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개혁의 핵심고리(2000년 7월) - 세계일보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05

재벌개혁의 핵심고리

 

 

  다음 달 말부터 공정거래위원회가 4대그룹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착수한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는 재벌 3세들의 벤처기업과 관련한 변칙적 상속.증여를 집중조사할 모양이다. 이를 통해 재벌개혁이 제대로 마무리지어지는 길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 경제의 선진화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말자. 재벌개혁을 부르짖은 지도 이미 여러 해이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칼을 빼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불법적이고 변칙적인 상속.증여에 대해 국세청도 철저한 조사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왕자의 난에서 보듯이 전근대적 황제경영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복잡한 계열사 출자관계를 통한 선단문어발경영도 여전하다.


  애당초 재벌은 날아가고 정부는 기어가면서 뒷북만 치는 판국이 아니었던가. 재벌들이 새로운 부당내부거래나 탈세의 수법을 개발해 내서 나중에 사회적 문제가 되면 그제서야 정부는 허겁지겁 대비책을 마련하고, 재벌은 또 새로운 수법을 개발해 내고 하는 과정이 이때까지 반복되었던 것이다. 벤처기업과 관련된 이번 사안도 마찬가지이다.


  자 그렇다면 차라리 재벌개혁을 포기하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닌가. 정부는 정부대로 재벌개혁한다고 힘쏟고, 재벌은 재벌대로 재벌개혁 막아낸다고 힘쏟고 하는 일들이 모두 에너지낭비가 아닌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장에, 즉 재벌 하는 대로 맡겨버리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길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IMF사태에서 겪었듯이 재벌이 잘못되면 나라가 잘못되고 온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 대우그룹 하나 망했는데도 그 피멍이 아직껏 아물지 않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 모두가 재벌개혁에 동참하여 올바른 방향에는 힘을 모아주고 잘못된 방향은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벌 스스로 개혁해 가면 되지 않는가 하는 반문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에도 일리는 있다. 망하기를 바라는 재벌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냥 놔두더라도 재벌들이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깍듯이 재벌 스스로 개혁하기 힘들며, 또 그냥 놔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재벌개혁의 핵심고리이다. 정부가 여기에 힘을 집중하고, 또 철저하게 밀고 나갔더라면 이제쯤은 재벌개혁 타령을 안들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가. 그 답은 금년 들어 발생한 일련의 현대사태와 몇 년 전부터 진행된 삼성의 세습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어이없는 현대사태 속에서 많이 들은 것이, 어떠한 해결책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디 감히 왕회장에게 간언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왕조적 독재체제하에서 왕의 지위와 관련되는 일은 합리적인 방안이더라도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삼성의 3세 승계과정은 제대로 따지면 내야 할 세금의 1/1000도 안내고 일반주주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61억원으로 수조원을 만들어낸 과정이었다. 이런 일을 삼성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즉 총수의 왕조적 독재체제를 지속시키는 소유지배구조는 재벌 스스로는 개혁할 수 없는 법이다. 선단문어발경영 역시 이러한 총수체제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재벌의 소유지배구조에 개혁의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정부도 요즘 와서야 이 점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변칙상속과 관련된 부당 내부거래를 겨냥한 이번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까지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공정위 조사는 물론 철저하게 진행되어야겠지만 그것만으론 미흡하다. 국세청과 검찰이 나서서 불법.편법적인 상속.증여를 처벌해야 한다. 상속.증여와 관련된 재벌의 묘수개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도록 포괄적 상속.증여세제도 실시되어야 한다. 아울러 주요한 제2금융권을 재벌로부터 분리시키고, 기관투자가.우리사주조합.소액주주가 사외이사를 추천케 하며, 집단소송제와 단독주주권을 도입해야 한다. 제2차 금융개혁을 시작하는 김에 제2차 재벌개혁도 제대로 해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