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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변호사의 <운명>과 노무현정권의 정치력 문제 (6)

동숭동지킴이 2012. 2. 10. 11:13

문재인 변호사의 <운명>과 노무현 정권의 정치력 문제 (6)

 

본 시리즈의 마지막인 이번 글에서는 노정권 당시 진보세력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주요한 진보세력이라 하면 진보정당, 노조, 진보지식인, 진보언론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문변은 책 <운명>(257-262, 450-457쪽)에서 노정권과 진보세력이 충돌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면서 진보세력의 문제점을 ‘전략의 부재’, ‘근본주의’, ‘조직의 논리’, ‘조급함’ ‘강퍅함’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문변은 진보세력에 대단히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노정권에 참여했던 다른 분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는데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진보진영의 살기어린 공격에는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등에 비수가 꼽히는 느낌이었겠지요.

 

문변이 지적한 진보세력의 문제점 중 ‘전략의 부재’는 ‘실력 부족’으로, ‘근본주의’ ‘조급함’ ‘강퍅함’은 ‘전선치기의 과오’로, ‘조직의 논리’는 ‘특수이익집단화’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개념들을 중심으로 노정권 당시 진보세력의 행태를 짚어 보겠습니다.

 

노통이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2003년 2월 13일에 민주노총을 방문했을 때의 동영상을 우연히 본 바 있습니다. 노통은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지냈고 당시 참여정부 인수위원이었던 김영대씨 등과 민주노총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는 진보세력의 문제점이 단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가 민주노총에 들어서는데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이 피켓을 들고 윽박지르듯이 노통에게 몰려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이 있겠습니다만, 대통령 당선자가 대화를 나누러 온 상황이었습니다. 공식대화 석상에서 문제를 알리면 될 텐데 힘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노통이 회의석상에 들어서는데 민주노총 참석자들이 박수도 치지 않았고 일어서지도 않았습니다. 냉랭한 분위기였습니다.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다 할까요. 여야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미국 국회에서도 대통령이 들어서면 반대당 의원들도 일어나 박수를 칩니다.

 

뭐 박수 따위 시시껄렁한 것 가지고 시비를 거냐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진보세력이 노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같이 잘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고, 마치 적장을 대하는 태도 같았습니다. 노통이 성인군자가 아닌데 이런 대접 받고 어찌 기분이 좋겠습니까.

 

선거 때 민주노총은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고 노통과 권후보는 국민의 표를 끌어오려고 서로 다퉜으니, 적이라면 적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한나라당 후보보다는 노동계에 친화성을 가진 노통이 일단 당선됐으면 그를 활용해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킬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략전술이 부재했던 것이지요. 전략전술의 부재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정권의 문제점이기도 했으니, 이는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약점이었던 셈입니다.

 

어떤 진보세력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성이 덜한, 바꾸어 말하면 더 보수적인 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25년 전인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6.29 항복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되자, 여당 쪽에선 노태우씨가 후보로 나오고 야당쪽에선 김대중씨, 김영삼씨, 백기완씨가 출마했습니다.

 

이때 김대중씨측은 ‘비판적 지지론’, 김영삼씨 측은 ‘단일화론’, 백기완씨측은 ‘독자후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백기완씨는 나중에 사퇴했습니다만 김대중와 김영삼씨는 결국 힘을 합치지 못함으로써 노태우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 이후 ‘비판적 지지론(비지론)’은 엉뚱한 방식으로 진보파의 연대반대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선거에서 야권후보 단일화가 요구되면 비판적 지지하자는 거냐 하면서 연대를 거부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보파의 ‘비판적 지지론’ 비판은 사실은 ‘비판적 지지론’의 오류를 반복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게 무슨 알쏭달쏭한 말일까 싶겠지만 차근차근 따져 보겠습니다.

 

먼저 비판적 지지라는 용어 자체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김근태씨가 1987년 김대중씨를 지지하면서 퍼트린 게 이 말입니다. 김대중씨가 비판받을 부분도 있지만 다른 정치인 예컨대 김영삼씨보다 나으니까 지지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지지는 맹목적 지지일 수 없고 따라서 모두 비판적 지지입니다. 그러니 김대중씨에 대한 지지는 비판적 지지라기보다는 ‘상대적 지지’인 셈입니다. 진보, 보수란 건 원래 상대적인데 김대중씨가 김영삼씨보다 더 진보적이니까요.

 

여기서 문제는 선거라는 특정 정치국면에서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 아니면 당선 가능한 후보 중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 입니다. 1987년 당시의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찾는다면 백기완 후보였지요.

그런데 ‘비판적 지지론’은 이도 저도 아니었고 결국 국민대중을 분열시키고 군부세력의 집권을 연장시키고 말았습니다. 김대중씨도 회고록에서 이 부분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김대중씨나 그를 지지한 진보세력이 정말로 국민대중의 이익을 생각했다면 김영삼씨에게 양보해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군사정권 종식을 이룩했어야 합니다. 백기완씨도 그냥 사퇴할 게 아니라 몰려든 국민대중을 이끌고 양 김씨의 집으로 쳐들어가 국민대중의 압력으로 단일화를 밀어붙여야 했습니다.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툰 솔로몬의 재판에서 칼로 아이를 잘라서 반씩 가지라는 판결에 진짜 엄마가 양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더 진보적인 후보라면 바로 그 때문에 자기보다 보수적이지만 군부후보보다는 진보적인 후보에게 양보했어야 합니다. 자기 세력보다 더 중요한 게 국민대중이기 때문이고, 그게 솔로몬의 재판에서 보듯이 결국 아이를 되찾는 즉 국민대중의 지지를 얻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우를 봅시다. 2000년 대선에서 우리의 민노당 또는 진보신당 격이었던 진보파의 후보 랠프 네이더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며 선거를 끌고 나가 부시의 당선에 한몫 했습니다. 그 결과 대량학살의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고 부자의 세금은 줄고 서민의 복지는 악화되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파 영화감독인 마이클 무어는 이를 막고자 네이더의 양보를 받아내려 애썼습니다. 또 민주당에 대해 평소에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표적 진보파 지성인 노암 촘스키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박빙인 주에선 진보세력이 네이더가 아니라 고어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전략적 투표’를 거부한 네이더는 2000년 선거에서 부시 집권에 기여한 죄 때문에 자기 지지기반을 급속히 위축시켰습니다. 2000년의 290만표였던 득표수가 2004년엔 50만표로 급감한 것입니다.

 

한국의 진보세력 역시 네이더와 같은 과오에서 벗어나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야 비로소 민주노동당이 적극적으로 민주당과 단일화를 성사시켰습니다.

 

그래서 민주당도 성공했고 민주노동당도 이익을 많이 거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진보신당의 노회찬후보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의 한명숙후보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지요.

 

1987년의 비판적 지지파나 오늘날도 잔존하는 단일화반대 진보파는 국민대중이 아니라 당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집단입니다. 아니 결국은 네이더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기 당파의 이익도 망치는 어리석은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선거에서는 이제 진보파의 자세가 상당 정도 바로잡아 졌습니다만, 평상시 정치에서는 어찌해야 할지 가닥이 제대로 잡혀져 있지 않습니다. 노정권 당시 진보파의 문제점을 따져 보는 의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앞 글들에서 선거시기와 통치시기의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해서 논한 바 있습니다. 진보개혁파 사이의 올바른 연합정치를 위해선 선거시기에서는 단일화가 필요한데 통치시기에서의 연합정치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선거 때나 마찬가지이고 그 때문에 선거 이야기를 꽤 길게 한 것입니다. 즉 정파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대중의 이익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게 결국 진보파 정파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진보개혁파 전체로 볼 때 통치시기에서의 연합정치는 공동정부 형태로 나타나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장관직 같은 것들을 진보개혁파 사이에서 나누는 게 그 하나의 방식이겠지요. 실제 노통은 민주노동당에게 노동부장관 직을 제안할 생각도 있었던 모양입니다(<운명> 460-461쪽). 


이런 게 내각제 요소를 일부 도입하는 방식입니다. 혹은 한국노총이 통합민주당과 결합하듯이 통합정당 내부의 정파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정당으로 존재할 때의 문제는 사실 쉽지 않은데, 이에 대해선 밑에서 언급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보파는 실력이 부족합니다. 실력 부족은 이념의 혼란에서 기인하는 바 큽니다. 진보파 중에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주사파 이념이나 사회주의 혁명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거기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무엇을 대안으로 삼아야 할지에 관해 진보파 내에서 정식 토론도 잘 하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북유럽의 복지 모델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노정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들의 힘을 키워갈지 잘 모르게 된 것입니다. 목표가 혼란스러우니 구체적 정책도 취약하고, 다른 정치세력과 연합하고 싸우는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서 있을 턱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따져 보겠습니다. 첫째로, 진보정당의 경우를 보지요. 여기서 진보정당이란 노정권보다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이란 의미입니다. 노정권 당시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이었습니다.

 

민노당은 한 마디로 ‘전선 치기’를 잘 못 했습니다. 자신들의 주요 공격전선을 노정권과의 사이에 쳤던 것입니다. 물론 노정권은 권력의 일부나마 장악하고 있으므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노정권은 권력의 일부를 장악한 데 불과했습니다. 공고한 보수수구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훨씬 더 중요한 전선을 거의 망각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전 글들에서 밝힌 대로 노정권의 과오가 더 큽니다. 다만 민노당의 책임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노통이 탄핵에 몰릴 때나 전효숙씨의 헌법재판소장 임명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이 생트집을 잡을 때 민노당은 거의 방관했습니다. 천정배 법무부장관과 검찰이 맞부딪쳤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정권과 노조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시도한 바도 없습니다. 심지어 국회에서 한나라당과 공조한 적도 있습니다. 노통의 대연정 제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태였습니다.

 

아마도 민노당은 노정권을 찌그려 뜨려야 자신의 힘이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노정권과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 중에서도 민노당을 찍는 유권자는 극히 일부니까요.

 

그런데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에 대해 그놈이 그놈이라고 격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나치스의 집권에 한몫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듯이 노정권의 지지율이 높을 때 민노당의 지지율도 높아지는 비례관계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노정권과 민노당은 일반국민들이 볼 때 정도 차는 있으나 다 같은 좌파였습니다.

 

국민들이 인식하는 주요 대치전선은 ‘(노정권 + 민주노동당)/한나라당’이었던 것이지 민주노동당이 희망하는 바의 ‘민주노동당/(노정권+한나라당)’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은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과거 중국에서 여러 세력들이 경쟁할 때 원교근공(遠交近攻)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이라는 상이한 전략이 시행된 바 있습니다. 원교근공은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이고 국공합작은 항일전쟁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원교근공은 지리적으로 먼 세력과는 친하게 지내고 가까운 세력을 먼저 공략한다는 것이고, 국공합작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다투지만 일단 민족의 적인 일본과의 투쟁을 우선시한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패권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민족의 이익을 앞세웁니다. 민노당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했을까요.

 

물론 민노당이 무조건 노정권을 지지했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는 노정권의 2중대로 전락하는 것이고 국민대중의 이익에도 반합니다. 노정권이 잘못할 때는 공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노정권이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수구세력과 싸울 때는 열린 우리당보다 더 치열하게 그들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필요할 때는 ‘노정권의 2중대’가 아니라 노정권을 끌고 가는 ‘국민대중의 선봉대’가 되어야 했던 것이지요. 이게 ‘일면 투쟁, 일면 견인’ 전략입니다.

 

민노당이 성장하려면 열린 우리당을 욕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원보다 진정성과 실력이 앞서고 대중과 더 열심히 호흡하는 게 정답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노조의 문제를 따져 보겠습니다. 사실 노정권과 충돌한 주요 진보파는 민노당보다는 노조였습니다. 화물연대 파업과 철도파업에서 노정권은 처음엔 노조측 요구를 수용했습니다만,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추가하자 강경방침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전교조의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반대투쟁으로 말미암아 정작 중요한 교육개혁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진보파들은 흔히 두 정권 하에서 발생한 구속노동자 숫자를 제시합니다.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에서 그 숫자가 각각 1,973명과 632명이었는데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에서는 892명과 1,052명이었습니다.(물론 이 숫자들은 구속자 숫자고 그 중 상당수는 곧 풀려 나왔습니다.)

 

이 숫자로 볼 때 김대중-노무현정권이 김영삼정권보다 악독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화물연대파업이나 철도파업에서 보듯이 노조는 두 정권에 대해 더 많은 걸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겠나 하고 기대했던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충돌이 더 많았던 것이지요.

 

이명박정권에선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충돌이 적었던 것도 그걸 나타냅니다. 노무현정권기 2003-2005년의 노사분규는 매년 3백-4백건이었으나 이명박정권에선 100건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노정권이 원래부터 노동자에게 악독하게 굴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사이가 아주 나빠졌습니다. 여기에는 노정권의 잘못도 있습니다. 일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에서 김주익, 곽재규씨가 크레인에서 몸을 던졌을 때 노통은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릅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주는 그런 식의 표현보다는 예컨대 “죽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자”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아니면 노통은 굳이 이 사안에 언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실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하면 될 일입니다.

 

이런 실언이 나오게 된 데는 노통의 누적된 짜증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노통은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에서 배달호씨가 분신자살했을 때엔 “사측이 적극 나서서 포괄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노동계에 우호적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화물연대파업과 철도파업을 거치면서 “이거 너무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걸로 보입니다. 그래도 노통은 참을성을 더 가졌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노통 같이 격정적인 인물은 참을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걸 참모들이 보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노통은 진보정책보다 개혁정책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정치개혁이니 사법개혁이니 사학개혁이니 하는 것들입니다. 좌파정권이라는 보수수구세력의 공격에 휘둘려 그 덫에 갇힌 탓입니다. 때문에 진보에 더 중점을 둔 노조와 어긋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노정권은 대중의 지지가 높은 정책(진보정책일 가능성이 높음)을 먼저 시행하고 그것을 통해 확보한 동력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순서(sequencing)라는 문제에서 노정권은 헤맸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정권과 노조 사이의 관계 악화엔 노조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밀어붙이기만 하면 다 얻을 수 있는 걸로 착각하는 전략부재가 화물연대파업과 철도파업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사태를 파악하는 실력이 없었던 셈입니다.

NEIS 투쟁도 교육개혁 과제들 사이의 경중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심한 실력부족의 표출이었습니다. 실제 NEIS가 시행되고 나서 전교조가 우려하던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습니다.

 

또한 전교조의 교원평가 반대투쟁은 대중과 유리된 전교조의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학부모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교원평가제를 무조건 반대할 게 아니라 “교육발전에 정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제대로 교원평가제를 해보자”고 오히려 공세적으로 나섰으면 전교조에 대한 국민인식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결국 교원평가제를 저지하지도 못하면서 여론만 나빠졌습니다.

 

전교조보다 훨씬 한심한 공장노조의 작태는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노조 간부들이 취업희망자를 상대로 뇌물을 받는다든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신나가 난무한다든가 하는 게 그 대표적인 추태였습니다.

 

사태를 잘못 인식하거나 과장하는 일도 노조들에게 많았습니다. 예컨대 NEIS의 악영향을 전교조가 잘못 판단한 것뿐만 아니라, 노정권 후반부에 제정된 비정규직법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되었다는 비판도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1987년 이후 한동안은 노조가 경제민주화의 견인차였습니다. 하지만 거대기업 정규직 노조원과 중소기업 노동자(및 비정규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구축되면서 노조 특히 거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점점 변질되어 갔습니다.

 

북유럽에서는 노조의 조직률이 70% 정도로 대단히 높은 수준입니다. 따라서 노조는 공익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노조조직률이 10% 수준인 한국에서 노조는 올슨(M. Olson)이 말하는 특수이익집단(special interests organization)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익집단화한 한국의 노조는, 자본과 권력의 횡포를 견제하는 진보세력인 면을 아직 갖고는 있으나 자신의 특권을 지키려는 수구집단적인 면도 동시에 보이고 있습니다. 수구-진보파인 것이지요. 여기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 노조 특히 거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한국사회가 바람직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로, 진보지식인과 진보언론의 경우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노정권 하에서 진보와 개혁을 가능한 한 확대발전시키려 한 진보지식인도 있었습니다만, 아예 노정권과 적대적 자세를 취한 진보지식인도 있었습니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최모 교수와 손모 교수입니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비판하면서 날카롭게 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명망성 때문에 진보언론들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진보파들의 신자유주의 타령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선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선 최교수의 구체적 사례만 살펴보겠습니다. 이 분은 김대중 정권 하에선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내셨는데, 김대중 정권과 성격상 별 차이가 없는 노정권에 대해선 증오라고 느껴질 정도의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한때 언론에서 진보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노통이 직접 한겨레에 글을 써서 그 논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향을 표명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최교수는 노통은 참여하지 말라고 했고, 한겨레도 부담스럽다고 거절했습니다.

 

대통령이 논쟁에 참여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논쟁을 억압하는 것도 아닌데 최교수나 한겨레나 참으로 답답한 행태를 취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함께 논쟁하는 모습은 얼마나 소탈한 모습이고 그런 나라는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요.

 

노통은 억울해서인지 청와대 국정 홈페이지에 자신의 글을 올렸습니다. 본인이 보기엔 별로 수준이 높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통은 그렇게 학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쓰고 싶다는 대통령의 발언권을 최교수가 억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노통 말기 대선국면이 되자 노정권이 지지를 받지 못하면 이명박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최교수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의 정치적 효과를 무시한 발언이었습니다.

 

정치학 교수가 자신 같은 인사의 말이 갖는 정치적 효과를 모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게 우리나라에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습니다.

 

최교수나 손교수는 노정권이나 이명박정권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명박정권의 문제점이 심각하게 드러나면서 손교수는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는 했습니다.

 

최교수는 노정권에 대해 경향신문에서 ‘사이비민주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에 대해선 같은 신문에서 ‘보수이지만 민주주의’라고 했습니다.

 

두 정권 다 사이비민주주의라고 했으면 일관성은 유지됩니다만, 그렇지 않은 최교수의 발언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노정권 때와는 달리 최교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선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분이 한국의 대표적 진보지식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또한 노정권에 비판적인 진보지식인들은 주로 비판만 할 줄 알았지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일례로 노정권이 쌍용차를 해외매각했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했다고 비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놓는 경우는 보기 힘듭니다. 그런 대안을 제시하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하니까요. 노정권만이 아니라 진보지식인도 실력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언론들도 최교수만큼은 아니지만 노정권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갈팡질팡 했습니다. 노정권과 한나라당이 대치하고 있는 국면에서도 제대로 한나라당을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용언론으로 규정받지 않을까 하는 콤플렉스 때문이지요. 콤플렉스는 실력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또 실현역량이나 진실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채 원칙에만 집착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이나 천성산터널 문제 같은 게 그런 사례입니다. 진보파 모두가 실력이 없으니 진보언론만 특별히 나무랄 일은 아니긴 합니다.

 

그리고 노통 퇴임 후에 일부 비리가 검찰을 통해 흘러나오자 진보언론들은 살점을 후벼 파는 식으로 무섭게 노통을 공격했습니다(<운명> 400쪽). 도대체 이런 사안이 터지면 검찰 받아쓰기를 할 게 아니라, 따로 취재도 해봐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전에는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보수수구파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흔히 비판합니다만, 진보언론들도 나만이라도 살고보자는 마찬가지 행태를 보였던 셈입니다. 편들기를 하지 않고 공정한 언론의 자세를 지키는 것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취재도 하지 않고 함부로 써대는 진보언론들의 행태는 격하게 비판하자면 비겁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작년의 곽교육감 사건에서도 한동안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검찰 받아쓰기를 계속하면서 기초적인 사실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퇴하라는 사설들을 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선 수구보수파나 개혁진보파나 천박하기는 매일반입니다.

 

옛날 일본어 공부를 시작할 때 읽은 오다 노부나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릴 때 오다 노부나가 패거리가 다른 어린이 패거리와 돌팔매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때 상대편은 부상자가 생겨도 그냥 두었는데 오다 쪽은 부상자를 치료해 가면서 싸웠습니다. 이걸 보던 어른이 “아, 오다 편이 이기겠구나” 했습니다. 결과는 예측대로였습니다.

 

이념과 목표가 가까운 같은 편이라 해도 무조건 감싸는 이른바 진영논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같은 편을 일회용 반창고 정도로 생각하는 집단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요 전선과 부차 전선을 구별해야 하고 같은 편을 공격할 때도 그게 국민대중을 위하는 것이어야지 자기 당파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문변의 말대로 다 합쳐도 소수를 넘지 못하는 진보개혁진영조차 힘을 모으지 못하고 분열했던 게 노정권 시대의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운명> 450쪽). 여기에는 노정권 자신의 책임이 일차적이지만 진보세력 전체의 책임도 만만치 않습니다.

 

2012년의 선거를 지나 다시 진보개혁세력이 정권을 잡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 된다면 진보개혁진영 모두 노정권 시대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이 연재물을 쓰게 된 배경도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