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계도 고해성사를 (대한매일 2002. 4. 26)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35

 

(대한매일 2002. 4. 26)

재계도 고해성사를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며칠 전 전경련이 차기정부의 정책과제를 발표하였다. 전체 13개 부문 중 이번에 정치, 행정, 사법, 공공·재정의 네 부문에 국한된 과제를 먼저 제시한 것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요세력인 재계의 이러한 행동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특히 대통령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라는 국가대사를 앞두고 뒷짐지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과거처럼 음성적으로 재계가 유력후보 쪽 줄대기에 급급하는 모습보다는 훨씬 모양새가 좋다.

 

  그리고 전경련이 제시한 정책들에도 새겨들을 부분이 없지 않다. 정치권이 고해성사를 통해 원죄를 떨쳐버리고 정치자금 관리를 투명화하자는 주장은 적극 수용할 만하다. 여기다 법적 선거자금 한도가 현실화되고 노사모와 같은 자원봉사조직이 활성화된다면 우리 정치권의 거듭나기도 꿈같은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청와대까지 휘말린 요즘의 비리사건을 보더라도 검찰총장 등 권력기관장들의 인사청문회 역시 선진화의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전경련의 이런 정책제기에 대해 다른 한편으론 불안하고 씁쓸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첫째로 재계의 이런 정치개입이 금권정치의 노골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재계는 이미 2000년 총선 당시에 후보들을 평가하겠다고 나선 바 있다. 또 몇 달 전에는 친기업적 대선후보를 가려내겠다고 공언하였다. 다른 사회단체의 발언권이 취약한 상황에서 이런 움직임은 재계의 일방적인 정치권 길들이기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음성적 뒷거래도 계속하면서 양성적 정책강요까지 보탠다면 결국 양수겸장을 통한 재계우위의 정경유착이 자리잡지 않을까 싶다.

 

  둘째로 정계와 관계의 부패를 초래한 장본인은 사실 바로 재계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성과 근절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재계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뇌물을 제공한 경우도 많으리라. 그러나 재계가 탈법과 특혜를 위해 정계와 관계를 오염시킨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재계도 고해성사를 자청하고 속죄를 빌어야 마땅하다. 카톨릭에서는 ‘내 탓이요’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정치판에서는 보스정치와 지역정치라는 전근대적 관행이 엷어져가고 있는데 재벌의 전근대적 황제경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정계와 관계도 거듭나야겠지만 재계가 먼저 거듭나면 오죽 좋은가.

 

  셋째로 재계는 수긍할 만한 정책도 제시했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도 내세우고 있다. KBS 등을 민영화해서 재벌이 언론마저 떡 주무르듯 하겠다는 것인가. 광고 때문에 언론은 지금도 재계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 여기다 소유권마저 넘기면 언론의 공공성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방송사 개혁도 필요하겠지만 민영화가 그 답은 아니다. 민영화천국인 영국에서조차 BBC는 공영방송임을 잊지 말자. 경제문제 등 앞으로 전경련이 내놓을 정책과제엔 이처럼 그저 낙후된 재벌체제를 끌고 가려는 주장들이 더 많이 포함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민주정치는 각 사회집단들의 이해가 골고루 반영되는 정치이다. 따라서 재계의 건설적 제안마저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와 행정이 재계에 예속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재계가 아닌 사회집단들의 정책적 영향력도 동등하게 키워야 한다. 그리고 재계는 자기혁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진정으로 선진사회를 지향하는 정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