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부러진 화살, 좌우파 균형, 합리적 개혁 (창비주간 논평)

동숭동지킴이 2012. 2. 1. 15:12

 

(<창비주간논평> 2012년 2월 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창비의 링크는 http://weekly.changbi.com/602 입니다. 그리고 '프레시안'에도 동시에 실렸습니다.)

 

부러진 화살, 좌우파 균형, 합리적 개혁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영화 ‘부러진 화살’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재판절차나 교수신분 등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주요 문제를 다루는 의미 있는 화제작이기 때문이다. 조금 깊이 파고들면 비합리적 좌우대립이 왜 생기는지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따지려면 영화와 실제를 구분해야 한다. 특히 일각에선 영화가 곧 실제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 관련자들의 주장과 기록을 종합해보면 실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김교수는 성균관대 동료 수학교수들의 입시문제 출제오류를 지적하면서 미운 털이 박혔고, 그게 재임용 탈락의 근본 원인이다. 다시 말해 학과 내 반대파들에 의해 보복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김교수 주장이 옳다.

 

그러나 정치판이나 일반회사에서도 그렇듯이 적을 공격할 때는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걸 내세우기보다 표적수사를 하고 먼지털이를 한다. 거기에 김교수가 걸려든 셈이다.

 

성균관대측은 공식적 탈락이유로 김교수의 연구자 및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 재임용 탈락을 다룬 민사 항소재판부는 이에 대해 대학측의 연구자 자질 부족 주장이 근거 없다고 보아 처음엔 김교수 손을 들어주려 했다.

 

그런데 재판서류상의 미비가 발견되어 변론이 재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육자로서의 자질 문제가 크게 불거지고 재판부가 그걸 인정해 대학측 손을 들어주게 된 것이다.

 

교육자 자질로서 재판부가 문제 삼은 내용 중엔 교수인 본인이 보기에 교수라는 직업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일례로 우수한 학부생에게 연구환경이 더 좋은 다른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김교수가 권고한 게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이는 대학에서 흔히 있는 일이고 학생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다만 동료교수 및 학생과의 관계에서 김교수의 잘못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그게 꼭 해직시켜야 마땅한 사안인지는 의문이지만, 해직시킨 결정을 무조건 부당하다고 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영화의 형사재판에서와는 달리, 김교수는 재임용 관련 민사 항소재판에서 변호사 없이 독학한 법률지식으로 스스로 변론했다.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탓에 대학 측 증인에 대한 반대심문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민사재판은 ‘변론주의’ 또는 ‘당사자주의’라고 해서 적극적으로 변론하지 않는 당사자를 재판부가 잘 봐주기 힘들다. 이건 김교수의 실수다.

 

석궁사건 이후 형사재판의 경우는 어떤가. 거기서 김교수 측 요구를 묵살하지 않고 혈흔을 검증했다면 지금 같은 논란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재판부가 화살 맞은 판사에게 그런 요구를 하기가 미안했던 게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싶다. 또 재판부에겐 김교수가 ‘또라이’로 보였고 너무나 뻔한 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법원의 ‘절차적 폐쇄성’이나 지나친 ‘권위주의’를 바로잡을 필요는 있다. 안 그래도 재벌총수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라든가 전관예우로 인해 국민의 사법부 불신이 깔려 있지 않은가. 영화 ‘부러진 화살’의 사회적 의의는 이를 지적한 데 있다.

 

다만 그렇다고 혈흔을 판사가 조작했다고 한다면 그건 억지주장이 아닐까싶다. 그렇게 조작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부러진 화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도 법원의 잘못이 아니라 수사를 담당한 경찰의 엉성한 증거물 관리체계 때문이다.

 

그리고 선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사에게 석궁을 들고 간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입장을 바꾸어보자. 낙제성적 F를 주거나 학위논문심사에서 떨어뜨리는 판정(일종의 선고)을 했다고 학생이 김교수에게 석궁을 들고 오면 되겠는가.

 

법원도 개혁이 필요하지만 검찰이 훨씬 더 문제인데, 법원과 검찰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건 곤란하다. 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대체로 한나라당은 법원을 공격하고 야당은 법원을 옹호한다. 판사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우리나라 권력기관 중 공정성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은 게 법원이다.

 

이상이 객관적 사실이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을 둘러싸고는 사실인식뿐만 아니라 가치판단도 작동한다. 예컨대 김교수 같은 ‘괴짜’를 얼마큼 포용해야 하는가이다. 재판의 민주성과 효율성 중 어느 걸 더 중시해야 하는가 같은 사안도 있다. 약간 뜬금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게 따지고 보면 좌파와 우파의 문제다.

 

흔히들 <진보↔보수>와 <개혁↔수구>란 용어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고 사용한다. 그런데 근대사회에서 진보파(좌파)와 보수파(우파)의 구분은 경제활동을 조정하는 두 축인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量)에 관한 것이다. 좌파는 시장보다 국가를 더 선호하며 우파는 그 반대다.

 

그리고 한국에선 좌파와 우파라는 기준과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質)을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다. 좌파-우파를 가로축(x축)에 놓는다면, 개혁-수구는 세로축(Y축)에 놓을 수 있다.

 

나아가 ‘좌파-우파’를 근대사회를 넘어 인류사회 전반에 적용하면 어떨까. 좌파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사회연대(공생), 평등, 분배, 민주성을 강조하는 반면, 우파는 사회적 강자를 대변하고 자기책임(경쟁), 자유, 성장, 효율성을 강조한다.

 

인간본성으로 볼 때 좌파는 모성(母性)과 음(陰)에 가까우며, 우파는 부성(父性)과 양(陽)에 가깝다. 어머니는 못난 자식이 더 안타까운 반면, 아버지는 잘난 자식을 편애하기 쉽다.

 

김교수처럼 주위와 잘 융합하지 못하는 소수자라도 껴안고, 재판에선 피고의 주장을 최대한 들어주자는 게 좌파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다수를 힘들게 하는 소수자는 물리치고, 재판에선 효율성을 증진시키자는 게 우파다. 범죄자를 치료대상의 병자로 보는 게 좌파라면, 격리대상의 병균으로 보는 게 우파다(물론 범죄자는 양 측면을 다 갖고 있다).

 

그런데 개인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좌파적 논리와 우파적 논리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게 바로 음양의 조화다. 건강한 인간상태를 나타내는 음양화평지인(陰陽和平之人)이라는 말도 있다. 좌파와 우파 어느 한쪽이 지나치면 개인이나 사회가 병든다.

 

활력을 잃고 붕괴한 소련 및 동유럽 체제는 좌파논리의 극단적 사례다. 거꾸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금융위기가 발생한 오늘날 자본주의는 시장만능주의라는 과도한 우파논리가 지배한 결과다.

 

그러면 인류사회 전반에 적용 가능한 ‘개혁-수구’의 정의는 무엇일까. 사실과 이성에 입각하며, 효율성과 민주성 모두를 해치는 사회씨스템 예컨대 부패구조 같은 걸 뜯어고치려는 세력이 개혁파다. 수구파는 그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좌파와 우파는 선과 악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게 아니고 양자가 조화로운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과 수구 사이에선 수구를 물리치고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역사발전이다.

 

한국에선 그동안 압축적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파의 논리가 지나치게 우세했다. 아울러 근대화의 역사가 짧고 분단체제하에 놓인 탓에 좌파든 우파든 객관적 사실을 외면하고 비합리적 주장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즉 ‘우파논리로의 편중’과 ‘좌우파의 비합리성’이라는 이중적 문제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론 좌우균형을 위해 복지를 확대하는 진보가 요구된다. 여야의 총체적 좌클릭도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으론 좌우파 모두의 합리화도 필요한 바, 그게 바로 수구를 벗어나는 개혁이다. 진보(좌)-보수(우)를 떠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말이 사실은 개혁을 의미한다.

   

하지만 좌우파의 균형과 합리화에는 갖가지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한국의 보수수구파는 자신들의 과도한 특권이 계층갈등을 심화시켜 사회의 존립기반을 허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반대로 북유럽 등의 이상사회를 꿈꾸는 진보개혁파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 잘 모른다. 예컨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 대신에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억울하지 않은 세상’을 지향해야 함을 잘 납득하지 못한다.

 

김교수 사건에선 과도한 좌우파 논리와 비합리성의 문제가 뒤엉켜 있다. 혈흔감정을 받아주지 않은 데는 재판효율성이라는 우파논리가 과도하게 작용했고, 온갖 걸 다 요구한 김교수의 증인·증거 신청 행태는 재판민주성이라는 좌파논리의 남용인 셈이다.

 

그리고 선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석궁 들고 김교수가 판사 찾아간 건 곽노현 교육감 판결에 불만을 품은 꼴통단체가 판사 집에 쳐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상실한 행태다.

 

한국의 사법부는 과거 군사독재 하에서 맥을 못 췄고, 오늘날도 모든 면에서 공정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사법부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진보파든 보수파든 사법부를 비이성적으로 공격하면, 그건 도리어 사법부와 우리사회를 망칠 위험성이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뜨거운 논란을 계기로 한편으로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노력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재판을 비롯한 사회전반에서 좌우파의 균형과 합리화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

(추가 1)  2012년 2월 3일

 (고위 법관을 지낸 분이 본인의 글을 읽고 평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래에 옮겨 놓습니다.)

 

김교수님,

보내주신 글은 진작 보았지만 일단 별 문제가 없어 보이고 찬찬히 본 다음 답신 보내려다 보니 늦었습니다.

오늘 다시 찬찬히 보았는데 역시 별 문제 없어 보이고 나름대로 균형을 잘 잡아준 글로 보입니다.

 

한두가지 첨언하겠습니다.

혈액검사신청을 받아주지 않은 증거채부 결정은,

일단 소송법의 일반법리 차제가 증거신청을 모두 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받아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송에서 입증이 필요한 사실이고 또 그 사실 증명과 관련성이 있고 필요성이 있는 증거만을 채택하여 조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소송 당사자는 일반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해 보이는 증거는 모두 빠짐없이 상세히 끝까지 조사해 주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요구에 끌려 갈 수는 없다는 것이고, 재판이 한없이 늘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에게 불리한 소송이라든지 자기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아는 당사자는 어찌하든지 결론 짓는 시점을 늦추어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는데 법원과 상대 당사자가 그에 한없이 끌려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김명호교수는 박홍우 판사가 화살을 맞지 않았음에도 자해를 해서 상처를 조작했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전제라면 김명호의 주장 자체에 의하더라도 그 피는 박홍우의 피가 맞아야 하는 것이고 그 혈액검사를 통해서 밝혀야 할 필요가 있는 사실은 전혀 없는 것이 됩니다.

 

즉 김명호와 박홍우 또는 검사 쌍방 모두가 그 피가 박홍우의 피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므로 쌍방 다툼이 없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증거조사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김명호의 주장이 박홍우가 상처가 나지 않았는데 피가 난 것처럼 혈흔을 조작하였다는 것이면, 박홍우에게 실제 상처가 났는지 의사 진단서와 진료기록부 등을 조사하여 확인하는 것이 더 필요한 증거방법이고 그 조사는 1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또 김명호의 주장이 박홍우가 상처는 났지만 옷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는 주장이면, 그 주장은 이번 사건과 무관한 사실에 관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살인미수나 상해죄는 몸에 상처가 나면 성립이 완성되는 것이지 옷에 피가 묻는냐 아니냐는 범죄 성립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이므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증거조사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김명호의 주장이 박홍우가 상처도 나지 않았으므로 혹시 상처가 있으면 그것은 자해의 결과이고, 상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정황으로 옷에도 피가 묻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혈액감정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홍우에게 상처가 있었는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사실에 관하여 의사와 진료 관계 증거들을 조사하여 충분히 증거조사가 되었다고 재판부가 판단했다면, 그 이상의 정황 확인을 위한 증거조사는 필요없는 증거조사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경우 계속 다른 주장과 의문을 가진 당사자를 설득하기 위하여 증거조사를 해 줄 수도 있지 않느냐교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판단은 전후관계를 종합하여 더 이상의 증거조사가 필요할 것인지 아니면 한쪽 당사자의 무리한 또는 억지성 주장이라고 볼 것인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 판단은 기록과 1,2심의 증거조사 과정을 전체로 보기 전에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고, 결국 형사항소 재판부는 혈흔 감정이 필요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부장판사가 자기와 사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을 무고하기 위해서 자해를 한다는 것은 너무 가능성이 낮은 가정으로 보이고, 또 사건 현장에서 직접 또는 직후에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과 병원에 간 시간 간격 등으로 보아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기도 어렵다고 보입니다. 

 

박홍우가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즉시 자해 생각을 해서 집에 들어가 자해를 하고 옷에 피를 묻히고 나왔다고 하는 가정 역시 너무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김명호가 사건 직후 1심과정까지 그 비슷한 주장을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2심에 와서야 그런 주장을 더구나 종전 주장과 상호 배치되는 주장을 한다면 더욱 그 진실성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법원의 재판은 전 국민이 함께 나눠써야 할 공공재인데 일부 사람들이 자기 주관적 입장에서 요구하는 것을 확인해 주기 위하여 불필요한다고 보이는 증거조사를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어디까지 조사해 주어야 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서 균형을 잡아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그 재판부가 다른 사건에 써야할 시간과 노력을 빼 먹는 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사건에서 문제되고 일반인들이 적극 호응을 보이는 것은, 법원의 폐쇄성, 효율을 앞세운 법원 재판의 부실, 당사자를 객체화시키고 법원만 주체적으로 재판을 진행해 가는 일방성, 그런 것들이 축적되어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관들의 인식이 전환되어야 하고 나아가 법원 재판의 인적 물적 여건이 대폭 호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곽노현 재판에서 김형두 판사가 보인 재판진행 모습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밤 12시까지 2,3일 걸러 재판을 해 대면 그 판사들은 어찌 되는 것이며 언제 기록보고 다른 사건은 언제 처리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번 영화와 그에 대한 국민들의 열화같은 호응은 맞고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부분은 이 사건에서의 세부적인 부분이고 크게 보면 역시 법원의 전 근대적인 의식과 재판의 여러 문제들을 강력히 규탄한 것이고 그것은 맞는 방향이므로 우리 국민과 사법부가 이번 일을 통하여 가장 좋은 결실을 건져내는 노력을 하게 되면 이번 영화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보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을 것은 국민들은 법원과 판사들만 욕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마는데, 그래서는 아무 해결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법부가 제대로 된 재판을 해 주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지,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고, 어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지 등을 객관적으로 살펴 함께 해결해 나가야지 판사들 욕만 하고 판사들 정신만 차리면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법원과 판사들이 책임질 부분을 가려내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욕도 하고, 그 동안 그 원인을 제공하거나 해결할 책임자 지위에 있었던 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고, 국민들이 해 주어야 할 부분, 예산으로 뒷받침해 주어야할 부분, 정치권에서 해 주어야 할 부분, 언론에서 해 주어야 할 부분 등을 잘 구분하여 각자에게 각 역할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변명과 핑계와 책임 전가의 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석과 원인 규명 및 대책 강구가 없이는 아무런 얻는 것 없이 법원과 판사들의 진정한(필요한) 신뢰와 권위만 상처받고 말 것이라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왕 김교수님이 펜을 들었으니까 그런 점까지 살펴서 국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법원이 잘못해 온 것이 너무 많아 법원, 판사, 법조인들의 말은 잘 먹히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비 법조인,  비 법대 교수인 김교수님 같은 분이 적격이지요

 

급히 써 보았습니다.

------------------------------------------

(추가 2) 2012년 2월 12일

 

형사 항소심 재판부가 석궁사건 재판에 대해 주위사람들에게 해명한 이야기를 최근에 듣게 되어 옮겨 적습니다.  피고측의 혈흔 감정 요구를 왜 재판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당시의 우리나라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이 구속되어 있는 경우에 1심은 6개월 이내, 2심(항소심)은 4개월 이내, 3심(상고심)은 4개월 이내에 마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피의자를 자동적으로 석방한 상태에서 재판을 계속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어 그 기간들이 1심 6개월, 2심 6개월, 3심 6개월로 연장되었습니다.)

 

김명호교수 형사재판 1심에서 김교수가 증거를 20여건 이상 신청하면서 6개월 빠듯한 상태에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2심으로 재판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2심으로 재판서류를 넘겨서 2심 재판이 시작되는 데는 1~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공판서류와 증거 등을 정리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1심 재판 판결이 6개월 못미쳐 여유 있게 내려졌으면, 그 여유기간에 그 재판서류 넘기는 기간을 포함시킵니다.

 

하지만 1심 판결이 6개월을 거의 다 쓴 상태에서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서류 넘기는 기간은 2심 판결기한  4개월에 포함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2심 판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고 합니다. 2심이 선고 전에 몇 번 열렸는데 결심공판을 할 시점에선 재판기한 4개월 중 남은 기간이 3주일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런 판국에 혈흔감정 신청이 결심 무렵에 이루어졌고 그걸 받아들이면 상당한 시일(심한 경우 1달 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에 김명호 피고인은 자동으로 석방될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고측에선 1심 재판시에는 혈흔감정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혈흔감정을 요구한 것은 자동석방을 노린 재판지연전술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혈흔감정만 해주면 기소사실을 시인하겠냐고 재판부가 피고측에 물었을 때 피고측이 그에 동의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위의 <추가 1>에 서술된 판단도 작용했겠지요.

 

이런 사정들이 혈흔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라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