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과연 누가 개혁의 걸림돌인가(1998.7) -민노총 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42

과연 누가 개혁의 걸림돌인가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본격화되고 있다. 은행, 대규모 제조업체, 공공부문 등에서 실업자가 줄줄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게다가 이런 과정에서 생겨나는 노조의 저항에 대해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비난이 퍼부어지고 있다. 참담하고 답답한 느낌이다. 전산망 교란등이 그리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지 않은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노동자들은 밥줄이 끊기고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도 잠자코 있어야만 하는가. 제대로 비명 한번 지르지도 못한 채 쫓겨난 중소기업이나 무노조 기업 노동자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으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노동자들이 해고당할 만큼의 과오를 범했다면 해고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을 저해하는 노조는 분명히 구조조정의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실대출, 부실투자, 부실경영을 초래한 장본인들이 따로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빼돌리거나 모아둔 재산없는 노동자들이 왜 그 죄를 덮어써고 벼랑끝으로 내몰려야만 하는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 관료, 재벌총수 중에 감옥가는 자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은 퇴출되어야 할 자들 중 재수나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퇴출되지 않고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배집단이 바로 개혁의 진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바로잡는 것 즉 재벌체제의 지양, 실업대책의 확보, 정치관료구조의 개혁, 경제주권의 회복 등 경제재건 및 개혁을 위한 하나의 중심세력으로 점차 부상해 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조세력이다. 물론 노조가 더 분발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개혁의 걸림돌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 


  노조가 걸림돌인 것처럼 보이는 해고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자.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인력배치가 잘못되어 있다면 고용조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부실의 책임 소재를 밝혀 그에 상응하는 공평한 고통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경영이 악화되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대량의 정리해고를 단행하기에 이른 재벌총수는 퇴진시켜야 하며 그 재산을 환수하여 해고근로자에게 보상해야 한다.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의 재산도 환수하여 실업대책기금에 충당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80년대 금융부실 때 1,500명이 넘는 관련자들에 대해 법적 경제적 책임을 확실히 따진 바 있다. 


  둘째로 고용조정시엔 사전협의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부실에 별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에 대해 마치 소들을 도살장으로 끌고가듯이 처리해서는 안된다. 노사정위원회는 장식용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불만을 가두어두기 위한 특수용기인가. 개별 사업장에서 협의가 진척되지 않을 때는 당연히 노사정위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는가. 얌전한 은행원들까지 데모에 나선 판국이므로 자칫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로 해고만이 능사가 아님을 더욱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필요에 따라선 임금삭감등을 통한 해고회피의 노력을 충분히 한다고 하는, 정리해고제 시행정신은 실종된 느낌이 크다. 그리고 공공부문의 경우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인원조정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시기선택에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와 같이 사회적 안전망이 극히 미흡한 상황에선 공공부문이 그러한 안전망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인원조정은 당분간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경기회복 후에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한편 노동자들도 이러한 고용문제에는 대단히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욕만 덮어 쓸 우려가 있다. 그리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일이 급하긴 하지만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시야도 가져야 한다. 사업체의 경영을 노동자들이 견제 감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 나아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체의 부실에 따라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조정 과정에 수시로 휘말릴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굳게 단결해서 개인과 노조를 지킴은 물론 기업과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