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외환 전면자유화의 연기를(2000년 4월) - 한겨레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04

외환 전면자유화의 연기를

 

  지난 주말의 공청회에서 내년부터 정부가 실행하려는 2단계 외환자유화 조치의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작년 4월의 1단계 자유화에 이은 이번 조치에서는 내국인의 대외지불자유화, 대외채권 회수의무 폐지, 외국인의 원화 자금조달 제한 폐지 등이 그 주요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인도 밖으로 얼마든지 돈을 내보낼 수 있고 외국인은 한국 돈을 마음대로 빌렸다 바꿨다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앞으로의 추진과정에서 다소 제약이 남아 있겠지만 사실상 전면적인 외환개방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이런 자유화니 개방이니 하는 말 자체의 어감은 좋다. 그런데 현실도 과연 그렇게 좋은가. 


  위험천만의 말씀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외환위기는 근본적으로는 재벌시스템과 금융시스템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런 낙후된 시스템을 갖고 있는데도 함부로 대외개방에 나선 것도 중요한 계기였다. 그런데도 이런 쓰라린 교훈을 무시하고 오히려 개방을 더 가속화하려는 것은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라는 식의 무책임한 경제운영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되면 환투기를 비롯한 외화의 급격한 유출입에 의해 외환위기가 재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발전을 위해 필요한 금융정책과 외환정책의 독자성이 상실된다. 또한 합법적인 자본도피가 가능해지고, 삼성과 현대의 사례에서 드러났듯이 해외의 가공회사를 통한 온갖 변칙적인 거래가 급증할 수 있다.


  물론 경제의 개방과 외환시장의 활성화는 대세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추진해서는 안 된다. 국제금융시장은 대단히 불안정해져 있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민주적인 세계정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엠에프조차 전반적인 경제상황 특히 금융시스템의 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외환자유화를 추진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상황은 어떠한가. 외환보유고가 850억 달러를 넘어서는 등 외환위기로부터는 일단 벗어났지만, 구조적인 문제점은 그다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재벌시스템의 경우엔 재벌의 재편은 이루어졌지만 재벌개혁 특히 그 핵심인 소유구조와 지배구조의 개혁은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위기가 재발할 소지를 안고 있다. 


  개혁이 잘되었다던 금융시스템도 또다시 구조조정이 필요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2차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적자금을 퍼부어서 부실을 메워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건실한 금융시스템의 정착은 아직 한참 멀었다. 국제수지 면에서도 금년 들어 흑자폭이 급격히 줄고 있는 데서 보이듯이 다시 적자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개방을 서두르는 것은 개방의 전도사인 아이엠에프보다 오히려 한술 더 뜬 태도이고, 화약을 안고 불로 뛰어든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번의 일부 조치는 일본도 1998년에야 비로소 단행한 자유화수준이다. 우리보다 잘 사는 대만은 아직도 강력한 외환규제를 시행중이다. 우리는 내실보다 겉멋에 치중하는 잘못된 선진국조급증에 걸린 게 아닐까.


  정부는 이런 우려들에 대해 대외금융거래정보시스템을 비롯한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했으니 괜찮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유럽 선진국조차 1993년에 환투기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는데, 우리같이 부실한 내부구조로써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개방도 이미 과도한 수준이라는 지적도 많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재벌개혁.금융개혁을 마무리짓고 부정부패를 선진국 수준으로 축소시키고 최소한 아시아통화기금과 같은 지역적 안전장치를 갖춘 다음에 선진국 수준의 외환개방을 검토해야 한다. 개방조치는 한번 실시하면 돌이키기 어렵다. 다시는 내부개혁과 외부개방이 균형을 잃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