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2년 3월 30일자)
생산적 이념논쟁을 바라며
김 기 원(방송대 교수, 경제학)
정치판이 나날이 요동치고 있다. 민주당에선 대세가 허세로 드러나고, 한나라당에선 다 따놓은 대통령자리가 일단 신기루로 되었다. 역시 한국에선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이런 불확실성과 역동성이 온갖 갈등을 빚어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돌아온 각설이처럼 다시금 이념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먼저 김종필씨가 보혁구도를 얘기했다. 또 색깔시비라면 진저리를 칠 민주당내에서 이인제후보의 마지막 카드가 바로 상대편을 급진좌경으로 몰아치는 공세전략이다. 수구언론들도 얼씨구나 하고 장단을 맞추고 있다. DJ에 달라붙었던 찰거머리가 DJ퇴임을 앞두고 새로운 흡혈원을 찾으려는 것일까.
사실 색깔공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기 십상이다. 색깔에 따라 일가족살육까지 벌어지는 동족상잔을 겪지 않았는가. 게다가 군사정권 하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감옥을 들락거린 것도 이 때문이다. 저놈 빨간 놈이라는 한 마디로 인간존재를 간단하게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지도부나 노후보 진영 일각에서 보혁 어쩌고 하는 말에 손사래를 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념이란 국어사전에 의하면 ‘이상으로 생각되는 관념’ 즉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혁신의 뜻도 낡은 것을 새롭게 고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을 갖고 다투는 선거전이라면 이념논쟁, 혁신논쟁이 활발해야 오히려 마땅하다. 정책의 색깔이 어둡고 칙칙한 것인지 밝고 빛나는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
물론 이념이나 혁신이란 용어에 대한 국민들의 알레르기 반응이 걱정되기는 한다. 그렇다면 비전이나 개혁이란 말로 대체하면 된다. 그리고 언론에 발표된 노후보 정책도 자본주의를 타도하자는 건 아니고, 독일식 자본주의를 기본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다. 노무현과 이인제·이회창의 이념차이는 재벌체제나 국가보안법 등 한국의 전근대구조와 관련된 부분도 있고,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혹은 독일의 사민당과 기민당의 이념차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도 있다.
따라서 이런 이념논쟁을 회피할 필요가 없다. 되려 장려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전근대적 지역주의가 안 먹히기 때문에 취해지는 근대적 정책논쟁이다. 이념논쟁의 본격화 자체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나타내는 측면도 있다. 다만 자기보다 더 개혁적이라고 빨갱이로 뒤집어씌우는 구태의연한 작태는 중단되어야 한다. 현재 대선주자들의 이념이 다 자본주의 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냉전체제 해체와 남북대화를 경험한 우리 국민도 이제는 어처구니없는 빨간 칠 장난에는 넌더리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시장경제라 하더라도 다 똑같지는 않다. 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한국, 인도네시아 자본주의는 각기 다르다. 우선 선진국자본주의와 후진국자본주의가 다르다. 또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경쟁효율과 공동체성 중 전자를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앵글로색슨 쪽과 후자를 더 중시하는 대륙유럽·일본 쪽이 서로 다른 것이다. 미국에선 고성장을 자랑하는 대신 소득분배 악화와 범죄에 시달리고, 대륙유럽 쪽에선 사회는 안정된 반면 실업률이 높은 나라가 많다.
선진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이런 여러 선진국모델 중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식을 따를 것인지, 대륙유럽식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이들의 장점을 배합한 독자모델을 개발할 것인지가 주어진 과제다. 이걸 따지는 게 바로 이념논쟁이고 비전논쟁이고 정책논쟁이다.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사생활 들추기나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엠에프사태 이후 허겁지겁 위기를 수습하는 일은 어정쩡하지만 일단락되었다. 이제는 구조조정추진과 더불어 선진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아야 한다. 따라서 재벌, 노동, 복지, 조세 등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앞으로 오히려 절실하다. 퇴행적 덮어씌우기 식 이념논쟁은 저리 가라. 그 대신 생산적 미래지향적 이념논쟁은 이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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