한되어 있었고 능력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일반국민들은 특검이라고 하면 뭔가 특별하게 잘 할 것 같은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이지요. 이게 통념과 진실의 괴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노통의 특검 수용이 불가피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검을 수용하지 않으면 총리 임명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한나라당의 협박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릅니다(<안희정과 이광재> 197~198쪽 참조).

 

그러나 그 결과 DJ를 비롯해 호남은 노통에게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노통을 지지한 세력이 크게 호남, 진보파, 개혁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대북송금 문제는 호남이 집권 초반에 나가떨어지는 계기가 된 셈입니다.

 

그리고 호남세력 중에는 대선기간 중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를 만들어 노후보를 떨어트리려는 인사들이 있었는데, 노통은 이들 역시 선거 후에 제대로 품어 안는 시늉을 하지 않았습니다. 노통은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성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나중에 노통은 호남 사람들이 내가 좋아서 찍었나 이회창이 싫어서 찍었지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 말을 하게 된 정확한 배경은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집권 이후 호남이 떨어져 나간 데 대한 반발심리가 작동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란 게 자기편을 다지고 반대편을 흩트리고 중간편을 끌어당기는 일인데, 노정권은 이렇게 자기편을 흩트리는 일부터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해 뭔가 다른 대안이 없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문변이 고백했듯이(232쪽)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

 

우선 DJ측과의 의사소통이 불충분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DJ가 대선과정에서 노통을 지원하지 않았고 또 동교동계는 이인제씨를 밀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노통측은 선거가 끝난 후 DJ측의 협력을 구하는 자세가 미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북송금 문제는 노대통령 취임 이전에 이미 터졌는데, 그와 관련해 문희상 비서실장을 DJ측에 한번 보낸 걸로 혹시 노통 측이 할 일은 다한 걸로 생각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에 발간된 DJ회고록을 보면(<김대중 자서전 2> 528쪽), 빈손으로 갈 수 없어 1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제공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현대그룹이 4억불의 대북송금에 합의한 사실도 DJ가 보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중엔 진실을 밝힌 DJ이므로 노통측이 취임 당시 끈질기게 설득했더라면 DJ가 노통측의 요구를 수용해서 대북 송금 보고받았다고 공표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끈질기게 접촉했더라면 비록 그렇게 요구대로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노통의 특검 수용에 대해 양해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DJ의 오해가 풀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건 아마도 노통이 집권 이후 DJ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DJ는 곧 호남이며, 또한 그의 통치경험도 참고할 게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수성가형의 노통은 그런 협력이나 조언을 경시했습니다.

 

DJ 특히 동교동계의 정치 스타일이 노통과 잘 맞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또 지역구도를 극복하는 게 필생의 주요 과제였던 노통에겐 DJ도 지역구도의 산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권력기반이 취약한 노통이 DJ와 호남을 멀리한 건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DJ와 소통이 잘 안된 상황에서는 어찌 했어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노통이 특검을 거부하고, 검찰에게 수사해서는 안 된다는 특별지시를 내릴 수는 없었을까요. (<운명> 228쪽 참조)

 

물론 수구언론과 검찰의 심한 반발이 있었겠지요. 대통령직을 걸어야 할 큰 싸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해볼 만한 싸움입니다. 말하자면 의미 있는 전선치기입니다.

 

선거법 위반 발언 따위로 탄핵에 걸리는 것보다 이건 명분도 있고 지지세력도 훨씬 강력했을 것입니다. 남북 관계를 파탄내지 않기 위해선 대통령직도 걸 수 있다고 했으면 또 한 번 국민은 감동했을 것입니다. 좌익 장인과 관련되어 발동된 노무현 정신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에 그게 너무 위험해서 특검이냐 일반검찰 중 선택해야 했다면 어찌 했어야 할까요. 이 경우엔 비록 수사범위가 확대되는 한이 있더라도 특검을 거부하는 게 정치적으로 옳았던 것 같습니다.

 

특검을 거부하는 행위는 보수수구세력의 공세에 대한 저항입니다. 반대로 특검을 수용하는 행위는 보수수구세력에 대한 굴복입니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그렇게 비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인식을 고칠 방법도 없었습니다.

 

수사범위의 확대를 막는다고 하는 문변의 발상은 변호사 실리주의로 여겨집니다. 법정에서 피의자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발상인 셈입니다. 이는 실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행정관료적 발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리해서 수사범위는 좁혀졌는지 모르지만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습니다. 결국 소탐대실(小貪大失)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요. 문변도 정치적 인물로 성공하려면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요컨대 대북송금 특검에 대한 대안은 첫째가 DJ측과의 밀접한 소통을 거쳐 통치행위 선언을 하는 것이었고, 둘째론 DJ측과의 소통이 실패했더라도 통치행위 선언을 했어야 했고, 셋째론 이것도 저것도 안 되었더라도 특검은 거부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2) 이라크 파병

 

대북송금 특검 수용으로 호남이 이반했다면 이라크 파병으로 진보개혁세력이 이반했습니다. 그만큼 이라크 파병 역시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논란도 치열했습니다.

 

문변은 <운명>(267~270쪽)에서 이라크 파병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의 정무분야 참모들을 비롯해 문변 자신도 처음엔 파병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노통도 개인적으로는 파병을 마땅치 않아 했답니다.

 

그런데 2002년 10월 미국 관료들이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 받는 사건이 일어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통의 취임 무렵은 북핵위기 국면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정권은 북핵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의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병은 하되 비전투병으로 하고, 파병 성격도 전투작전이 아니라 전후 재건사업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문변의 술회를 보면 파병결정의 고통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특히 노통이 파병방침 발표 문안에서 정의로운 전쟁이라든가 경제적 이익 따위의 내용을 빼라고 한 대목이 그런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습니다.(269쪽)

 

그러면서 문변은 진보개혁 진영의 파병반대가 정부가 전투병이 아닌 비전투병을 파병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병이 북핵위기의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이 드러난 지금에 와서까지 파병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인은 외교안보에는 문외한입니다. 게다가 파병이나 북한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문변이 책에서 밝히지 못한 국가기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뭐라고 판단을 내리기엔 주저됩니다. 다만 그래도 몇 가지 문제 제기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파병을 통해 미국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피해가 한반도에 초래되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남한에서 군대를 일부 빼 가는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변도 그런 위험을 지적하진 않았습니다.

 

진짜 큰 문제는 네오콘의 주장대로 북한 폭격이 단행될 위험성입니다. 문변 말대로 이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했고, 그게 정말로 파병으로 저지될 수 있었다면 파병은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미국은 북폭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2차 북핵위기 상황에서 북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94년 민주당의 클린턴 정권에 비해 2003년 공화당의 부시정권은 훨씬 막가파이므로 위험성은 더 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변 역시 외교안보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전제로 따져봅시다. 부시가 아무리 막가파라 할지라도 남한의 뜻을 깡그리 무시하고 함부로 북폭을 단행할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1994년 북폭을 검토했을 때 그에 따른 미군과 한국민의 피해 역시 막심할 것으로 예상되어 포기한 바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한반도 두 군데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둘째로, 북폭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 하더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파병이 불가피했다고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 경우에 문제는 홍보입니다. 진보개혁진영을 포함해 국민들에게 그 불가피성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보기 힘듭니다.

 

노정권의 홍보실력은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수구보수 신문이 지배하는 언론계라서 홍보실력은 어쩌면 더욱 더 중요했던 셈인데, 정권 내내 수구보수 신문에 짓밟히기만 했지 제대로 된 홍보전략을 펼쳤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라크 파병과 같은 중요 사안에서는 노통을 비롯해 정부가 파병반대 세력과 소통을 더욱 강화해야 했습니다. 정부가 어느 정도 소통 노력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부족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TV토론 몇 차례 한 것 가지고 할 일 다 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사회원로, 시민단체 등등과 제대로 대화했다고 보기 힘들 것입니다.

 

북폭의 가능성은 이미 뉴욕 타임스 등에서 언급된 바 있었으므로 국가기밀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2003년 5월 노통의 미국방문 때 미국이 준비한 한미공동성명 초안엔 북핵위기에 대해 북폭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걸 노통이 뚝심으로 밀어붙여서 성명문안에서 북폭 가능성을 삭제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로 바꾸었다고 합니다(264쪽). 그렇다면 이런 제반 사정을 파병반대파를 비롯한 국민들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이해를 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파병 문제를 빨리 매듭지으려고 하기보다는 이걸 도리어 시민사회와 노정권 사이의 소통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더라면 어땠을까요. 대화하고 또 대화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반대파도 어느 정도 지쳐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너무 비현실적인 이상론인가요.

 

그리고 대북송금 문제에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노통이 바르게 대처했다면 파병 문제도 훨씬 쉬웠을 수 있습니다. 남북한 관계 파탄을 막기 위해 검찰의 수사중지를 지시할 정도라면, 역시 한반도 파탄을 막기 위해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졌을 테니까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계속 문제를 키운 셈입니다.

 

셋째로, 만약에 북폭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그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파병을 했다면 이건 커다란 잘못입니다. 친미파 외교라인이 북폭 위험성을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내각은 물론 청와대의 외교 국방 참모들도 친미파(숭미파?)가 주류였습니다. 최근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건에 MB가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만,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이들은 파병으로 얻을 수 있는 외교적 실리를 강조했을 것입니다.

 

문변의 책에 따르면 노통이 이런 실리 때문에 파병을 결정한 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노통은 옳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외교적 실리주의 관료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북폭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선 앞으로도 항상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게 어쩔 수 없는 약소국의 설움일까요.

 

북한이 미국의 인질인가요. 역발상(逆發想)으로 우리가 북한을 대미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는 없는 걸까요. 먼저 6자회담을 끌어내고, 파병 결정은 되도록 미뤘으면 어땠을까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독일도 아프간에는 파병했지만 이라크 파병은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독일보다는 조건이 불리하지만, 미국의 요구를 반드시 맹종했어야 하는 건지 의문입니다. 미국에 맹종하지는 않을 지도자라고 노통을 국민이 뽑은 건 아닐까요.

 

물론 한반도 민족의 생명을 걸고 함부로 도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실력을 갖춘 진보개혁적 외교전문가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자주외교를 실천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합니다. 어떻게 했어야 할지 분명한 대안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병의 불가피성을 철저히 재검토하고, 자주적 대미관계를 과연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를 따져보고, 이런 문제에서 국민과 어떻게 소통할지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 진보개혁정권이 다시 들어서더라도 비슷한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3) 한미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

 

노정권이 진보파와 등을 지게 된 또 하나의 계기가 한미FTA였습니다. 노정권을 지지하던 일부 진보파가 이반하게 되었고, 애당초 노정권에 비우호적이었던 민주노동당 등 진보파 일부는 정권공격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정권에 대한 지지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연정 제안과 더불어 한미FTA는 마지막 결정타(finishing blow)가 되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문변은 대북송금 특검이나 이라크 파병과는 달리 한미FTA에 대해선 노정권의 긍정적 성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교섭에 있어서 … 최대한 우리 이익을 지켜내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기술해 놓았습니다(348쪽).

 

과연 그럴까요. 물론 MB가 한미FTA 교섭을 한 경우와 비교하면 우리 이익에 더 충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와 같은 독소조항은 이미 노정권의 한미FTA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또 노정권의 정치적 상처를 능가할 만큼의 경제적 이익이 있는지도 불확실합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한미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서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투자국 정부의 정책 등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 해당 국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 등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 해결센터의 구성이 국가법원과는 달라서 국가의 이익보다 자본의 이익을 우선하기 쉽습니다. 그리해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가 여기에 걸려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특히 그 위험성 때문에 정책의 자율성이 침해받을 소지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일본도 싱가포르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때에 싱가포르를 경유한 자본이 소송을 제기할 위험성 때문에 이 조항을 뺐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한미FTA는 개방이냐 쇄국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한국은 무역주도 성장을 통해 많이 개방했고, 특히 IMF사태로 대외개방을 더욱 확대한 상태였습니다. 한미FTA 빨리 하지 않는다고 나라가 결딴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것저것 충분히 고려하면서 차근차근 추진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문제점을 따져 보겠습니다. 다만 한미FTA의 경제적 문제점은 이미 본인의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선 그 이외의 정치적 고려사항 등을 주로 따져 보겠습니다.

 

첫째로, 한미FTA를 주도한 김현종씨에 대한 평가 문제입니다. 문변은 그가 충분한 검증과 실력을 인정받고 통상교섭본부장 자리에 올라 한미FTA를 추진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능력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한국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위키리크스의 최근 폭로 문서에 따르면, 그는 한국민이 아니라 미국 제약회사들의 이익을 위해 죽도록 싸운(fighting like hell) 걸로 나옵니다.

 

즉 2007년 7월 24일 그는 주한 미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대해 미국정부에 미리 알리고,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미국이 의미 있는 코멘트를 할 시간을 주며, FTA 의약품 작업반에서 미국정부가 협상을 잘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미국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생기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위키 리크스 보도에 대해 아직껏 해명한 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서도 유시민 당시 복지부 장관이 새로운 약가제도(즉 위에서 언급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를 도입한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김현종, 한미FTA를 말하다> 126~130쪽 및 254쪽)

 

이런 정황들을 근거로 위키 리크스의 폭로문건이 김현종씨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하면 무리한 해석일까요. 그런 그에게 한미FTA를 맡겨 놓고 성과가 좋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전제부터 잘못된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둘째로, FTA 협상의 순서 문제입니다. 이를 따져보려면 우선 한국이 체결한 FTA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2004년 FTA를 칠레와 최초로 맺었습니다. 당시에도 농민들의 상당한 반대가 있기는 했으나, 체결 이후 국내농산물 시장의 피해는 우려했던 것보다는 적었습니다.

 

그 후 2006년 한-싱가포르 FTA가 별 저항 없이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물결 속에서 한일 FTA가 준비되어 갔습니다. 한일FTA는 김대중정권 하에서부터 연구되었고, 노정권 하에서도 정태인 비서관의 주도 아래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비서관이 갑자기 물러나면서 한일FTA는 중지되고 한일FTA에 비해 준비도 극히 부족했던 한미FTA가 추진된 것입니다. 정비서관의 사임 이후 그를 대신할 적당한 인물이 청와대에 자리 잡지 못했고, 그 결과 김현종씨가 FTA협상을 일방적으로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관료적 실리주의를 정치적 관점에서 견제할 수 있도록 인사가 짜져 있어야 하는데, FTA 문제에서 보듯이 노통의 인사에서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것입니다. 정비서관의 사임 이후 이정우교수도 물러나고, 청와대 내의 미약하지만 남아있던 진보적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어찌 했어야 할까요. 본인 생각으로는 정비서관의 대타를 빨리 찾아서 FTA 순서를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우선 한일FTA를 재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한일FTA는 진보개혁진영이 그렇게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일본公使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한일FTA는 무역이나 투자만이 아니라 에너지나 환경 문제의 협력과도 관련된 협정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협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기회였지요.

 

게다가 미국이 북폭과 같은 협박을 할 때 이를 막아내기 위해서도 한일공조가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한일FTA에 대해서도 득실을 따져 봐야 하겠지만, 그렇게 쉽게 내던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일FTA가 순조롭지 않을 때나 그게 성사되고 난 뒤엔 한미FTA보다 차라리 한EU FTA를 먼저 추진하는 게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한 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현종씨는 EU측이 FTA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미FTA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을 보더라도 EU를 FTA에 끌고 오기 위한 노력은 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실제 한미FTA 협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EU쪽이 FTA협상을 제의했는데도 한미FTA협상을 핑계로 EU와의 본격 협상을 미루었습니다(<김현종 …> 69~70쪽). 나중에 EU가 협상을 먼저 제의할 정도라면 애당초 EU쪽에 열의를 더 기울였다면 충분히 FTA협상이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EU와의 FTA는 우선 경제적으로도 유리했습니다. MB정권 시에 체결된 협정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한미FTA의 가장 큰 독소조항인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빠져 있습니다. EU는 국가들의 연합체이므로 그런 개별국가의 주권과 관련된 조항을 요구할 형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성공단 공산품을 한국제품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EU측이 먼저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MB 정권이 대북 비바람정책을 추구한 탓에 이 조항이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미국과의 개성공단 조항은 김현종씨의 자랑과는 달리 넘어야 할 고비가 너무 많아 실효성이 없는 조항인 반면, EU와는 훨씬 실효성을 강화시킨 개성공단 조항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미FTA가 쇠고기, 스크린 쿼터 등 이른바 FTA 선결조건으로 국민들의 우려와 분노를 야기한 반면에 EU와의 협상에서는 그런 문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훨씬 적었습니다. 한미FTA보다는 진보개혁진영의 우려가 훨씬 적었습니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한EU FTA 반대 시위도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숭미파 관료들의 실리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또한 정치적 고려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한EU FTA를 먼저 추진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지지 세력을 잃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EU FTA 협정 내용을 갖고 나중에 한미FTA에 임했더라면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적 실익도 더 많이 확보하고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같은 위험조항들도 적어졌을 것입니다.

 

한미FTA 반대진영도 정부에게 이런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했으면 어땠을까요. 김현종씨 같은 관료가 포진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별 효과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한미FTA 반대진영이 개방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혹시 한미FTA의 추진 속도나 방식을 변경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셋째로, 한미FTA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실리주의 관료의 문제입니다.

 

노통도 초기엔 한미FTA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정부의 지지기반이 무역자유화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그 상대가 미국이라면 더욱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김현종, 한미FTA를 말하다> 40~41쪽).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리주의적인 인사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엔 앞서 말한 정비서관의 사임 같은 사건도 작용했습니다. 그리해서 정치적 고려가 사라진 것이지요.

 

진보개혁진영의 인물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비주류에 속합니다. 이런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주류의 이른바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혹하게 마련입니다. 안철수교수에 국민이 반하듯이 새로운 유형의 인물에 대통령이 쏠리는 것이지요.

 

예컨대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당시 경제관료로부터 보고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그 관료는 주어진 시간 내에 요령 있는 브리핑을 하기 위해 초 단위로 브리핑 리허설을 점검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관료들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보고서 작성 훈련도 잘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진보개혁진영 인사들은 열정은 뛰어나지만 정보채널도 보고능력도 뒤떨어집니다.

 

진보개혁진영의 대통령은 과거의 인물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폭넓게 인재를 등용해야 합니다. 관료들의 능력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뗏목으로 강을 건너고 나서 그 고마운 뗏목을 이고 가려해선 안 된다는 말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중심을 잃어선 안 됩니다. 통치의 기본방향은 철학을 같이 하는 인물들이 끌고가야 하며, 대통령이 관료적 행정가로 전락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문제를 어찌해야 할까요. 노통이 대통령이 되기 전 본인이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이런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우물쭈물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결국 관료적 실리주의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본인도 정답을 모르겠습니다. 정태인 소장에게 물어봤더니 국책연구소 박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들은 관료들과의 접촉기회가 많으므로 운동권출신이나 대학교수보다는 나은 면이 있을 겁니다.

 

미국처럼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관료들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중앙부처의 국장급을 모두 대통령이 갈아치울 수 있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지겠지요.

 

대통령이 관료들과만 만나거나 책만 읽고 있지 말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 특히 이해관계 없이 거리낌 없이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노통은 이 부분이 특히 부족했습니다.

 

아니면 근본적 처방으로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선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을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노통은 대북송금 특검, 이라크 파병, 한미FTA와 같은 사안에서 변호사 실리주의, 외교적 실리주의, 경제적 실리주의에 압도되어 정치적 고려를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실리주의에 매몰되면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바보노무현' 정신이 나올 수 없지요. 수구보수세력에 의해 포위되지 않은 안정적 정권이라면 실리를 중시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수구보수세력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 속에선 노통의 무기인 감동정치를 버리고선 결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실리를 아예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리와 정치적 명분이 충돌할 때엔 정치적 명분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통이 실리에 매몰되었다면 손쉬운 종로구 국회의원 자리를 버리고 부산의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떨어지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실리에 연연하지 않을 때 정말로 큰 실리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지도자는 쪼짠한 실리를 늘려주는 지도자라기보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지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발전도상국 단계를 벗어나 바람직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한국에선 원칙과 명분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좀 진부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상 통치시기에도 선거시기와 같아야 하는 면을 중심으로 노정권을 복기해 보았습니다. 구체적 정책분석이다 보니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격렬한 댓글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다음 글에선 통치시기가 선거시기와 달라야 하는 면을 중심으로 검찰개혁, 수구보수언론과의 싸움 문제 등을 살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