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거듭나거나 물러나야 (2000/10/3) - 동아일보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08

 

거듭나거나 물러나야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반도체가격 하락, 유가급등, 대우차매각 실패로 우리 경제는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사실 여기에는 IMF증후군이라는 심리적 요인과 부실한 재벌 금융시스템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위기극복능력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과연 무엇 때문에 개각했는가하는 의문마저 제기되는 판국인 것이다.

 

  아직 새 경제팀이 들어선 지 2달도 채 안되고, 또 이들은 부지런히 언론에도 등장해서 뭔가 열심히 하는 듯한데 더 두고 보자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최근엔 큰맘먹고 40조원의 공적자금도 추가조성해서 2단계 구조조정에 착수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 경제팀보다 더 나은 팀을 쉽게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회의도 든다. 그러나 이들이 취한 일련의 행태를 보건대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우선 이들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자. 이들이 내세우는 바는 오랜 관료경험이다. 그런데 긴 세월동안 승승장구해 온 탄복할 만한 처세술은 갖고 있겠지만, 뭔가 개혁적인 사업을 벌인 적은 없는 듯싶다. 멀리는 그만 두고라도 바로 전 관직에서의 성적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또 이들이 들어설 당시 동교동계 등 정치권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나, 재계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인물을 택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청와대측 발언도 께름직하다. 개각의 면면에 재계가 안심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정부가 늘 재계와 싸움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아니 정부는 재계가 편안하게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의 곪은 환부를 방치해서는 안되며, 치료를 거부하는 재계의 엄살에 넘어가서도 곤란하다. 우리 경제를 안정적 선진구조로 환골탈태시켜야 비로소 국민과 재계가 진정으로 편안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혁성이란 이런 과정의 고통과 반발을 뚫고 나가는 비전과 결단력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현 경제팀은 구성되자마자 개혁을 힘있게 추진하기보다는 땜질처방과 개혁역행적 조치들을 내놓았다. 즉 현대의 부실계열사와 총수일가 퇴진 문제를 얼렁뚱땅 해치운 것이다. 또 생명보험사 상장과 관련하여 계약자 권익을 되찾아주는 기존의 정부안을 무시하고, 총수일가만의 이익을 위한 재계안에 솔깃해하는 발언들을 슬쩍슬쩍 흘렸다. 집단소송제 집중투표제 도입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드러내었다.

 

  뿐만 아니라 대우차 매각협상의 전개과정에서 갈팡질팡의 극치를 달림으로써 위기대처 능력마저 의심케 만들었다. 포드의 제안가격을 흘리는 등 국제거래의 ABC도 몰랐던 책임은 과거 금융감독원장에게 돌리기로 하자. 그런데 현 경제팀도 매각이 실패로 돌아가자 선인수 후정산이니, 10월 20일까지 결말짓겠다느니 하는 되지도 않을 발언들을 그냥 뱉어내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출범 시 자랑했던 경제팀 내부의 팀워크도 별로였다. 이전 팀처럼 회의석상에서 고성이 오가지 않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우차 재입찰에 현대가 참가해도 된다느니 안된다느니, 또 2단계구조조정에서 4대그룹에 대해 부채의 출자전환을 허용하느니 못하느니 하면서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내부조율은 거치지 않고 그저 언론플레이하기 바쁜 것같다.

 

  개혁은 대통령과 장관들의 언론플레이가 아니다. 이런 식의 언론플레이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개혁식상증과 개혁피로증에 걸려있다. 어지러운 말잔치보다 명확한 비전을 갖고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학계인사의 발언에 발끈하는 식으로 나올 게 아니라 개혁적 행동으로 국민이 신뢰하게끔 해야 한다.

 

  IMF사태가 끝난 듯싶은데 다시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대지진 뒤의 작은 여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장염 우습게 보다가 복막염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또 개혁의 기회란 자주 오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하고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현 경제팀은 거듭나야 한다. 만약에 그럴 자신이 없으면 조속히 물러나야 한다. 장관직은 화려한 경력쌓기용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