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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 번갈아 하기'는 어떨까

동숭동지킴이 2012. 2. 24. 16:20

 

“비례대표 번갈아 하기”는 어떨까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각 당에선 총선 공천 작업이 한창입니다. 일단 지역구 후보를 선출하고 그 다음에 비례대표를 뽑겠지요. 이번엔 각 당에서 좋은 후보를 많이 내어서 국회를 업그레이드(upgrade)했으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선생님 말씀대로 야당이 새누리당을 꺾어야 우리나라가 87년 체제를 극복하고 2013년 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지겠습니다만, 그에 못지않게 각 당 후보들의 자질이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이 승리하더라도 그 국회의원 자질이 신통찮으면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 시킬 능력과 의지가 부족할 테니까요. 그리고 새누리당이 패배하더라도 수구꼴통들이 국회에 강력하게 남아 있다면 막무가내로 설칠 테니까요.

 

그래서 좋은 자질의 국회의원을 뽑는 하나의 방안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임기를 2년으로 해서 번갈아 하는 걸 당의 공약으로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현재 법을 바꾸어 그걸 시행할 여유는 없으니까 각 당이 그걸 국민에게 약속하자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독일처럼 비례대표의 비율을 대폭 늘리는 걸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거기에 찬성입니다. 그래야 국회의원이 지역구 공사 따오기 같은 일 대신에 나라 전체 일에 신경을 더 쓸 수 있고, 선거 때 드는 자금 때문에 재벌이나 업자들에게 종속될 위험성도 적어지니까요.

 

다만 이런 방안 역시 4월 선거에서는 시간이 촉박해서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대신에 비례대표의 임기를 2년으로 하겠다고 약속해서, 2배의 인원을 비례대표 의원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각 당 모두가 이런 약속을 내세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지율이 떨어져 전망이 불투명해진 통합진보당부터 한번 이런 공약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통합진보당에선 희망자는 많고 자리는 제한되어 박 터지는 싸움이 심각할 테니까요. 민주통합당이나 새누리당이 해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참신한 약속은 지지부진한 통합진보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실제 독일의 녹색당은 처음 등장해서 한 동안은 이런 식으로 스스로 비례대표 의원의 임기를 제한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수구보수언론과 지식인들이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해 괜찮은 인물들이 정치세계에 들어서는 것을 방해해 왔습니다. 그리해야 기존 정치인들 끼리끼리 해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실은 정치의 세계엔 좋은 인물들이 많이 참가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만큼 정치가 중요하니까요. 또한 정치란 종합예술의 세계이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자질이 우수한 사람이 직업정치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례대표 2년제에 대해서, 그리하면 국회의원의 전문성이 약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 정당한 우려입니다. 2년 지나서 뭘 좀 알만 하면 그만두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예컨대 통합진보당이 6번까지 당선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7번부터 12번까지의 비례대표는 1번부터 6번까지 당선된 의원의 보좌관이 되는 것입니다.(물론 누구를 누구의 보좌관으로 할지는 서로 의논해야겠지요.) 기존에 좋은 자리를 갖고 있는 분으로 보좌관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하면, 그분에게선 비례대표 자격을 양보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받아놓으면 됩니다.

 

그 다음 2년 동안엔 7번부터 12번까지가 국회의원 자리를 승계 받습니다. 그리하여 1번부터 6번까지 국회의원이었던 인물들은 거꾸로 자기 보좌관이었던 인물의 보좌관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전문성 약화라는 문제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보좌관을 지냈던 인물은 의원과 같은 수준의 전문성을 기를 수 있으니까요. 사실은 보좌관이 국회의원보다 전문성이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쓸데없이 행사에 많이 참석해야 하니까요.

 

다만 한국과 같은 문화에서 국회의원과 보좌관이 2년 만에 자리를 맞바꾼다는 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2년 간 보좌관을 지냈던 인물이 국회의원이 되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 반대로 국회의원이 보좌관으로 강등(?)되는 걸 참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걸 못 참는 국회의원들은 보좌관 노릇을 안 하면 됩니다. 이리 하면 전문성 약화 문제도 피하면서 많은 좋은 인물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 구체적인 운용방안은 독일의 사례를 참고하면 되겠지요.

 

이 생각은 오늘 점심 먹으면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따라서 허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허점은 읽는 여러분들이 한번 따져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바쁘신 분은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본인의 학교에선 건물을 개축해서 몇 개월 후에 ‘민족 대이동’이 아닌 ‘교수 대이동’이 벌어집니다. 교수들이 새롭게 연구실을 배정받으니까요. 그런데 그 연구실 배정방법을 둘러싸고 작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각 교수의 연구실을 학교 행정당국이 강제로 배정하는가, 아니면 연구실을 학과별로 또는 교수별로 추첨에 의해서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뭐 이런 것까지 교수들의 의견을 묻는가 하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 연구실은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수들은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교수는 연구실이라는 성(城)을 지키는 성주 같은 존재입니다. 다만 신하가 없어서 고독한 성주이고, 그 때문에 교수 중엔 괴퍅한 인물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어쨌든 어떤 교수들은 연구실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기 때문에 연구실은 집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또 연구실에 따라서 햇볕이 잘 드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으며, 조용한 곳도 있고 시끄러운 곳도 있습니다. 한국 교수들은 전직도 잘 안 하기 때문에 한번 잘못 배정 받으면 수십년 간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논란을 보면서 교수들의 연구실도 5년 또는 10년에 한 번씩 추첨에 의해서 바꾸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관직을 추첨에 의해 결정하기도 했지요. 비례대표 의원의 2년 임기제도 이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여러 해 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의 일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로마에서 폼페이로 가는 중에 아말피 해안을 거칩니다. 아말피 해안은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라는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가 추천하는 최고의 여행지중 한 곳입니다.

 

개별여행이 아닌 그룹여행에서는 아말피 해안을 버스로 그냥 보면서 지나갑니다. 머물면서 찬찬히 아말피 해안을 즐기지 못하므로 20분 정도 차창 너머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버스의 어느 쪽에 앉느냐에 따라 해안이 눈에 잘 들어오느냐 그렇지 않는가가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본인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미리 정보를 입수해, 해안이 눈에 잘 들어오는 오른쪽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여행객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오른 뒤 얼마 뒤 가이드가 여행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앉은 자리에 불만이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씀을 하시고, 지금 말씀하지 않으면 나중엔 불만 제기하기 없기”라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가이드의 이런 질문이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다들 그냥 있었습니다. 프로 가이드는 이런 식으로 나중에 터져 나올지도 모를 불만을 사전에 제거한 것이지요. 본인은 정보를 미리 입수해 있었기 때문에 가이드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간파했습니다만, 좋은 자리를 확보해 놓은지라 아무 말 않고 가만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학교 교수 연구실 배정과 관련해 이 예전 일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만약 그때 여행객 누군가가 “가이드의 그 질문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든가 “나는 지금 자리가 없어서 왼쪽 좌석에 앉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아말피 해안이 잘 안 보인다더라.”하고 문제를 제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생각은 더 진전되어 그 당시 본인의 행동에 대한 반성에까지 나아갔습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좋은 자리 앉은 걸로 만족하고 왼쪽 자리 앉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한 5~10분 정도 보고 나서는 옆의 왼쪽 자리 앉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한번 해변을 보십시오.”라고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본인은 그 당시에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고, 이 아름다운 해안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때까지 그에 대한 반성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끼리 단체여행을 하면 서로간의 분위기가 딱딱한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이 자리를 양보했라면 아마도 마찬가지로 양보하는 다른 사람도 나타났을 수 있고, 그리 됐으면 여행객 사이의 분위기도 달라지고 가이드도 감동했을 것입니다. 아말피가 아무리 좋다한들 20분씩 안 보면 세상 큰 일 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 가진 자 또는 기득권자가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배려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 왔으면서, 정작 본인 자신은 이런 가벼운 배려도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 대한 반성도 이때까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참담한 위선이라면 위선이지요.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만약에 가이드에게 누군가가 본인이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아마도 가이드는 본인이 이제야 생각난 해결책을 그 당시에 제시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번갈아 보기’말입니다. 그들은 '프로'니까요.

 

'좋은 자리 번갈아 앉기'와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번갈아하기”도 아무도 제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혹시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면 이탈리아 가이드처럼 실행에 옮길지도 모릅니다. 특히 통합진보당에서 제일 먼저.

 

혹시 있을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말씀. 본인이 비례대표 한 자리 얻으려고 쓴 글은 절대 아닙니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본인은 정치인의 조건인 체력과 정신력이 신통찮기 때문에 그냥 교수만 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