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개혁 제2라운드(경향신문 2000.4.26)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01

 

재벌개혁 제2라운드(경향신문 2000.4.26)

                       김 기 원(방송대 교수, 경제학)
            
   총선 이후 재벌개혁이 다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정부측에서는 대통령이 연내 재벌개혁 완수를 지시하더니, 공정위가 구조조정본부의 월권행위를 비롯한 부당 내부거래에 대해 일제조사에 나설 것임을 밝혔다. 국세청도 주요 재벌들의 탈세 특히 상속.증여와 관련된 총수일가의 탈세를 조사 처벌할 모양이다.


  한편 재벌측에서는 이에 대해 먼저 전경련회장단이 이른바 '골프장 선언'으로 응수하였다. 우리가 알아서 잘 할 테니 정부는 더 이상 간섭 말고 30대그룹 지정제도와 같은 규제나 풀라고 한 것이다. 그러다 정부의 태도가 예상보다 강경한 탓인지 대화로 해결하자고 하는 등 대응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재벌개혁 제2 라운드가 시작된 것일까. 아니면 총선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경제개혁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정국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정부측과, 한나라당 승리로 기세가 살아난 재계측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선거가 끝나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또 과거와는 달리 재벌개혁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는 현정부의 끈질김에 감탄을 금할 수 없고, 정권교체시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2년이 지나도록 정부와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재계의 처지에는 일말의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재벌문제는 재미나 감탄이나 안타까움만으로 지켜볼 일이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IMF사태에서 겪었듯이 재벌이 잘못되면 나라가 잘못되고 온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재벌개혁에 동참하여 올바른 방향에는 힘을 모아주고 잘못된 방향은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이런 게 제대로 안됐기 때문에 아직껏 개혁은 지지부진한데 일각에선 개혁 식상증마저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정부의 이번 개혁방향은 어떠한가. 얼마 전 현대사태에서 교훈을 얻은 덕분인지 총수의 지배체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할 것 같지 않던 불법적 변칙적 상속.증여 조사에 국세청이 착수한다는 부분도 지켜볼 만하다.


  재벌개혁은 진작부터 이런 방향이었어야 했다. 재벌개혁의 핵심이란 게 총수의 왕조적인 독재체제를 혁파하여 유능한 인물이 책임지고 경영하는 선진적인 책임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게 제대로만 되면 구조조정본부의 폐지니 뭐니 논란을 벌이지 않아도 되고, 30대그룹 지정제도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연 이런 본질적인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불안을 떨칠 수 없다. 만약 정부의 정책추진에 재벌 적당히 길들이기라든가 총선 패배국면 전환용과 같은 정략적 의도가 깔려 있다면 개혁은 말짱 헛일인 것이다. 삼성생명 건물에 세 들어 있고 그 부처의 퇴직 고위관료들이 삼성계열사의 사외이사로 취직한 국세청이 재벌조사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또 한나라당이 이런 재벌개혁에 협조해줄 지 알 수 없다. 원래 재벌과의 유착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다가, 대우사태로 국민에게 피멍들게 한 책임자가 반성은커녕 'IMF사태에 재벌은 책임 없다'고 주장하면서 정책간부로 앉아 있지 않은가. 많은 국민들도 IMF사태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리고 주식 같은 데만 몰두할 뿐 개혁엔 거의 무관심이다. 


  그러나 재벌개혁이 실패하면 국민경제의 선진화도 실패한다. 개혁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법이다. 흐트러진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하여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해야 한다. 고지가 눈앞인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구체적 개혁방안도 대폭 보완해야 한다. 


  즉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을 고객 돈으로 뒷받침해주는 주요 제2금융권을 재벌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감독강화만이 아니고 은행처럼 소유제한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또 기관투자가, 우리사주조합, 소액주주에 의한 사외이사 추천을 통해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집단소송제, 단독주주권, 포괄적 상속증여세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흐지부지 말고 정말 제대로 한번 해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