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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9월 19일자 추억의 글: <황제경영의 허(虛)와 실(實): 현대차의 10조원 입찰>

동숭동지킴이 2022. 9. 19. 08:31
 
현대차가 한전부지를 10조 5500억원에 낙찰 받은 것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삼성전자가 5조원 안팎을 써냈다고 하니, 현대차로선 불필요하게 5조 원 이상을 써낸 셈입니다. 5조원이라는 숫자는 일반인이 체감할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이므로, 그게 현대차에 얼마나 부담이 될지는 현재 아무도 체감할 수 없습니다.
 
입찰이란 제도는 건설업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입찰 한번 잘못하면 회사가 휘청거리기도 합니다. 시쳇말로 "한 방에 훅" 가는 것이지요. 다만 건설업계 입찰에선, 이번 부지 입찰과는 정반대로 너무 낮게 입찰했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대건설이 IMF사태 이후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 것도,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던 시절인 1970년대 말 1980년대에 일감을 따내기 위해 중동에서 무리하게 낮은 가격으로 입찰했던 후유증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업이란 게 원래 위험을 감수해야(risk-taking)하는 법이고, 따라서 위험한 일을 했다고 무조건 비난받을 수는 없습니다. risk-taking 속에서 혁신이 나오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런 위험한 일을 선택하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차의 이번 입찰은 정몽구 회장이 실무진의 보고를 무시하고 강행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실무진에서는 4조~5조 원 정도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꼭 부지를 확보해야 겠다는 정회장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고, 또한 그 돈을 민간이 아니라 한전이 가져가는 것이니 많은 돈을 내더라도 좋은 일 하는 셈이라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애국심까지 발동했던 셈입니다. 아니 애국심을 내세워 실무진의 반발을 제압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한전부지가 10조 원의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특히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를 서울에 세우려는 현대차에게는 어쩌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의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혹시 그 막대한 부담으로 인해 현대차가 흔들리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현대차는 그냥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일종의 국민기업(national champion)입니다. 독일 사람을 만나도 삼성전자의 휴대폰과 현대차가 가끔씩 화제에 오를 정도입니다.
그런 현대차가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애국심을 그런 식으로 발휘할 게 아니라, 그 돈을 공장을 더 짓고 사람을 더 고용하는 쪽으로 쓰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에 재벌연구를 위해 현대그룹을 인터뷰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현대종합목재 간부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정주영 회장이 내린 판단들이 거의 다 옳았는데, 현대종합목재와 관련해 내린 사업 무렵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현대종합목재에서 실무진이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정주영회장에게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때 정회장은 1순위에서 5순위까지 안을 낸 것 중 그냥 형식상 붙여놓은 5번째 사업을 택했습니다.
그리해 업계에서 다른 업체가 추진해 성공을 거둔 1~2순위 사업은 정회장이 내팽개치고, 시베리아 벌목사업인가 하는 5순위 사업을 추진하는 바람에 결국 현대종합목재는 내리막길을 걷고 회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정주영 회장이 성공을 거둔 사업들은 정회장 자신이 전문적 판단능력을 갖춘 사업들이었습니다. 건설업이나 자동차사업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그런 전문분야가 아닌 사업에서, 특히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릿해지는 상황에서 독단적 황제경영이 계속되면, 회사가 타격을 받고 결국 국민경제에 부담이 됩니다.
정주영 회장이 정치사업(대통령 출마)에 뛰어든 게 바로 그 극단적 사례입니다.이게 제가 20년 전부터 말해 온 재벌체제의 폐해 중 하나입니다.(총수의 무능이라는 이런 폐해와 더불어, 총수의 부패, 재벌의 중소기업 억압, 재벌의 한국엘리트 오염이 또 다른 폐해들입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재벌총수들이 나이가 들거나 2~3 세로 가면서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IMF사태 때의 재벌들 '줄초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애당초 경영능력의 유전자라는 건 없는 법입니다.
좀 작은 재벌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삼성도 이건희 회장이 독자적으로 새로 추진한 사업들, 즉 자동차사업, 영상사업, 유통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삼성은 삼성전자가 워낙 튼튼하고, 조직이 그룹을 이끌어가는 회사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재벌의 황제경영에서 황제가 천재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엔(예컨대 세종대왕처럼) 의사결정의 신속성이라는 장점이 발휘되어 성장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경제가 catch-up(추격모방) 성장을 해오던 시기에는 꼭 천재적인 황제가 아니더라도 밀어붙이는 힘이 성공을 거두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추격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선진국들이 왕정이나 독재정권에서 민주공화정으로 옮겨갔듯이, 1인의 천재가 크고 복잡한 기업을 혼자서 리드하던 시대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현대차의 이번 의사결정이 부디 시대변화에 역행해서 범한 결정적 패착이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