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기아 - 국민적 기업의 싹을 살려야 하는 이유(1997.7) - 말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38

 

기아 - 국민적 기업의 싹을 살려야 하는 이유

                        

  기아그룹의 경영위기와 관련된 뉴스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이른바 기아 해법도 많은 사람이 내놓았다. 나올 이야기는 웬만큼 다 나온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진보적인 경제학계 인사들의 기아사태 평가였다. 7월 25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조원희교수의 칼럼과 강신준 교수가 {연대와 실천} 7월호에 기고한 글, 그리고 8월 5일자 정운영박사의 한겨레신문 칼럼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들에는 경청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선진적인 기업구조의 구축방향, 노동자 대동단결의 절박성, 그리고 재벌 및 그 경영진에 대한 책임 추궁의 필요성에 관한 지적은 다른 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좋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논의의 초점이 잘못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분들의 글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아사태의 올바른 해결책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본론에 앞서 우선 기아사태의 본질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흔히들 기아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사실 이는 정확한 접근이 아니다. 생산설비를 고철로 팔아치우거나 노동자를 다 쫓아낼 형편이 아닌 이상 어차피 기아는 살 운명이 아닌가.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생사여부라기보다는 사는 방식이다.  즉, 누구를 희생시키며 소유.경영 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는 결국, 경영위기에 봉착한 기업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기업의 바람직한 구조란 어떤 것인가에 귀착되는 문제이다.

 
  그러면 이제 세 분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물론 각 글의 강조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편의상 뭉뚱그려서 다루기로 한다. 먼저 무엇보다도 이들은 기아의 특수성을 거의 무시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기아의 소유구조 문제이다. 이들은 기아의 소유가 분산되어 있지만 외세라는 최대주주가 엄연히 존재하며 또 소유분산 여부는 노동자나 국민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기아의 외국 지분은 의결권을 제약받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위한 것이다. 아직 선진국 기업과 대등한 수준은 아니나 기아는 자체 모델도 개발할 만큼 기술력도 갖추고 있다. 막대한 로얄티를 지불하는 등 전적으로 닛산에 의존하는 삼성과는 천양지차다.


  또 소유분산이 의미가 없다면 경제민주화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부와 지배력을 총수 1인이 독점하는 경우와 다수가 공유하는 경우가 어떻게 같을까. 자본의 소유분산구조는 노동자 상태에 아무런 영향도 못미친다고 하는데, 기아의 소유분산이 어디 단순한 소유분산인가. 노동자의 소유가 꽤 큰 몫을 차지하는 소유분산이고 이 때문에도 노동자의 발언권은 무시될 수 없었다. 그리고 선진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도 족벌자본주의 세력의 약화와 더불어 노동자의 생활상태도 개선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둘째로 이 분들은 기아의 이른바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해 사실상 총수 1인의 독주체제이므로 무의미하며 기아도 여타 재벌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기아는 재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재벌의 교과서적 개념에는 개인 또는 가족의 소유 통제라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기아는 그냥 대규모 기업집단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재벌들은 기아를 백안시해 왔고 나아가 이번 사태를 재벌구조 정당화의 증거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문경영인체제가 항상 재벌체제보다 효율적이지는 않으며 특히 경영자에게 책임을 묻는 시스템이 미비되었을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전문경영인체제=무책임경영은 아니다. 조교수도 언급한 바이지만 선진국처럼 적절한 이사회 및 감사제도 등을 통해 책임경영체제를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전문경영인체제가 반드시 경영민주화를 담보하지는 않고 기아의 경영민주화 역시 신통치 않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체제였기 때문에 기아에서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권익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점을 간과할 수 있을까. 이러한 발전적 싹을 제거하기 위해 정부, 은행 및 언론은 경영위기 책임의 노조전가와 노조무력화를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노조에 아무 책임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주인의식의 발휘가 미흡했던 부분인 듯싶다. 덧붙이자면 정부, 은행의 지적과는 달리 기아자동차의 임금은 타사와 비슷하고 근년의 손실일수도 제일 적었다. 배치전환시 노조와의 협의는 일본 자동차업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바이다.


  셋째로 기아 역시 문어발 경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의 과장이다. 계열사가 28개이지만 대부분 자동차 관련기업이고 이러한 관련다각화를 재벌의 무분별한 문어발경영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문어발경영 문제와는 별개로 기아의 경영진이 과도한 차입과 무리한 투자라는 과오를 범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최고경영진은 경영위기의 책임을 지고 사태를 수습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다. 경영의 구심점 문제가 있으므로 당장 물러나기야 어렵겠지만 일정한 시한 후에는 명예퇴진하는 게 도리이다. 사실 재벌과 달리 적절한 시기에 유능한 후계자에게 자리를 양도하는 것이 전문경영인체제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현 경영진은 바로 그 모범을 보여야 한다.


  넷째로 세 분들은 기아가 국민기업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발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위에서 밝힌 대로 기아는 국민(적) 기업의 '싹'을 가졌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민기업이라는 개념이 교과서에 있는가라고 하는데 민중이란 개념은 교과서에 있었는가.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소유와 경영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관련 당사자에게 골고루 이익을 제공하는 바람직한 기업모델로 국민적 기업을 정의한다면, 기아는 미약하지만 그 싹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국민적 기업의 길은 본래 험난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전부냐 아니냐는 식으로 처리하기보다는 그 싹을 북돋워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로 여겨진다.


  기아의 특수성 문제에 이어 다음으로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이 분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자. 이분들은 기아를 돕기 위해 정부가 한은특융을 동원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한다. 관치 금융에 좋은 관치금융, 나쁜 관치금융의 구별이 없다는 말씀이다. 묘하게도 시장만능론자와 비슷한 입장인 것같다.


  그런데 우선 정세를 보면 매우 유동적이다. 기아 목조르기가 도를 더해 가는 한편 여당 대표가 그간의 의혹을 불식하려는 듯 제3자의 기아인수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재벌의 각축전, 특히 극도로 비효율적인 자동차투자로 고심하는 삼성의 공작과 국민적 기업의 싹을 도려내려는 보수 진영의 총공세가 전개되는가 하면 여론의 추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도 작용하여  사태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세와는 별개로 원칙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기업의 위기사태에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 분들은 개별 기업의 잘못에 대해 국민이 부담을 질 수는 없다고 한다. 사실 이때까지 정부의 여러 조치는 국민들 부담 하에 일부에게 특혜를 준 성격이 강하므로 이런 우려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은특융등 정부의 지원을 무조건 배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개별기업 특히 대기업이 잘못되면 그 부담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선 대기업을 지원하여 재건시키는 방향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더욱이 기아사태엔 정부의 산업정책적 과오도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과 어쨌든 기아는 살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물론 무조건적 지원은 있을 수 없다. 철저한 자구 노력과 경영진에 대한 문책이라는 전제 하에서 한은특융도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만 억울하다고 하는데 중소기업의 경우에도 유사한 조치를 강구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끝으로 노동자의 대응전략과 관련한 문제를 살펴보자. 강교수는 기아가 망하든 말든 그것은 자본의 문제이므로 노동자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다만 고용위기를 극복키 위해 자동차 산업별노조 등을 건설하여 교섭력을 강화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견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발등에 떨어진 기아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이해는 서로 분리되어 있기도 하지만 서로 의존하는 측면도 있는 법이다. 특히 기아와 같이 노동자가 주식을 보유하고 있고 극히 미미하지만 경영에도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선 자본의 문제가 완전히 강건너 불구경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세 분 모두 기아가 3자에게 인수될 경우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는데, 가령 기아가 삼성에 인수된다고 생각해 보자. 임금은 당분간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량해고라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또 과연 지금과 같은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활발한 노조 활동이 가능할까. 기아 노동자들은 현재 형식적이긴 해도 주인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삼성에의 인수는 노동자를 주인의 지위로부터 단순한 품팔이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농후하다. 삼성에 가서 활발하게 노조활동을 하면 더 낫지 않겠는가 할지 모르지만 삼성의 경영진이 바보인가.


  이럴진데 어찌 기아노동자들이 회사일을 남의 일로 여길 수 있을까. 산업별노조도 발전시켜야겠지만 주인의식을 살려 기업의 재생과 개혁에도 앞장서야 한다.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하고 효율성과 민주성을 동시에 증진시키는 데 노동자가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이기주의를 지양하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기업과 국민경제를 개혁하는 길이다.


  기아사태는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곧 경영진이 교체될지도 모르고 법정관리나 3자인수로 귀결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아가 창출한 국민적 기업의 싹을 살리고 발전시키는 데 우리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