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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를 보며 한반도를 생각한다 (2)

동숭동지킴이 2013. 3. 18. 00:40

 

 

베네수엘라를 보며 한반도를 생각한다 (2)

 

 

지난 글에서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한국의 대안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낙후된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점도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그런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반도가 참고로 삼아야 할 부분도 언급해볼까 합니다. 그래서 차베스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확보하고 나아가 우리 입장에서 교훈도 얻어 보려는 것입니다.

 

 

(1) 경제적 측면

 

 

우선 경제적 지표를 짚어보겠습니다. 차베스 집권 이전 20년(1978~1998) 동안 베네수엘라의 1인당 소득은 약 20% 감소했습니다. 반면에 차베스 집권 이후 10년간 1인당 소득은 연평균 약 2% 증가했습니다.

 

 

경제전체의 성장률을 보면 차베스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 경제는 약 50% 성장했습니다. 차베스 집권 이전 20년 동안의 성장률 정체에 비하면 괜찮은 수치입니다. 게다가 차베스 집권 직후 반대파의 파업으로 석유생산이 평소의 10% 수준으로까지 떨어지면서 30% 가까이 경제가 수축된 시기를 제외하고, 2003년부터 계산하면 10년 동안 성장률은 연평균 5.6%였습니다.

 

 

특히 2003년부터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돌입하기 이전까지만을 계산하면 연평균 14%에 가까운 높은 경제성장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과거 한국의 60~70년대나 오늘날 중국보다도 더 높은 성장률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석유가격의 급등이라는 유리한 대외환경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석유가격 상승 자체가 차베스의 정책전환에 힘입은 바가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원래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국 기구인 OPEC회원국 중에서 미국의 요구에 가장 충실한 국가였습니다. 석유가격 유지를 위해 생산량을 줄이자는 OPEC의 약속을 빈번하게 어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차베스가 집권하면서 베네수엘라는 OPEC 회원국과의 신뢰를 회복하고 석유 감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경우, 석유 이권이 이라크 침공의 주요 원인의 하나였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석유대금을 달러가 아니라 유로로 받으려 함으로써 달러의 세계지배에 도전했다는 것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교수에게서 들은 바 있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석유이권에 민감하기 때문에, 차베스가 미국에게 눈의 가시처럼 여겨진 것이지요. (참고로 차베스가 암으로 사망하게 된 데에는 미국이 차베스가 먹는 음식에 발암물질을 주입했기 때문이라는 설(說)도 존재합니다. 영화 같은 이야기라 설마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차베스 같은 외향적인 정치인이 60세도 되기 전에 암에 걸리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 혹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경제성장율 다음으로 실업률을 보겠습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실업률은 8% 정도로 그리 높지 않습니다. 미국은 물론 유럽에 비해서도 그다지 높지 않지요. 집권 이전과 비교해서도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차베스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율이 높다고 합니다. 집권 이후 10%대이다가 베네수엘라의 통화가치가 떨어지면서 20% 수준까지 높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인플레이션이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집권 이전 10년 동안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50%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 현상이 우리나 서구보다는 문제가 심각하지만, 차베스 집권 이후로 상황은 개선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차베스 집권 이후에 국가채무가 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난 수준이 GDP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EU에 비해 훨씬 양호하지요. 게다가 그런 채무는 빈곤층을 지원하고 사회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늘어난 것들입니다.

 

 

그리고 차베스 치하에서는 빈곤 문제가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이건 Financial Times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1998년과 2011년을 비교하면 빈곤률은 50% 정도에서 30% 정도로 낮아졌습니다. 극(極)빈곤률은 같은 기간 동안 19%에서 7%로 하락했습니다.

 

 

그리해서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도 절반으로 줄어들고, 지니계수도 0.5에서 0.4로 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브라질을 제외한 많은 다른 나라에선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된 것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게다가 빈곤층들에게 ‘미션’이라는 이름하에 무료진료 프로그램, 무료교육 프로그램, 문맹퇴치 프로그램 등을 추진했습니다. 쿠바 의사 13,000명가량을 수입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재정수입의 50~60%를 사회복지 분야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30%도 안 되는 한국수준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높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낙후된 베네수엘라 형편을 고려해 볼 때, 경제개발과 사회복지의 관계에서 다소 후자에 치우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게 populist라는 비판을 받지요.

 

 

그러나 국가자원을 부유층이 흥청망청 낭비하거나 해외로 빼돌리는 것에 비하면 의료와 교육에 대한 지출은 너무나 생산적인 투자인 셈입니다. 베네수엘라의 과거 정권에 비해 차베스 정권은 이런 점에서 높게 평가받아야 할 진보적인 정권이었습니다.

 

 

차베스의 업적이 ‘라인강의 기적’이나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경제지표나 재정지출 양상을 보건대 적어도 과거 정권보다는 국민대중을 위하는 정권이었습니다.

 

 

독재자로서 개인적 타락의 모습을 보인 적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치부한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물론이고, 섹스파티를 벌인 이태리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비해서도 훨씬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2) 한반도와의 비교

 

 

한편, 차베스 정권의 모습을 보면 한반도에서 참고가 되는 부분들이 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로, 차베스는 기존의 정당체제를 돌파하면서 집권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주요 정당인 민주행동당, 기독교사회당, 민주공화연합이 1958년에 푼토피오(Punto Fijo)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게 과거 정당체체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법부, 군부 등을 포괄하는 공직을 비롯해 석유로 인한 수입도 주요 정당과 그 지지자들이 갈라먹는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정당 대통합인 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통합의 정치가 지난 대선에서 화두로 떠오른 바 있습니다. 물론 GH(박대통령, 박통, GH 등 여러 호칭이 있고 기자들 사이에선 미스박으로 부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일단 가치중립적인 GH로 부르겠습니다)는 그 통합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당선되자마자 정부조직법 야당을 무시하고 있기는 합니다. 아니 여당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 불통 지도자이지요. 그러니 통합은 물 건너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통합이 필요하기는 한데, 그 통합이 베네수엘라처럼 정치가들끼리의 나눠먹기 통합이라면 그것도 곤란합니다. 통합은 비생산적인 갈등을 지양한다는 것이지 생산적인 경쟁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자기들끼리의 이권 갈라먹기를 위한 통합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요.

 

 

그리고 통합은 통합을 통해 공통의 과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는 의미입니다. 즉 한국에서는 개혁과 진보를 위한 통합이 필요한 것이지요. 예컨대 재벌개혁, 노동개혁, 공공부문개혁 등은 어느 정당 단독으로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관료, 군대, 종교집단, 거대언론사, 사학집단의 경우도 너무나 강한 기득권을 갖고 있어서 여야정치권이 함께 추진해도 다루기가 만만찮은 문제입니다. 대북관계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이슈이지요. 이런 걸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안철수씨는 통합을 들고 나오긴 했는데, 정작 그 통합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정치혁신이라면서 ‘의원 숫자 줄이기’에 집착하고, '상대후보에 대한 공격 안 하기'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런 수준의 안철수씨가 대선경쟁에서 탈락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새누리당-민주당의 행태에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철수 현상이 생겨나긴 했습니다. 그러나 안철수씨나 안철수캠프는 차베스와 달리 양당체체를 돌파할 비전, 정책, 정치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안철수씨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철수씨는 차베스처럼 목숨 걸고 정치를 시작한 인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차베스처럼 나라를 어찌 이끌고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제대로 해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번 보궐선거에서 노회찬 의원이 부당하게 의원직을 상실한 노원병에 출마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누구에게나 출마할 자유야 있지만, 어느 구석에 감동이 피어나겠습니까. 비록 그가 국회의원이 된다 하더라도 그런 쪼잔한 계산으로는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파괴력이 생겨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새누리당-민주당 양당체제를 돌파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황당합니다. 우리의 새누리당-민주당 체제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안철수씨가 아니라 차베스 같은 인물이 나타나더라도 과연 그 체제가 쉽게 붕괴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과거의 양당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정당체제가 등장한 경우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이외에는 영국에서 보수당-자유당 체제에서 보수당-노동당 체제로 바뀐 경우 정도가 생각납니다. 좀처럼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듭니다.

 

 

한국에서도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진보-보수 구도를 만들 수 있을까 했는데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정주영-정몽준 부자의 시도도 실패했고, 2007년 문국현씨의 시도도 무산되었습니다.

 

 

지역구도 때문인지, 분단체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보듯이 원래 기존의 정당체제를 바꾸는 게 어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만약에 기존의 정당체제를 뒤엎는 게 불가능하다면, 새누리당-민주당 양당 체제를 내부수리해서 쓰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둘째로, 차베스가 거대수구세력과 상대한 방식을 따져 보겠습니다. 차베스는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지만,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즉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개혁 물결을 탄 것입니다. 그러니 쿠바의 카스트로처럼 반대세력을 정치적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당독재정치를 해온 게 아닙니다.

 

 

차베스에 비판적인 Financial Times는 라틴아메리카에는 두 개의 좌파 흐름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3월 9/10일자 What' left of the Latin left? 라는 기획기사 참조).

 

 

하나는 브라질 식의 좌파로서 브라질, 페루, 우루과이가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modern, open-minded, reformist, internatinalist”라고 합니다. 반면에 다른 하나의 좌파 흐름은 쿠바/베네수엘라 식 좌파로서 쿠바,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에쿠아도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가 여기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natinalistic, strident, closed-minded”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구분 방식에는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카스트로의 쿠바가 갖고 있는 커다란 차이를 간과(또는 일부러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쿠바의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나쁜(?) 놈으로 몰아붙이려는 의도가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베스는 카스트로와 친하게 지냈으며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쿠바의 의사들을 교환하는 식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 왔습니다. 특히 2002년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카스트로는 조언 등을 통해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차베스는 브라질의 룰라와도 상당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카스트로와 친하긴 했지만 카스트로와 같은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지 않았습니다(못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차베스의 속마음은 카스트로 방식을 원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쨌든 차베스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니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한국의 유신정권보다는 훨씬 민주적인 정권이었습니다. 때문에 계속해서 수구세력의 저항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수구세력은 쿠데타와 파업을 일으켰고, 한국의 조중동보다 더 강력하게 언론계를 장악하면서 차베스정권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차베스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에게도 참고가 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그런 저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니까요.

 

 

차베스는 다수 빈곤층의 압도적 지지를 토대로 수구세력과 싸워왔습니다. 반정부 쿠데타가 실패한 것도 다수 빈곤층들이 구름처럼 거리로 뛰쳐나와 대통령궁과 군사기지(차베스를 억류한 곳)를 포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빈곤층들은 차베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을까요. 차베스가 과거 정권과는 달리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석유산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외국자본이나 특권층에게서 빈민대중쪽으로 돌리는 정책을 밀고 나갔던 것이지요. 앞서 말한 무상의료 등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차베스의 이런 열렬한 지지층을 chavista라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차빠’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노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통은 노빠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차빠가 쿠데타로부터 차베스를 구출한 것처럼 노빠도 노무현을 의회쿠데타(탄핵)로부터 구출해 주었는데도 노통은 대통령직에 복귀하고서도 계속 헤매었던 것입니다.

 

 

노통은 대통령직에 복귀하고 의회에서 다수가 되고서 4대 개혁입법이라는 것을 추진했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등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수 대중의 삶과는 일정하게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노통은 예컨대 노인복지 문제나 신용불량자 문제 같은 걸 가지고 먼저 승부를 걸어야 했습니다. 이게 제가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라는 책의 1부에서 다룬 정책순서(sequencing)의 문제입니다.

 

 

그걸 통해 일단 대중의 지지를 충분히 확보한 연후에 그 힘으로 사학법과 같이 저항이 심한 부분을 치고 나가야 했습니다. ‘진보와 개혁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차베스는 이런 정치적 감각(자질)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미국을 비롯한 적대세력과의 싸움에서 버텨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 진보개혁세력이 정권을 다시 잡는 날이 온다면 차베스의 정치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구저항세력 중에 노조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2002~2003년에 차베스를 몰아내려는 연합세력에는 보수야당과 일부상층 장교집단과 거대언론뿐만 아니라 보수적 노동조합조직인 CTV도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에서는 경영진과 노조가 결탁해 특권을 누려 왔었는데, 그런 특권구조를 차베스가 해체하려 하자 노조가 경영진과 함께 반(反)차베스 전선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거대노조는 아직 이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공기업이나 거대기업 노조의 특권을 진보개혁정권이 바로잡으려 할 때 우리 거대노조들은 어떤 입장에 설까요.

 

 

우리 거대노조들의 타락상은 그동안 간간히 드러났습니다. 물론 일부에 국한된 현상인지 보편적인 현상인지는 아직 단정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회사측 카드로 룸살롱에서 술을 마신다든가, 채용 대가로 뇌물을 받는다든가, 하청업체로부터 돈을 뜯거나 노조 사업비에서 리베이트를 챙긴다든가 하는 사건들이 터진 바 있습니다.

 

 

또한 꼭 돈과 관련되지 않는 부당한 사례도 없지 않습니다. 같은 공장에 근무하는 비정규직들을 상전과 하인의 관계로 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 해고될 때는 아무 말도 안하다가, 자기들이 구조조정에 직면하면 결사투쟁을 벌이면서 마치 사회에서 가장 억울한 약자인 양 행세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한국의 노조들은 점점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서처럼 수구세력으로 커나갈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이걸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베스는 보수적 관료들의 저항을 피하기 위한 방안도 고민했습니다. 앞서 말한 갖가지 미션을 추진하면서 ‘미션 - 주민자치위원회 - 볼리비안 서클’이 삼위일체가 되어 주민참여형 개혁을 이끌어갔습니다. 관료조직을 우회한 것이지요.

 

 

한국의 관료들이 베네수엘라에서만큼 문제가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차베스 식의 주민참여형 개혁이란 것이 정말로 성과가 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보수적 관료조직의 문제를 극복해 보려고 노력한 자세는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은 선거 때 가서 갑자기 정책을 급조할 게 아니라 평소부터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애당초 정책콘텐츠가 없는 인물이 정치력 하나로 대통령이 되거나, 정치할 생각이 없던 인물들이 선거 앞두고 급작스레 불려 나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차베스와 미국의 관계 문제입니다. 차베스가 사망한 날 BBC는 2010년 6월에 방영된 ‘Hard Talk’ 프로(차베스 인터뷰)를 재방송했습니다. 거기 보면 차베스와 미국의 관계에 대한 주요한 지적이 등장합니다.

 

 

차베스는 클린턴 대통령과는 몇 차례 전화통화도 하면서 그런 대로 사이가 좋았는데, 부시가 등장하면서 베네수엘라-미국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했습니다. 2002년의 반 차베스 쿠데타도 부시 치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부시정권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지요.

 

 

다만 미국의 민주당 정권은 제국주의적이 아니고 공화당 정권은 제국주의적이라는 식의 단순논리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이 민주당의 케네디가 쿠바를 침공했고 베트남에서의 확전(擴戰)도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거꾸로 중국과의 관계 변화에 물꼬를 튼 건 공화당의 닉슨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클린턴 무렵에서는 대외정책이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달랐습니다. 이라크를 침공한 게 부시였고 만약에 고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라크 침공이 단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카터를 비롯해 고어도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차베스정권과 미국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부시 시기만큼 악화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관계가 악화되면서 차베스는 점점 좌편향되어 갔습니다. 처음에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카스트로가 미국의 제재 속에서 점점 소련과 가까워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차베스는 처음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앞의 BBC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처음엔 “독일식(Rhein 식) 자본주의”를 지향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2005년 세계사회포럼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소련 사회주의와는 다른 “21세기 사회주의” 운운하게 됩니다.

 

 

제 생각엔 이 무렵부터 차베스는 오버(over)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헌법을 뜯어고쳐 3선을 도모하고, 독재적 성격도 강화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렇다 해도 쿠바나 유신정권보다는 훨씬 민주적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빈민구제라는 진보적 정책에서 나아가 시장과 국가의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개혁적 정책도 추구해야 하는데, 그런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11장에서 말한 대로 진보정책은 X축에서의 이동이고 개혁정책은 Y축에서의 이동입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책 속에서는 시장과 국가의 효율성 증진이라는 관점이 자리 잡기 힘듭니다. 그러다보니 막대한 석유수입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초 식료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토지개혁 부분에서도 오버한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Zimbabwe의 토지개혁만큼 혼란스런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차베스의 이런 지나친 좌경화에는 미국의 영향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 정도 작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차베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포용정책이 아니라 억압정책으로 작동함으로써 차베스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부터 다소 멀어지게 한 것 같습니다.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제재를 통해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재를 가하면 더 적대적으로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대가 센 지도자일수록 특히 그렇지요. 차베스는 대가 센 지도자이니까 미국이 포용정책으로 나섰다면 더 온건한 정책을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차베스의 대미관계는 북한의 대미관계를 고찰하는 데도 참고가 됩니다. 클린턴이 차베스와 그런 대로 관계가 좋았던 것처럼, 클린턴은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2000년에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상당히 관계가 진전된 것이지요. 당시 북한에서 김정일의 개인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에 따르면, 김정일은 올브라이트를 통해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시가 등장하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하는 등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고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클린턴 정권의 기조가 계속되었더라면 얼마 전의 3차 핵실험에 이은 남북한의 긴장국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걸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주한 CIA 책임자를 거쳐 주한 미대사를 역임한 그레그(Gregg)가 북한의 외무성 제1부상인 김계관(현재도 대미관계에서는 실력자임)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김계관은 아니 미국은 정권이 바뀌면 대외정책도 바뀌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관성이 없으면 어떻게 미국정부를 믿고 외교협상을 벌일 수 있겠느냐는 한탄(비난)이었던 셈입니다.

 

 

민주주의 정권에선 정책이 바뀌기도 하며, 그게 민주주의의 약점이지만 장점입니다. 북한 같은 세습독재체제에선 일관성은 유지되지만 선대의 오류를 바로잡을 가능성이 극도로 제약되는 것이지요.

 

 

어쨌든 미국의 정책이 표변하면서 북한은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핵개발을 포기한 후세인 정권과 카다피 정권이 부시 등장 이후 침공을 당하거나 내란에서 패망함으로써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일은 사실상 물 건너 간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컨대 미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베네수엘라나 북한이 극단적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갈라질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태도를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북정책과 관련해선 한국이 미국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도가 과거에 비해 커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긴장-대결 국면에서 벗어나 ,남북한이 대화-협력 국면으로 가려면 미국에 대한 남한의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이 예상 외로 길어졌습니다. 차베스 이후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시절의 성과를 살리면서, 동시에 차베스가 오버했던 부분도 바로잡고, 나아가 차베스가 불충분했던 시장과 국가의 개혁 그리고 산업발전정책의 추구도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빈곤층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은 아니지만, 정당체제의 혁신, 수구세력과의 싸움, 대미관계 등에서 우리가 참고할 부분도 꽤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저는 베네수엘라 전문가가 아닙니다. 앞으로 전문가의 본격적인 글이 나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