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책임전문경영으로(2000년 6월) - 한겨레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04

 

책임전문경영으로

 

  현대의 총수일가가 동반퇴진을 발표했다. 이를 둘러싸고는 경영위기에 따른 작전상 후퇴, 정몽구씨측만을 몰아내려는 음모, 정몽준씨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비장의 카드 등등 해석이 분분하다. 게다가 정몽구씨측은 뭘 모르고 계속 뻗대고 있다. 같이 발표한 자구책도 믿기 어렵다. 하지만 총수 자진퇴진이라는 조처만은 재계의 6.29 선언으로 과대평가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1987년 6.10 항쟁으로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의 6.29 선언이 일단은 군사정권을 연장시켰지만 결국 문민정부로의 길을 터준 것과 비슷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현대의 총수들도 경영일선에 복귀하거나 수렴청정을 펼칠 가능성이 크지만, 일단 내뱉은 선언의 효과가 뭉개지지는 않는다. 6.29로 정치 근대화가 촉발되었듯이 현대의 발표로 재벌 근대화가 대세로 된 게 아닐까. 


  그러면 이제 재벌체제는 어디로 가는가. 과거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안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려워 말자. 재벌기업이 선진국의 대기업 형태로 바뀌어 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현대측 발표문에도 써있듯이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 즉 책임전문경영체제로의 길이다.


  일각에선 기아의 사례를 들어 전문경영의 한계를 지적하고, 오너경영이냐 전문경영이냐의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한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전문경영인의 진정한 의미는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 사장이라는 뜻이 아니다. 유능한 인물이 곧 전문경영인이며, 따라서 창업주인 오너는 당연히 전문경영인이다. 그러나 지금은 창업주라도 이미 판단력이 흐려졌고, 2세 총수들 또한 경영능력이 유전하는 게 아닌 탓에 대부분 별로 유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이제는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로부터 최고경영자를 충원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2세 중에도 유능한 인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엔 다른 사원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시켜 객관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 소위 시장의 검증을 받는답시고 함부로 총수자리에 앉아 기업을 망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재벌기업은 총수의 호주머니 속 장난감이 아니라 국민재산인 것이다.


  한편 전문경영은 선진대기업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주주.채권단.종업원 등 기업의 이해관계자에 대한 책임경영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관계자들이 경영진을 감독하고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책임경영에 경영의 투명성이 전제됨은 물론이다. 이게 바로 모든 선진국 대기업에 공통적인 책임전문경영의 의미다. 


  6.29 이후 문민정권의 등장에 5년이 걸렸으며, 보스정치나 지역구도의 극복은 아직도 멀었다. 재벌체제 근대화도 서막은 올랐지만 그 완성에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다. 재벌.정부.국민의 노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선 정씨 일가보다 유능하지 않은 총수들은 스스로 알아서 퇴진하면 좋지 않겠는가.


  정부는 책임전문경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현대처럼 총수가 경영에선 물러나지만 대주주로서 지배권은 보유한 경우에는, 가족의 기업지배가 미국보다는 많은 유럽 예를 응용해야 한다. 즉 기업의 이해관계자인 채권단이나 기관투자가, 우리사주조합, 소액주주가 사외이사를 추천케 하여 총수의 부당한 경영간섭을 배제해야 한다. 집단소송제와 단독주주권도 필요하다. 


  그러나 자진퇴진하지 않는 무능부패총수도 있을 것이므로 소유구조 개혁도 불가피하다. 재벌과 주요 제2금융권의 분리, 불법.변칙적 상속.증여의 바로잡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황제경영과 함께 재벌체제의 또 한 축인 선단문어발경영은 이상의 소유지배구조 개혁이 달성되면 그 폐해는 자연히 크게 줄어든다. 따라서 계열사관계는 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기되, 공정위와 소수주주권을 통해 불법을 막아내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