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현대사태와 재벌개혁 (한국일보 2000. 3. 28)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02

 

현대사태와 재벌개혁 (한국일보 2000. 3. 28)

 

  현대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갈등이 일단 마무리된 듯싶다. 엎치락뒤치락 하더니만 결국 정몽헌회장에게 그룹을 승계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처럼 흥미진진한 드라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성계의 후계를 둘러싸고 방원과 방석이 벌인 일대혈전에 못지 않은 구경거리이다.

 

  하지만 현대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현대가 잘못되면 나라가 잘못되고 우리도 그 피해를 겪는 것이다. 대우사태로 이미 피멍드는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현대가 이 모양으로 어지러우니 우리는 황당하고 참담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현대그룹은 정씨 일가의 호주머니 속 장난감이 아니다. 총수가 그룹재산에 출자한 부분은 5%도 안되며 나머지는 일반주주와 채권자의 몫인 것이다. 그리고 20만 명에 가까운 종업원도 현대의 중요한 이해관계자이며 협력업체 종사자까지 포함하면 현대는 국미전체의 기업인 것이다.

 

  그런데도 작금의 사태는 현대가 국민의 기업에 걸맞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구멍가게 식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적인 주식회사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주주총회나 이사회라는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봉건적인 세습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에서 전형적·집중적으로 표출되었을 뿐 여타재벌들도 마찬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이는 재벌의 왕조적 독재체제라는 전근대적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구조를 유능한 인물이 책임지고 경영하는 선진적인 책임전문경영체제로 바꾸는 일이 재벌개혁의 핵심이다.

 

  정부도 IMF사태 이후 재벌개혁 과정에서 빅딜과 같은 부차적인 문제에 주로 힘을 쏟기는 했지만, 책임전문경영체제를 위한 소유·지배구조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소액주주권과 사외이사제를 강화하려 했고, 작년 8·15 대통령선언에서 3대 원칙을 추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실행은 결국 극히 미흡한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바로 현대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선진 한국을 지향한다면 재벌개혁은 지금이라도 다시 고삐를 다잡아야 한다. 우선 소유구조 면에서 3대 원칙에서 밝힌 산업자본-금융자본 분리를 단행해야 한다. 이번 현대사태의 발단이 된 현대증권과 같은 증권회사를 비롯하여 생명보험회사, 투자신탁회사는 재벌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감독 강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은행처럼 소유제한 조치를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또 포괄적 상속·증여세제를 도입하여 세습분쟁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줄여 나가야 한다.

 

  지배구조 면에선 사외이사제의 실질화가 절실하다. 지금은 극소수 예외를 제외한 모든 기업에서 사외이사는 총수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경우처럼 이사회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사외이사가 경영을 견제·감시하고 제대로 조언할 수 있으려면 총수가 아닌 기업 이해관계자가 그를 추천해야 한다. 예컨대 유럽식을 응용하여 채권단(또는 기관투자가), 소액주주, 노조(또는 우리사주조합)가 가가 3분의 1씩 사외이사를 천거케 해야 한다. 아울러 소비자, 증권투자자, 보험계약자의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고 단독주주권도 실행해야 한다.

 

  재벌개혁은 재벌을 혼내주자는 게 아니다. 재벌을 선진기업으로 거듭나게 해서 국민 모두가 잘 살아보려는 일이다. 새로운 탄생에는 진통이 따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모두가 조금씩만 힘을 모으면 옥동자가 탄생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