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계의 퇴행은 어디까지(2001/5/21) - 시민의 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24

재계의 퇴행은 어디까지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재계가 궐기했다. 그 동안의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는 결연한 투쟁에 나섰다. 재계를 괴롭히던 정부, 민주노총, 시민단체의 좌경 연합군을 쳐부수는 역사적 대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무지몽매한 대중이 뭐라 하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이 성스러운 전쟁에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케케묵은 냉전박물관의 논리면 어떤가? 사실의 날조쯤이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민주노총이 김대중정권 퇴진투쟁을 벌이고 있더라도 그런 사실쯤 무시하고 함께 도매금으로 묶어 버리자. 그래야 비슷하게 붉은 색칠 할 수 있다. 참여연대가 변동환율제에 관해서는 입에 꺼낸 적도 없지만 거기에 반대했다고 중상모략하자. 세상일은 무조건 덮어씌우는 게 장땡이다. 정부와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보수언론들도 우리편이다. 차기집권세력도 우리 돈 안 받고 어쩌겠는가?

 

  이런 게 최근 일 아닌 일을 벌이고 있는 재계의 정신상태가 아닌가싶다. 물론 그 맨 앞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전경련산하 자유기업원의 작태야 슬픈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튀어야 월급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런 코미디를 대문짝만큼 취급한 일부언론의 수준이다. 세무조사니 뭐니 하면서 함부로 언론을 건드리려는 정부에 대한 총공세에 도움될 만하면 개똥이라도 갖다 쓰려는 심산인가?

 

  어쨌든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 공세를 뒷받침으로 재계는 정부에게 여러 구체적인 요구를 들이밀었다. 출자총액 제한제도, 30대기업집단 지정제도, 동일계열 여신한도규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라는 것 등등이다. 이 내용들이야 돌아온 각설이 타령처럼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재계는 기회만 있으면 이런 요구를 제기했던 바 있다. 다만 이번에는 내년 3월까지 해소해야 하는 초과출자분 때문에 출자총액제한 문제에 주로 힘을 싣고 있고 요구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출자총액제한이란 재벌의 선단문어발경영을 시정하기 위해 1986년에 만든 규제이다. 재벌기업의 경우 순자산(자본금에서 계열사 출자분을 뺀 것)의 25%까지만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IMF사태 이후 재벌의 채무보증을 해소시키고 부채비율을 낮추게 하면서 여기에 반발하는 재계를 달래기 위해 출자총액 제한을 없애 버렸다. 재계의 퇴로를 열어준답시고 개혁의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같이 밟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1998년 29.8%이던 출자비율은 2001년 4월 현재 35.2%로 늘었다. 이리하여 재벌들은 계열사 사이의 출자를 늘려 선단문어발경영을 유지하고 가공자본을 통해 부채비율을 낮추었다. 결국 재벌의 사업구조 조정은 어정쩡한 상태에 그치고 부채비율 축소도 눈 가리고 아옹한 셈이다. 이게 1999년에 떠들썩하게 문제가 되자 정부가 다시 5 + 3 원칙을 세워 출자총액 제한을 부활하였고 그 해소시한이 내년 3월로 다가온 것이다.

 

  물론 재계의 주장대로 출자총액 제한이건 30대기업집단 지정이건 어느 것도 선진국에는 없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하지만 선진국에는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의 재벌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벌체제를 발전적으로 해체해 버리면 굳이 출자총액 제한 따위의 변칙적 규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재벌개혁은 이런 식으로 했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수술요법을 택하지 않았으므로 대증요법적인 조치라도 불가피했던 셈이다.

 

  재계는 출자총액 제한이 신규투자를 억제하여 경쟁력을 저해한다고 한다. 그러나 재벌기업들이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총수의 그룹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출자총액제한에 따라 보유지분을 처분하면 총수의 지배력은 다소 약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기업의 경쟁력과는 무관하며 신규투자를 저해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출자총액제한이 아니라 총수의 과도한 탐욕이다.

 

  이 참에 정부가 대오각성하여 재벌의 소유구조와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환골탈태시키는 방향으로 나가보면 어떨까. 불법.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엄정하게 단속하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분리시키며,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우리사주조합.기관투자가의 사외이사 추천제를 실시하고, 집단소송제와 단독주주권을 도입하면 재벌체제는 자연히 사라진다. 그러면 출자총액제한 따위를 둘러싼 논란도 끝난다.

 

  재벌개혁을 중도포기한 정부가 이런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불법을 저지른 삼성총수 문제도 겨우 세금 몇백 억 메기고 넘어가려 하지 않는가? 또 이제는 선거정국에 들어섰다. 민심도 중요하지만 돈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야당인들 다를 리 없다. 이렇다할 개혁비전도 내놓은 게 없지만 정권재탈환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무릇 역사는 지그재그로 발전한다. 시시껄렁한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동안 개혁이랍시고 설쳤다면 이제부터는 당분간 퇴행이 기다리고 있다. 출자총액 제한도 정부가 예외를 잔뜩 만들어서 빈 껍데기 규제로 만들기 십상이다. 정부와 재계가 적당히 짜고 치는 가운데 국민경제는 자꾸만 곪아갈 게 뻔하다. 하지만 개혁에 힘 모으지 못한 국민에게 이런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