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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이모저모 (1) : 빨갱이(!?) 새누리당

동숭동지킴이 2012. 3. 15. 21:17

 

총선 이모저모 (1) : 빨갱이(!?) 새누리당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4.11 총선을 향해 각 당들은 자기후보를 마무리해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만도 터져 나오고, 답답한 느낌을 갖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공천에서 억울하게 탈락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MB 세상이 아닌 희망 찬 세상을 학수고대하는 분들이 특히 그렇겠지요.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한국의 정치 특히 선거판을 보고 있으면, 이모저모 재미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한국만큼 역동적(dynamic)인 나라는 잘 없기 때문입니다. 노통이 예선과 본선에서 승리해 가는 과정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폐족으로 몰렸던 친노가 부활하는 건 또 어떤가요. 어떤 드라마도 그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dramatic)한 나라입니다.

 

미국의 정치가 격렬한 대립양상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별로 재미있지도 않고 결과도 대체로 뻔합니다. 유럽이나 일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선진국일수록 모순이 덜 심각하기 때문에 정치적 대립양상이 좀 싱거운 것이지요.

 

그리고 중국 같은 신흥공업국가에선 모순이 심각하게 발전하고는 있으나 아직 정치가 민주화되지 않은 형편입니다. 그래서 보시라이의 해임 같은 권력투쟁이 베일 뒤에서 전개되고, 따라서 별로 재미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우리 정치과정의 흥미로운 측면들을 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본인은 공천에서 탈락했다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만, 과연 이번 선거로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하는 답답함이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비분강개는 가급적 삼가고, 여유를 조금 갖고 우리 선거를 음미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열정이 지나치면 지뢰밭인 선거법을 위반할 위험성이 있고, 또 여유를 가져야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냉철한 두뇌와 따뜻한 가슴으로”라는 구호는 선거에도 적용됩니다.

 

(1) 빨갱이(!?) 새누리당

 

오늘 버스 타고 가는 길에 빨간 색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이 내건 플래카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서 보니 그건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과 이념적으로 정반대편에 위치한 새누리당의 플래카드였습니다.

 

(추가: 이 글을 처음 올릴 시점까지 본인의 눈에 띈 새누리당 플래카드는 종로구와 성북구 것들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 다른 색깔을 사용한 플래카드도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일지라도 적극적으로 빨간색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본인의 논지는 통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어떻게 빨간 색이 새누리당의 색깔이 된 걸까요. 본인이 색맹이 된 것인가요, 아니면 전국민이 색맹에 걸린 것인가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색깔은 파란색이었습니다.

 

빨간색이 눈에 잘 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축구 때의 열렬 응원단 ‘붉은 악마’들이 입었던 옷도 빨간 색이니, 새누리당이 젊은이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빨간색을 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수구파들이 강력하게 설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빨간색은 혁명의 색깔이고, 북한의 소년단들이 걸친 스카프의 색깔도 빨갛습니다. 우리 정부나 보수수구언론이 북한을 나쁘게 묘사할 땐 빨간 색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런 속에서 새누리당이 빨간 색을 적극 도입한 것은 대단한 변화인지도 모릅니다.

 

버스에서 보니 이념상 가장 왼쪽에 위치한 진보신당의 플래카드는 1/3 정도가 빨간색 바탕이었고, 그 색깔도 ‘연한 붉은 색’이었습니다. 반면에 본인이 발견한 새누리당의 두 종류 플래카드는 3/4 정도가 ‘진한 빨간색’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이 훨씬 더 빨갱이인 것이지요. 새누리당의 (예비)후보들도 당 플래카드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주통합당보다는 빨간색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플래카드 색깔만이 아닙니다. 새누리당의 로고와 유니폼 색깔도 빨강입니다. 물론 플래카드나 로고, 유니폼 색깔만으로 당의 성격 변화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보수수구세력이기 때문에 색깔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는지 모릅니다.

 

‘동무’와 마찬가지로 ‘조선(朝鮮)’이란 단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일반인 특히 진보파에겐 사용이 꺼려지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 단어를 신문이름으로 삼은 조선일보는 보수수구언론의 두목입니다. 아이러니이지요. 이런 아이러니가 새누리당의 빨간색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새누리당의 빨간 색에는 조선일보의 ‘조선’이라는 이름 사용과는 다른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플래카드에 걸린 구호에 드러나 있습니다. 본인이 본 두 종류의 플래카드 중 하나에 “복지, 일자리,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새누리당을 좌경 빨갱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자리야 무색무취한 구호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복지나 경제민주화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수구 언론들이 좌파라고 몰아 부치던 바로 그 이념들입니다.

 

본인이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엄밀히 따지면 복지는 X축의 진보 즉 좌파에 해당하고, 경제민주화는 Y축의 개혁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새누리당이 이런 구호를 내건 것은 과거에 비해 좌(左)클릭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조선일보와는 다른 진짜(?) 빨갱이입니다. 따라서 ‘좌파 척결’을 내걸고 있는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은 가스통 들고 새누리당에 쳐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박정희도 해방 직후 한때 빨갱이 노릇 한 적 있는데 그 딸도 역시 빨갱이 본색을 드러냈구나 하고 말입니다. 본인 사무실 근처에 어버이연합 차가 상주해 있는데 가서 일러바쳐야 할까 봅니다.

 

세상이 어찌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요. 참으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너무 코미디 같이 보지 말고 좀 진지하게 따져도 봐야 하겠지요.

 

정치판의 색깔이 이리 바뀐 직접적 출발점은 2009년 경기도 교육감선거였습니다. 당시 김상곤 후보는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복지라는 주제가 선거의 쟁점이 된 것이지요. 그 공약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김후보가 결국 교육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포함해 한나라당이 다수였던 경기도 의회가 김교육감의 무상급식 공약실현을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도리어 민심의 역풍을 불러왔습니다.

 

그리하여 2010년 지자체 선거에선 여야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후보가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김교육감을 괴롭혔던 한나라당 도의원들은 우수수 추풍낙엽 신세가 되었습니다.

 

탄탄한 기반을 가졌던 김문수지사마저 힘겨운 선거를 치렀습니다. 민주당에게서 미움 받은 유시민씨가 아닌 김진표씨가 후보가 되었더라면 아마 김문수지사도 낙선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2011년 들어선 무상급식에 반대한 오세훈시장도 도중하차했고, 이어서 나경원후보도 나가떨어졌습니다. 이게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하여금 복지를 강조하는 좌클릭을 단행할 수밖에 없게 만든 정치적 조건입니다. 늦게나마 시대정신(Zeitgeist)을 깨닫게 된 셈이라 할까요.

 

물론 이런 정치적 변화 밑바닥에는 경제적 조건의 변화가 깔려 있습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성장이 복지문제를 은폐했습니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성숙으로 중성장·저성장 단계에 접어들면서 그에 걸맞은 복지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우리현실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셈입니다.

 

아울러 양극화의 심화 속에 재벌의 비리와 횡포가 노골화되면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강화되었습니다. 게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이 유행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니 우리 현실은 진보와 개혁이 불가피한 상황에 와 있고, 새누리당이라 하더라도 그런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선 살아남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각 정당들이 어느 정도 진정성을 갖고 얼마큼 진보와 개혁을 실천하는가입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혁명을 예방하려고 복지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도 혁명을 막기 위해 농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른바 혁명 예방적 개량입니다. 그에 따른 복지제도나 농지개혁은 자본주의가 건전하게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누리당의 좌클릭도 이명박정권의 747공약(空約)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갖고 실천으로 연결된다면 좋겠습니다. 새누리당이 만약 총선 후 다수당이 되면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앞장서 추진하고, 소수당이 되더라도 민주당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발목잡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연 새누리당이 그리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리 할 수 있었다면 이때까지 왜 못 했는가 하는 것이지요. MB 때문에 못 했다고 변명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MB정부에게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향해 강한 요구를 한 적도 없습니다.

 

박근혜의원은 2007년 대선을 위한 당내 경선 당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이 공약과 복지·경제민주화는 상충되는 느낌입니다. 세금을 줄여 복지재원을 어떻게 조달하며, 규제를 풀어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줄푸세가 원래의 소신이었다면 그걸 쉽게 바꾼다는 게 말이 잘 안 됩니다. 반대로 별다른 소신 없이 기회주의적으로 분위기에 편승해 줄푸세를 주장했다가 또다시 분위기가 달라진 것에 편승해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선거 이후에 그걸 제대로 실천할지 의문입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입니다.

 

또 새누리당의 비대위 위원으로 들어갔으며 복지개혁파로 알려진 김종인 박사가 맥을 못 추는 걸 보면 앞날이 뻔히 보이기도 합니다. 김박사 자신도 점점 맛이 가고 있는 듯합니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인사로 공천된 인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 모 학회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해 각 당의 입장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새누리당에서 펑크를 내는 바람에 결국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펑크 낸 이유가 관련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새누리당에 재벌개혁을 반대했던 전문가는 있습니다만, 개혁 쪽으로 방향을 틀 전문가는 없습니다. 그런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든 게 지금 상황입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정말 제대로 바뀐다면 좋겠습니다.

 

(2) 해적이냐 해군이냐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도 선거쟁점의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선정절차에도 하자가 있고, MB정부가 그걸 밀어붙이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미국 및 중국과의 관계에서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는 게 필요한지, 또 그 해군기지가 반드시 강정마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본인의 공부가 부족해 자신 있게 말할 형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해군기지 반대운동과 관련해서 통합진보당에 소속된 이른바 ‘고대녀’라는 김지윤씨의 ‘해적’ 발언이 보수수구신문을 통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보수수구신문이 이 사건을 선거몰이에 이용한 것입니다. 그녀는 해군 전체를 해적으로 비난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으나, 해군당국은 결국 그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렇게 고소까지 이른 사태를 보면서 문득 북한에서 일어난 해프닝이 떠올랐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한국인이 호텔에서 제공한 노동신문을 불경스럽게(?) 다룬 일이었습니다.

 

신문을 접으면서 거기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을 접어버린 것입니다. 사람 사진을 찍을 때 몸이 잘려버리면 기분 나빠하듯이, 위대한 령도자의 몸체를 잘라버리는 불경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잡아가지는 않았지만 좀 시끄러웠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북한의 난리법석은 왕을 신성시하던 봉건적 독재체제의 산물입니다. 정도는 차이가 나지만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존재하던 국가원수 모독죄도 같은 성격입니다. 해군을 해적이라 불렀다고 고소하는 것은 국가원수모독죄 비슷한 해군모독죄를 적용시키는 셈일까요.

 

미국의 토크 쇼를 보면 정치권이나 정부의 고위층들을 묵사발로 만듭니다. 한 마디로 “갖고 놉니다”. 우리 같으면 명예훼손에 해당되는 게 아닐까 하는 정도입니다. 독일에서도 콜 수상을 소재로 삼은 만화가 인기를 끈 바 있습니다. 선진국에선 공인이 되면 마구 비난받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만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명예훼손죄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그 죄로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공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조건 하에서만 비판이 허용됩니다. 국가원수 모독죄 같은 것 대신에 명예훼손죄가 언론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셈입니다.

 

해군 당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쯤 되면 김지윤씨 발언에 대해선 씩 웃고 넘어가는 대인의 풍모를 보여야 했습니다. 아니면 유감을 표명하는 정도에 그쳐야지요. 그걸 고소까지 하는 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MB정부 하에서 후퇴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그런데 해적 운운의 발언을 해적이라는 단어의 뉴앙스와 관련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해적이라 하면 한국 화물선을 납치한 소말리아의 해적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뉴앙스의 해적과 우리 해군을 등치시키는 발언이라면 물론 적절치 않습니다.

 

하지만 해적에는 캐리비언의 해적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낭만적인 해적도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해적은 해군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바이킹도 일종의 해군이 아닐까요.

 

특히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일종의 해군처럼 활용했습니다. 해적들이 약탈한 스페인의 보물들이 영국에 막대한 부(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또 유명한 해적 Francis Drake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의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가 싸울 때 스페인 함대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해적이 나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로빈훗 비슷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해적당(pirate party, Piratenpartei)이 최근 스웨덴에서 발족해 유럽 전역에 퍼져 가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시민운동의 발전형태의 하나로 해적당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몇 달 전 베를린 선거에서는 8%의 지지율을 획득해 베를린 의회에 진출했고, 어제 NRW주(州) 조사에서는 5%의 지지율을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도 해적당 결성 시도는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해적 전통이 없으니 의적당은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본인이 친구들에게 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판에 해군을 해적이라 불렀다고 한국 해군이 고소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세계에 퍼져 나가면 얼마나 국제적 망신일까요. 웃고 넘어가면 될 일을 정색하고 큰 싸움 벌이는 건 덜떨어진 사람들 행태입니다. 지금이라도 해군 당국이 어른스런 자세를 회복해 고소를 취하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상 줄입니다. 이야기거리가 생기고 시간이 나면 이 시리즈를 한 두번 더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