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바람직한 교체방식은 (창비주간논평)

동숭동지킴이 2011. 12. 14. 16:16

<창비주간논평>과 <프레시안>에 실린 글입니다.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바람직한 교체방식은

 

김 기 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여러 재벌에서 3세 총수로의 경영권교체가 진행 중이다. 연말 인사철을 맞아 LS, 한국타이어, 한화 등에서 3세들이 승진 러시를 보이고 있다. “부자 3대를 가지 않는다.”는 옛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를 잘못하면 덩치 큰 재벌일지라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1997년 IMF사태를 전후해 30대 재벌의 절반가량이 도산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무능한 총수가 그룹을 물려받은 경우였다.

 

삼성그룹이 이번 인사에서 이재용사장과 이서현부사장의 승진을 미룬 것은 이런 쓰라린 과거를 교훈 삼은 신중한 자세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다. 이재용사장 말대로 삼성은 구멍가게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진 여부와 무관하게 이건희회장의 자녀들은 각자 회사에서 이미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회장이 앞으로 자녀들 중 어느 쪽에 계열사를 더 많이 몰아줄까 하는 판단만이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가운데 경영권과 관련한 근래 이회장의 행보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작년 말부터 이학수씨 등 비서실(구조조정본부) 간부들을 숙청하고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점이다.

 

숙청 이유로 부정 운운하지만 그들은 사실 이회장 일가에게 떡 만들어 주면서 떡고물 챙긴 정도다. 삼성 특검과 재판에서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이회장 일가의 비리에 비하면 그들의 비리는 새 발의 피리라.

 

주주와 채권자를 비롯한 국민의 재산인 삼성을 혹시 이회장이 자기 멋대로 해도 되는 사유물처럼 생각하고, 이학수씨 등이 자기 사유물에 흠집 냈다고 분노한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건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다.

 

필자가 이학수씨 등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이회장 일가를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고, 또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오염시켜 나라를 함부로 주물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전문경영인들로서 그룹을 통괄하고 총수의 잘못된 판단을 걸러주는 역할도 했다.

 

그런데 이회장의 친정체제는 후자의 긍정적 측면은 말살하고 전자의 부정적 측면만 온존시키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만약에 그리 되면 삼성이라는 기업의 장래만이 아니라 나라경제도 위태롭다.

 

기업권력 즉 경제권력의 교체란 본디 쉬운 일이 아니다. 포드자동차의 창립자인 헨리 포드는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져 회사에 큰 장애가 되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회장도 1990년대 이후엔 대통령 출마 등 이런저런 판단착오를 일으켰고 막판엔 그룹승계와 관련해 오락가락하기까지 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선진국에선 전문경영체제가 발전한 것이다. 창업주는 적당한 시점에서 은퇴하고, 창업주의 2세와 3세로 가면서는 대체로 대주주의 지위에 만족할 뿐 직접 경영일선에 나서지 않는다. 그래야 회사가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본주의 역사가 짧아 아직 전문경영체제가 자리 잡지 못했다. 유한양행을 창립한 유일한 선생처럼 자식의 경영능력이 신통치 않자 전문경영체제를 갖추고 자신도 일찌감치 물러난 경우는 예외적인 선각자에 해당한다.

 

중소기업에선 기업에 대한 애착이 중요하고 비전(秘傳)의 노하우 같은 게 있을 수 있어 자식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합리성을 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중소기업이 이리 해서 망하더라도 나라경제에 큰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업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 기업에 대한 애착보다 경영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게다가 경영능력의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재벌들은 왕조적 세습체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식에게 경영권을 넘기려고 탈세나 물량 몰아주기 등 갖가지 꼼수를 다 부리고 있는 것이다.

 

재벌총수가 이렇게 경영권에 집착하는 데는 권력욕 같은 인간본성도 작용하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막대한 비자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과 법원이 이런 불법행위에 대해 엄단한다면 우리의 재벌경영도 선진화된다. 기업이 흔들릴까봐 운운하면서 솜방망이 처벌을 해왔는데, 바로 그 기업 발전을 위해서도 검찰과 법원이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아울러 총수 스스로도 사고를 전환했으면 좋겠다. 특히 재계를 이끌고 있는 삼성부터 이참에 경제권력 교체의 모범을 보여주면 어떨까 싶다. 이회장도 미국의 카네기나 일본의 혼다처럼 존경받는 기업가로 역사에 남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 되면 다른 재벌도 따라 가게 되어 나라가 업그레이드된다.

 

이회장은 자신의 ‘등극’ 과정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다. 형제간에 분쟁도 벌어졌고, 부친의 비서실장이던 인사가 이회장의 자질을 우려해 등극에 제동을 걸려고도 했다. 이와 같은 업보를 씻고 간다는 차원에서도 이회장이 바람직한 경영권교체를 실현했으면 좋겠다.

 

이재용사장은 독자적으로 벌인 e삼성 사업 등의 실패로 경영능력이 의심스러운 형편이니, 이회장이 카네기나 혼다처럼 아예 세습경영에서 탈피하는 게 최선이다. 그게 힘들다면 차선책으로 그룹회장과 비서실 및 계열사사장 사이의 권한배분을 혁신해야 한다.

 

삼성은 황제경영이긴 했지만 그동안 다른 재벌에 비해 총수의 경영간섭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조직의 삼성,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이 그걸 나타낸다. 이런 경영위계제(managerial hierarchy)의 발전이 삼성을 일등으로 만든 동력이다.

 

창업주에서 2세와 3세로 넘어가고 그룹이 커갈수록 경영위계제가 고도화돼야 한다. 그러려면 총수의 간섭은 줄이고, 대신에 계열사 사장의 권한은 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비서실은 불법과 비리에서 손 떼고 계열사를 통괄하는 일에 역할을 집중하되 권한은 축소돼야 한다.

 

이게 총수-비서실-계열사의 새로운 삼각편대다. 이런 식으로 경제권력을 배분하는 게 예전에 삼성이 참고한 바 있는 스웨덴의 거대그룹 발렌베리 방식에 가깝다. 아울러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한 자식에게 몰아주지 않는다면 나라로 볼 때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의 견제와 균형도 어느 정도 달성된다. 이회장의 결단이 기다려진다.

 

경제권력의 바람직한 교체방식은 정치권력 교체에도 해당된다. 기업을 발전시킬 전문능력을 보유한 경영자에게 경제권력이 넘어가야 하듯이, 국가를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끌고 갈 능력이 있는 인물에게 정치권력이 이양돼야 한다. 다만 기업은 1원1표의 원리에 의해 주주총회에서 권력이 교체되고, 민주국가에서는 1인1표의 원리에 의해 선거에서 권력이 교체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기업이 파산하거나 국가에 혁명이 일어나면 이런 원리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 겉으론 그 원리가 적용되는 듯하지만 실제론 무시되는 경우도 있다. 재벌에선 계열사 출자라는 꼼수로 실제 지분이 얼마 안 되는 총수가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독재국가에선 선거절차란 있으나마나가 아닌가.

 

북한의 정치권력은 남한의 재벌과 마찬가지로 세습이라는 전근대적 형태로 이양이 진행되고 있다. 재벌의 3대 세습처럼 북한권력도 3대 세습이다. 만성적인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과, 구매력 기준의 1인당 소득 면에서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남한 사이에 이런 닮은꼴도 있는 셈이다.

 

재벌들은 비자금 챙기기가 경영세습의 주요 요인인데 반해, 북한에선 정치 불안에 대한 우려가 정권세습의 주요 요인이 아닌가싶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마오쩌둥에게서 권력이 넘어갈 때 발생했던 노선변경이나 혼란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북한은 노선변경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중국은 정권교체 시 다소 혼란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등장한 지도부가 개혁과 개방으로 나아가 북한 인민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중국처럼 발전하길 원한다면 북한정권은 3대 세습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남한이나 미국 역시 북한의 중국식 발전을 원한다면 북한정권의 불안을 덜어줘야 할 것이다.

 

남한에선 내년 선거로 이명박정권이 교체되며, 대망의 2013년 체제가 논의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과 다른 차원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정권교체 방식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대통령 단임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적절한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맥락에서 4년 연임제나 결선투표제가 일각에서 꾸준히 주장되어 왔다. 의원내각제나 2원집정부제도 논의 대상이다.

 

다만 내년 선거가 이런 제도변경 이후에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껏 선거공약으로 내세울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제도 변경 없이 과거와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다.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는 당선에 총력을 기울이는 탓에 선거 이후의 통치에 대해선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어느 후보자든 당선되고 나면 헤매게 마련이다. 한국은 국내적 국제적으로 얼마나 격동하는 나라인가.

 

의원내각제는 그림자 내각을 통해 통치를 준비시킨다. 대통령제 하에서도 브라질의 룰라처럼 그림자 내각을 발표할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국무총리와 일부 각료라도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 빠른 시일 내에 발표해 통치 이후에 덜 헤매게 했으면 한다.

 

이들을 미리 발표하면 주요 인사들의 충성심 저하로 득표에 손해 볼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겠으나, 오히려 준비된 정권이라는 모습 덕분에 득표에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다.

 

아울러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총리와 각료에게 임기와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 삼성에서 총수-비서실-계열사사장 사이의 권한배분을 재조정해야 하듯이 정치권력의 배분도 혁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총리는 일상적 행정적 과제를 처리하고, 대통령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정치적 과제를 담당하는 게 어떨까싶다. 진보개혁진영의 대통령이라면 굵직굵직한 진보개혁 과제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청와대는 과부하 상태였다. 그러니 정권이 민심과 괴리된 것이다.

 

경제권력이든 정치권력이든 리더의 교체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는가는 기업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다. 이와 관련해 세계사적으로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리더 교체의 원칙은 분명하다. 유능한 인물이 새 리더가 돼야 하며, 리더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작동해야 하며, 리더집단 사이에 적절한 권한배분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오늘의 한국 현실에 적용하면 재벌에서는 전문경영체제가 강화돼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및 통치에서는 내각제적 요소가 강화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