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반세기 한국경제의 회고와 반성(1998.7) - 현대그룹 사보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41

반세기 한국경제의 회고와 반성


  대한민국 정부수립 50 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축하와 환희의 물결 대신, 참담함과 불안감이 우리를 휩싸고 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서고 OECD에 가입하면서 우리 경제의 선진국 진입은 코앞에 닥친 것같았다. 하지만 한보등 대기업의 잇따른 도산과 금융·외환위기가 갑작스럽게 전개되면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정부는 사실상 경제주권을 상실하였으며 대량실업과 급격한 마이너스 성장으로 6.25에 버금간다는 난국에 직면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국제금융자본 특히 단기성자본의 작태 탓인가, 아니면 우리 내부의 구조적 모순 탓인가. 이런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 있다면 잡아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주리를 틀고 물고문·전기고문등 온갖 형벌을 다 내려도 속이 시원치 않을 게 일반국민들의 심정이리라. 그러나 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원래 자본주의에선 호황과 불황의 순환은 필연적이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기엔 근로자 4명 중 1명이 실업자인 때도 있었다. 이번 IMF사태도 한국자본주의의 순환적 현상이라는 불가피한 성격을 갖고 있다. 다만 한국은 그동안 압축적 고도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압축되어 누적된 문제점들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지나치게 충격적인 양상을 띠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IMF사태는 우리가 선진적인 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쓰라린 진통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적은 희생하에서 이 과정을 끝낼 수 있는가이다. 물론 잘못하면 중남미처럼 오랜 기간 정체의 구렁텅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경제를 재건하고 개혁하기 위해 경제주체들의 합심 협력이 절실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경제주체들이 경제재건 및 개혁의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선 과거 속에서 계승 발전시켜야 할 유산과 청산 폐기해야 할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에서 반세기 한국경제를 회고 반성해보려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인 셈이다.


  먼저 한국경제 반세기 동안에 진행된 양적 성장의 성과와 구조적 문제점을 개관해보자. 정부수립시인 1948년경의 통계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므로 1955년의 수치로 1997년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55년만 해도 농림어업이 GNP의 44.8%, 광공업이 12.2%, 서비스 기타가 43%인 농업국가였으나 1997년엔 각각 5.7%, 25.9%, 69.2%로 되어 (탈)공업국가로 변화하였다. 제조업의 구성면에서도 초기엔 경공업이 압도적이었으나 1980년경에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경공업 비중을 상회하였고 1997년엔 77.2%에 이르렀다. 3억 6,000만 달러였던 1955년의 무역액은 1997년엔 2,808억 달러로 늘어났다. 1인당 GNP도 66달러에서 1995년에 1만 달러를 돌파했는데 1997년 이후엔 환율인상으로 1만 달러 이하로 하향조정되었다.


  이처럼 그동안 한국경제는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달성하고 세계 11위 무역대국의 지위에 올라선 것이다. 선진자본주의국이 수백년에 걸쳐 이룩한 자본주의적 근대화과정을 불과 수십년 만에 달성해낸 셈이다. 이러한 고도성장은 인적 자원면에선 우수하고 근면한 근로자, 기업가정신을 소유한 경영자, 상대적으로 엘리트였던 관료집단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것이었다. 또한 성장전략 면에선 정부주도, 수출주도, 대기업주도라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가 제한된 자원을 수출부문과 일부 대기업에 집중하여 빠른 효과를 거두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원조·차관의 도입, 월남·중동 경기와 같은 국제적 환경도 고도성장의 주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도성장에는 암울한 그늘도 깔려 있었다. 우선 고도성장의 압축성이 불가피하게 수반한 불균등성이 여러 가지 갈등과 제약을 초래했다. 대기업 위주의 성장전략 탓에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져 국제경쟁력 향상의 결정적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정부권력의 이상비대화는 관치금융의 폐해 즉 금융산업의 낙후와 정경유착이라는 고질병을 야기했다. 현재 120조원을 넘는다는 금융권의 엄청난 부실채권도 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높은 저축률에도 불구하고 이를 능가하는 투자로 인해 외채의 멍에를 벗어나기 힘들었고, 결국은 IMF사태라는 최악의 외환위기까지 도래하고 말았다.


  더구나 정보화 및 국제화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경제주체들의 체질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정부는 새로운 대내외 조건에 걸맞는 자기역할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여전히 방황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87년 대규모 노사분규 이후 근로자를 참여와 협력의 주체로 적극적으로 기업에 포섭하는 생산적인 노사관계도 정착되지 못하였다.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네트워크(인맥)는 기업 및 국가 경영을 불투명하게 하고 각종 부패의 온상으로 자리잡았다. 기업내 책임전문경영체제의 확립이나 엄밀한 수익성계산은 뒷전인 채 외형키우기에 치중하는 기업전략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면 한국경제의 이와 같은 성과와 문제점은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왔는가. 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몇 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해방 이후 혼란과 피폐를 거듭하던 우리 경제는 정부 수립기를 즈음하여 점차 회복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6.25 발발은 여기에 치명타를 가하였고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경제재건이 진행하였다. 이리하여 1950년대는 원조물자를 토대로 방직·제분·제당과 같은 수입대체산업이 중심을 이룬 시기였다. 당시엔 만성적 수요부족 상태인데다 공정환율과 시중환률도 크게 차이났으므로 원조물자나 달러를 배정받기만 하면 막대한 독점이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정경유착의 출발인 셈이었다. 이러한 정경유착은 금융특혜와 적산기업체 불하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하지만 어쨌든 원조물자 제공, 적산기업체 불하 등을 통해 한국인 기업가는 경제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특히 6.25 전후에 단행된 농지개혁으로 지주가 몰락하고 일단 자작농체제가 성립한 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였으며, 이는 중남미등 다른 후진국과 크게 대조되는 특징이었다. 한편 6.25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미군 주둔용 시설의 설치를 위해 건설업도 급속히 팽창하였다. 그런데 1958년 이후엔 미국의 무상원조가 감소하고 국내수요에 비해 제조업시설도 과잉상태여서 경제가 정체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면직물·합판 부문등을 중심으로, 포화상태에 이른 국내시장에서 벗어나 해외시장을 개척함으로써  불황탈출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났다. 60년대 이후 수출지향 공업화는 바로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50년대 말 경제불황은 이승만 정권의 무능에 대한 불만을 누적시키고 이는 자본축적구조와 통치구조를 혁신코자 하는 사회적 요구로 이어져 마침내 4.19와 5.16을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60년대 이후 공화당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은행을 국유화함으로써 자원배분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한일협정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는 한편 수출지향공업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정부주도-수출주도-외자주도-대기업주도라는 한국 공업화의 특징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정부가 자원배분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정경유착은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다만 이 당시 정부는 기업에 특혜를 제공하는 대신 자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비교적 엄격히 감독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60년대의 수출은 주로 경공업제품에 한정되었고, 수출지향이라고 하더라도 수입대체도 병행되었으므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수출지향과 수입대체의 복선적 발전모델이 채택된 셈이다. 외자의 경우도 직접투자보다는 차관이 중심을 이룬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한국경제를 늘 상환부담에 시달리게는 했으나 한국인 자본의 육성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60년대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8-9 %로서 목표를 초과달성하였다. 이 결과는 물론 비약적인 수출증대에 기인한 바 크지만 현대건설등이 참여한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도 큰 몫을 하였다.


  한편 이러한 고도성장은 60년대 말에 이르러 애로에 직면하였다. 차관을 제공받은 기업중 일부가 부실화되고 경공업제품 수출도 한계에 봉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72년 8.3 조치를 단행하여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였으며 산업에 대해 각종 세제상의 특혜를 부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기업들의 재무구조를 일거에 개선시키는 조치였으나 다른 한편 기업주들에게 경영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조장하기도 했다. 대마불사라는 어처구니 없는 신화도 여기서 싹튼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들은 경공업수출의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로 방향을 틀기 시작하였다. 이 중화학공업화는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것이었으므로 정부는 외자도입을 더욱 촉진함과 더불어 국내적으로도 기금등의 설립을 통해 대자본 계열로 국내외 자본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엔 포항제철소의 완공,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 출시, 현대조선의 초대형유조선 건조 등 중화학공업화의 상징적인 사건들이 잇따랐다. 73-74년의 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 연평균 8% 정도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러한 급속한 중화학공업화 덕분이었다. 게다가 중동건설이라는 특수경기도 외환위기 완화에 크게 기여하고 고도성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70년대 후반에 특히 가속화된 중화학공업화는 격심한 인플레이션과 부동산투기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시일 내에 중화학부문에 대한 투자편중이 이루어져 중복투자, 과잉투자의 시비도 일어났다.


  80년대 초의 당면과제는 고도성장의 이러한 부작용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였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화당정부가 취한 [개발독재]의 딜렘마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즉 개발의 결과인 고도성장과 독재의 결과인 계층간 대립 심화라는 두 요소 사이의 갈등 처리라는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이 문제는 광주비극으로 대표되는 군사독재, 87년 6.10 항쟁 및 6.29 선언, 문민정부의 수립과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부분적으로 해소되어 가고는 있으나 여전히 경제주체간의 적대적 긴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정부에 비해 대기업들의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정부-기업간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역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민간주도경제가 제창되면서 은행도 민영화되기는 했으나 이른바 관치금융은 지속되었고 사업 인허가권도 정부 손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권·행정부는 제대로 산업정책도 시행하지 못하면서 대기업에 기생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느낌마저 드는 형편이 되었다. 이처럼 80년대 이후 시기는 60-70년대식 성장모델의 환골탈태를 절실히 요청하였으나, 그것이 신속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여 결국 IMF 사태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한편 전두환 정부는 우선 물가상승을 억제하고 중화학투자를 조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 물가상승은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중화학 투자조정은 승용차·발전설비 조정에서 보듯이 업계의 복잡한 로비에 뒤엉키면서 소기의 성과는 달성하지 못하고 기껏 일시적인 수급안정을 달성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세감면규제법, 한국은행특별융자와 같은 특혜조치를 통해 부실기업정리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IMF사태 이후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의 축소판이었던 셈이다. 이 결과 기업들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3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라는 유리한 국제환경이 작용하면서 1986년부터 3년간은 연평균 성장률 12%의 호황을 맞이하고 국제수지도 흑자를 시현하였다. 그러나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특혜제공은 기업주의 도덕적 해이와 정경유착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1987년 7,8월의 대규모 파업으로 한국경제는 새로운 분수령을 맞이하였다. 이는 사용자와 종업원의 관계, 국가와 근로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지진과 같은 사건이었다. 60년대 이후 개발독재체제 하에선 노동조합의 조직확대나 노동운동이 억압당하였고, 많은 사용자들이 전근대적 노사관을 고수하였으며 노동문제가 발생할 때는 정부의 물리력에 의존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노사관계를 통해 고도성장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근로자와 사용자·정부 사이에는 깊은 불신감이 쌓였고 이것이 1987년에 폭발한 것이었다.


  이후 몇 년간 노동쟁의가 폭발했는데 89년경부터는 진정국면에 접어들기는 했다. 이러한 진통은 선진경제로 가는 도정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과도적인 것이기는 하다. 문제는 어떻게 빨리 이 고비를 극복하고 선진적인 노사관계, 선진적인 성장체제를 정착시킬 수 있는가일 것이다. IMF 사태 이후의 구조조정과정에서 보듯이 그 길은 여전히 순탄치 않다. 새로운 근로윤리를 확립하고 참여와 협력에 기초한 생산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의 앞날은 어둡다 할 것이다.


  한편 3저호황 이후 우리 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제2의 중화학공업화라고 할 만한 대규모투자를 단행하였다.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자동차, 이동통신 등에서 그 현상은 두드러졌다. 소위 글로벌화의 진전으로 해외로부터의 금융이 용이해진 것도 여기에 한 몫 하였다. 게다가 한국기업의 해외진출도 급증하여 85년까지의 잔고가 총 5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것이 95년 말에는 100억 달러를 초과하였다. OECD 가입도 한국경제의 이러한 글로벌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가 80년대 초 과잉·중복투자 문제를 낳았듯이 80년 말 이후의 대기업투자도 마찬가지 문제를 야기했고, 해외금융과의 관련 속에서 IMF 사태라는 날벼락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대기업들의 투자를 모두 무분별한 짓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지나친 매도이다. 그러나 대기업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규모도 비례적으로 커지고, 따라서 잘못된 투자의 국민경제적 위험성이 크게 증대하였음은 분명하다. 또한 IMF 이후 해외투자로부터의 철수가 잇따르고 있는데서 보듯이 부화뇌동식 투자나 해외진출이 상당 정도 이루어졌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와 같이 자본 그것도 남의 자본을 갖고 돈이 벌리는 곳이라면 아무데나 뛰어드는 다각화 방식은 이제는 통용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자본주의는 성숙한 게 아닐까.


  이제 반세기를 되돌아 보면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 새로운 도약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부, 금융, 기업의 개혁이 절실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각 경제주체간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경제를 구축해 가야 할 것이다. 대외관계에서도 개방의 대세에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그 물결에 휩쓸려 익사하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 역시 필요하다. 특히 대외개방에 앞서서 남북한 동일 민족간의 경제교류를 강화하는 것이 더 절실하지 않는가. 남북한 긴장완화가 가져오는 경제적 이득은 물론이고 양쪽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합 발전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경제, 우리 민족의 살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