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부실기업과 부실정권 (중앙일보, 2001. 5. 10)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22

 

부실기업과 부실정권 (중앙일보, 2001. 5. 10)

 

김기원 <한국방송대 교수.경제학>


 

  5조원이 넘는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채무의 조정문제가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채권단 내의 옥신각신도 해결된 듯싶다. 이리해서 하이닉스가 생기를 되찾고 다시는 국민을 불안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어둡다. 반도체 가격이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과연 정부와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고 있는 것일까? 채무조정의 열쇠인 외자유치는 순탄하게 성사될 것인가? 


  어쨌든 하이닉스는 적어도 현금흐름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당분간 지켜봐 주기로 하자. 그런데 오랫동안 질질 끌어온 현대건설.현대투신.대우차의 경우엔 자본도 다 까먹었고 매각 전망도 불투명해 우리의 가슴을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도대체 부실 처리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일까?


  원래 기업개혁의 핵심인 부실 처리는 미래부실과 과거부실을 떨어버리는 일이다. 미래부실의 해소란 기업의 투명 성.책임성.전문성을 강화해 부실의 발생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벌의 황제경영과 선단식 문어발 경영에 대한 개혁이 도중하차해 버림으로써 미래부실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고, 제2의 경제위기는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과거부실의 해소는 이른바 부실기업 정리 즉 부실기업을 청산하거나 재건하는 일이다. 이렇게 자원을 비효율적인 부문으로부터 효율적인 부문으로 이동시켜야 경제가 발전한다.

 

  다만 덩치 큰 기계설비의 용도전환은 용이하지 않으며 인간존재와 관련되는 노동력 이동은 고통을 수반한다. 이것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민주적으로 처리하느냐가 바로 구조조정 능력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3년이 지나도록 구조조정 타령을 들어왔건만 아직도 대형 부실기업 정리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물론 하이닉스나 현대건설 같은 기간사업체 처리는 대단히 신중히 해야 하며 불완전한 시장에 모든 걸 내맡길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지켜야 할 기본원칙은 있다.


  즉 정치적 고려 없이 냉정하게 회생가능성을 판단해야 하고, 공평하게 부실책임을 분담해야 하며, 지원하려면 철저한 자구노력을 전제로 정상적이고 투명한 방식을 동원해야 한다. 여기에 비춰볼 때 그 동안 정부의 부실기업 정리에선 원칙은 희미해지고 편법만 난무했다.

 

  자산.부채의 실사(實査) 이전의 무조건적 지원, 총수에 대한 미흡한 책임추궁, 회사채 신속인수 같은 요상한 제도의 동원을 보라. 이런 판에 상시퇴출 시스템인들 기대할 게 있겠는가.


  특히 요즘 와선 대마불사를 비롯한 개발독재시대 패러다임으로 아예 되돌아간 느낌이다. 개혁이니 뭐니 해봤자 잘 되지도 않고 인기만 떨어지니 차라리 익숙한 옛날 방식으로 복귀키로 작심한 모양이다. 그러나 예술의 복고풍은 아름답지만 경제의 복고풍은 끔찍하다. IMF사태가 복고풍의 파탄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정부의 행태에 이해가 가는 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자기 자신이 솔선수범해야 하고, 저항세력과 일전불사할 각오를 해야 하며, 억울한 희생자를 감싸줄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고급 옷도 입고 싶고 내기골프도 치고 싶으니 어쩌겠는가. 나름대로 애는 쓰지만 소심한 최고지도자에 소수파 집권당이라는 제약도 있다. 사회보장을 강화하긴 했지만 아직도 불충분하기 짝이 없다.

***복고풍式 해결은 안돼야

 

  이처럼 구조조정능력 즉 수술실력이 신통찮은 주제이니 괜히 칼 들고 설치기보다 영양제와 진통제로 때워보려고 결심한 것 같다. 그래서 더 유능할지 모를 다음 의사, 즉 차기정권에 수술을 떠넘기거나, 혹시 기적이 일어나 환자가 저절로 낫기를 기대하는 셈이 됐다.


그러나 한보처럼 정권임기 내에 수습불가능한 사태가 올 수도 있으며, 차기 집도의가 더 무능할 수도 있다.
부실기업을 부실한 정권이 제대로 정리하도록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기업과 국민이 스스로 개혁해 나갈 수밖에 없다. 우선 재계는 정부의 복고풍에 덩달아 퇴행적으로 설칠 게 아니라 선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아픔을 함께 하는 자세와 정권 선별력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