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경제민주화' 낱말풀이 (한겨레 칼럼)

동숭동지킴이 2012. 9. 6. 06:29

(9월 6일자 한겨레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세상 읽기] ‘경제민주화’ 낱말풀이 / 김기원

등록 : 2012.09.05 19:14 수정 : 2012.09.05 19:14

 

이번 대선정국에서 경제민주화는 주요 화두의 하나다. 야당은 물론이고 5년 전 ‘줄푸세’의 시장만능주의를 내세웠던 박근혜 후보조차 입만 벙긋하면 경제민주화다.

 

하지만 화두란 게 으레 그렇듯이 경제민주화가 뭔지는 알쏭달쏭하다. 전경련 회장이나 여당 원내대표도 의미를 모르겠다고 내뱉은 바 있다. 박 후보나 그를 보좌하는 김종인씨가 이미지정치에 치중하면서 실제 경제민주화 방안을 제대로 펼치지 않으니 그 애매모호함은 더욱 심해졌다.

 

경제민주화란 말의 유래를 더듬어보면, 19세기 말 영국의 웨브(Webb) 부부가 산업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를 제기한 바 있고, 1차대전 후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경제민주주의(Wirtschaftsdemokratie)를 주창하기도 했다. 이런 서구의 경제민주주의는 대체로 기업의 소유나 경영에서의 노동자 참가를 목표로 삼았다. 종업원지주제나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가 그런 흐름에 따른 제도로 여겨진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점령군인 미군에 의해 단행된 재벌개혁, 농지개혁, 노동개혁을 경제민주화라 칭했다. 사회주의적 개량의 요소가 포함된 서구의 경제민주화와는 달리, 낡은 경제시스템을 자본주의 질서에 적합하게 변혁한 것이 일본의 경제민주화였다. 그리해서 일본의 전후 고도성장에는 이런 경제민주화가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요컨대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경제민주화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 1987년 헌법에 처음으로 경제민주화 조항이 삽입됐다고들 한다. 하지만 1980년 헌법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었다. 같은 해 제정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도 그 조항에 근거했다. 1987년의 변화는 경제민주화란 단어가 새로 들어간 정도다. 그리고 여러 증언에 따르면, 1987년의 헌법 조항은 김종인씨의 독창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야당의 초안에 원래 들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이후 정치민주화와 더불어 한편으로 노조 조직이 활성화되고 임금이 상승하는 등 경제민주화도 진전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재적 정치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재벌의 독재체제가 강화되고, 노동자들 사이의 불평등도 두드러졌다. 정치민주화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경제민주화의 새로운 과제, 즉 경제적 독재와 불평등을 시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필자가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라는 책에서 강조했듯이, 한국이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발전하려면 ‘진보↔보수’의 대립 축에선 진보 쪽으로 어느 정도 옮겨가고, ‘개혁↔수구’의 대립 축에선 수구를 물리치고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보↔보수’란 경제활동을 조절하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에 관한 구분이고, ‘개혁↔수구’란 시장과 국가의 질의 문제다. 복지가 국가의 상대적 비중을 키우는 진보를 의미한다면, 경제민주화는 시장과 국가의 질을 향상시키는 개혁에 해당하는 셈이다.

 

시장과 국가의 질을 높이려면 재벌 총수의 황제경영과 재벌그룹의 국민경제 독재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라 통치를 재벌이 함부로 주물러서도 곤란하다. 황제총수의 부패·무능이나 재벌그룹의 중소기업 억압 및 국정농단이 공정한 시장질서의 수립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에는 당연히 재벌개혁이 들어간다.

 

아울러 경제민주화엔 노동시장 개혁도 빠뜨려선 안 된다. 거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기업 근로자) 사이의 부당한 차별을 해소하는 게 바로 여기에 포함된다. 영세자영업자 문제 해결도 노동시장 개혁과 무관하지 않다.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이런 ‘경제민주화’ 낱말 뜻부터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