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개혁 토론 <중앙SUNDAY>

동숭동지킴이 2012. 3. 18. 14:37

 

(재벌문제와 관련해 지난 주에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토론을 했습니다. 중앙일보의 중앙선데이 2012년 3월 17일자에서 그 내용을 정리한 걸 아래에 옮겨 놓았습니다.  지면 사정 등의 이유로 본인이 말한 것 중 상당 부분이 수록되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이 블로그에 실린 <재벌개혁과 특경가법> 등의 글들과 같이 읽으시면 재벌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명의 토론자 중 박상인 교수와 본인은 재벌개혁론자이고, 황인학실장과 신현한교수는 이에 반대하는 쪽입니다.)

 

 

고도성장 이끈 재벌 … 이젠 경제민주화에 동참할 때

연중 기획 한국사회 대논쟁 ⑤재벌 개혁

| 제262호 | 20120318 입력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의식, 시장경제 만능주의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재벌 개혁에 관한 논의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 양대 선거를 앞두고 야권은 물론 여당까지 ‘복지 확대’와 함께 ‘재벌 개혁’을 주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삼성·현대 등 재계는 큰 선거나 정권 교체기마다 일방적인 ‘대기업 배싱(bashing)’이 되풀이된다고 불만스러워한다.

 

우리 사회의 재벌은 ‘한국 경제의 견인차’ ‘경제 민주화의 걸림돌’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아 왔다. 재벌은 과연 개혁 대상인가,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한국사회과학협의회와 중앙SUNDAY의 연중 공동기획 ‘한국사회 대논쟁’의 다섯 번째 주제는 ‘재벌 개혁’이다.

 

 김기원(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 교수, 박상인(서울대 행정대학원 경제학) 교수, 신현한(연세대 경영학) 교수와 황인학(한국경제연구원 경제학) 기업정책연구실장이 지난 14일 중앙일보 사옥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회는 정용덕(서울대 행정학) 한국사회과학협의회장과 홍승일 중앙SUNDAY 경제에디터가 함께 진행했다.

 

재벌 개혁에 관한 ‘한국사회 대논쟁’ 참석자들이 토론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인학(한국경제연구원) 박사, 김기원(방송통신대)·정용덕(서울대) 교수, 홍승일 경제에디터, 박상인(서울대)·신현한(연세대) 교수. 조용철 기자
홍승일 경제에디터=흔히 재벌이란 표현은 족벌이나 경제력 집중 같은 부정적 뉘앙스를 띤다. 효율적 논의를 위해 재벌의 기본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 다음 재벌의 공과와 기업집단의 바람직한 지배구조, 정치권의 개혁 논의 순으로 풀어가자.

정용덕(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너무 학문적인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각자의 시각을 토대로 재벌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잡아주면 좋겠다.

박상인(서울대) 교수=재벌 개념을 혼동해 개혁 논의가 겉도는 경우가 많다. 재벌은 지배주주가 있는 대기업 집단 혹은 그런 대기업 집단의 지배주주라고 정의할 수 있다. 흔히 재벌 문제를 대기업 문제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별 대기업 문제 하고 지배주주가 있는 기업집단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재벌 개혁은 동반성장 같은 대기업·중소기업 현안과 다르다. 지배주주가 있는 대기업 집단 또는 그런 지배주주 때문에 발생하는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 행위와 경제력 집중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다룬다.

신현한(연세대) 교수=비슷한 생각이다. 우리나라 대기업 집단의 특징은 금융회사나 정부가 아닌 개인·가족이 지배주주라는 점이다.

 

김기원(방송통신대) 교수=재벌이란 말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나왔다. 기업집단과 가족경영이라는 두 요소가 결합돼 있다. 그런데 재벌 총수와 재벌 기업, 재벌 체제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재벌 개혁이라는 정책적 목표를 세우려면, 그리고 재벌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없애려면 그래야 한다.

황인학(한국경제연구원) 박사=재벌보다 한국형 기업집단이라는 이름이 어떨까. 기업집단이란 다양한 사업 분야에 진출한 다수 회사를 중층적이고 불안정한 지분구조·출자구조로 지배주주나 가족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조직 형태다. 한국형 기업집단에 대한 개념보다 그에 대한 인식이 문제다. 재벌과 같은 기업집단 형태는 선진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 존재한다. 한국형 기업집단을 마치 우리 역사적 배경에서 나타난 기형적 조직 형태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김기원=재벌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가족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후진 사회가 압축적인 공업화를 추진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재벌이다. 일본에서 그랬고 태국·인도네시아에도 재벌이 있다. 다만 선진국에도 재벌이 있다는 이야기에는 다소 이견이 있다. 선진국에도 가족경영하의 기업집단이 있지만 그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그룹은 드물다.

홍승일=재벌이 과연 개혁 대상인지, 시장원리로, 또는 자구 노력으로 잘못된 부분을 고쳐갈 수는 없는지. 수십 년 동안 재벌 개혁 논의가 지속됐지만 여전히 해결이 나지 않는 까닭은.

김기원=재벌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긍정·부정적 측면이 다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뭐냐, 1960, 70년대 고도성장기의 견인차 역할이다. 재벌을 무턱대고 나쁘다고 몰아붙이는 건 반대다. 우리나라에 가용 자원이 부족할 때 유능한 경영자에게 희소한 자원을 집중시켜 고도성장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재벌 체제인데, 덩치가 커지면서 부정적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70년대 말 이후 경영권이 2세로 세습되는 동안 지배주주의 지분은 점점 줄면서 ‘지배 소액주주’가 됐다. 그러니까 회사 돈을 자꾸 빼돌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또 초창기에는 재벌의 성장이 중소기업에 낙수효과를 주면서 국민경제의 이익 하고 얼추 부합했는데 글로벌화와 불공정 경쟁 문제가 심화하면서 이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됐다. 재벌 총수, 재벌 그룹, 국민경제 세 가지의 이해관계가 겉돌기 시작한 것이다.

 

재벌은 소인국의 걸리버처럼 국제 경제 전쟁에서 한국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그런 큰 역할을 살리면서 동시에 일부 총수의 부패와 무능의 문제, 그리고 국민경제 발전과의 불균형 문제를 바로잡자는 것이 재벌 개혁이다. 재벌 죽이기, 재벌 혼내기가 아니라 선진 대기업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주자는 것이다.

신현한=공감한다. 하지만 재벌의 그런 문제를 고치는 데 반드시 개혁이라는 용어까지 써야 할까. 부의 세습이나 총수의 황제경영, 불균형 문제 다 해결 과제지만 재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할까. 대부분 법 집행을 제대로 하면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불법적인 부의 세습은 당연히 못하게 하고, 불법적인 중소기업 지적재산권 침해 행위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법으로 하면 됐지 시장경제 체제에서 정치권이 ‘이것이 너희가 따라야 할 지배구조다’라고 강제할 수 있나.

김기원=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법 집행이 제대로 안 되고 법 앞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재벌의 범법은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 그러니 재벌 개혁은 검찰·사법 개혁과 두루 관련이 있다.

박상인=재벌이 우리 사회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가 무엇이며, 어떤 해결방법이 바람직한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신 교수 말씀처럼 법 집행이 안 된다는 점에 공감한다.

 

재벌 총수 사건에서 온정적인 판결을 한 판사에게 물었더니 “재벌 그룹의 지배권이 크게 변하면 국민경제에 큰 혼란을 줄 수 있어 보수적인 판결을 했다”고 하더라. 국민경제에 대한 재벌의 영향력이 실제로 큰 때문인지, 아니면 재벌의 경제 권력이 정치·사법적 영향력을 과도하게 키운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와 있다는 방증임에는 틀림없다. 재벌 총수의 처벌이 약해진 것은 시장경제의 법과 제도가 무너지는 일이다. 재벌 개혁의 기본 방향은 시장 경제체제와 경제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철학과 궤를 같이해야 한다. 시장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소액주주의 사유재산권이 보장되고 주식회사 제도가 작동하며 분쟁을 법치주의에 따라서 해결하는 것이다.

 

재벌이 도마에 자주 오르는 건 김 교수 말씀처럼 그룹 지배권을 무리하게 승계하려 하기 때문이다. 편법 지분 이전이나 일감 몰아주기 같은 부당 내부거래를 통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하곤 한다. 이 역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과도해 그런지 적절하게 제재받지 않는다.

 

서울대 경영대 학생들 중에서 대기업에 취직하겠다는 사람 거의 없다. 행정고시를 보거나 변호사·공인회계사 같은 전문직을 하려고 한다. 대기업 가봤자 최고경영자는 언감생심이고 40대에 상무 정도까지 올라가는 것이 한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기원=재벌체제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에 왔다는 것에 공감한다. 고도 경제 성장의 견인차였던 재벌이 이제 반체제 노릇을 하는 셈이다. 경제력 집중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권 등 사회 각계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을 강화해서 형량을 높이면 배임 횡령을 쉽사리 하긴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쪽으로 법이 개정되길 기대한다.

홍승일=재벌에 대한 규제와 개혁 조치가 역대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 개혁의 내용이 미흡했던 것인지, 아니면 법과 제도를 잘 갖춰놓고도 실천 의지가 부족했던 것인지. 또 재벌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한 논의도 해보자.

정용덕=재벌이 새로운 권력으로 떠올랐다는 점, 재벌에 대한 공정한 법 집행이 안 되는 점 등 정치경제학 쪽 이야기는 많이 나왔다. 재벌의 정당성이나 공정성 측면뿐 아니라 경제 효율성 측면에서 재벌을 어떻게 평가해볼 수 있을까.

박상인=여기서도 대기업 집단인 재벌과 대기업을 혼동하면 안 된다.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은 엄연히 다르다. 대기업 집단 역시 대기업이 갖는 규모의 경제나 국제경쟁력, 의사결정의 신속성 같은 이점을 누릴 수 있지만 이것을 재벌 고유의 이점이라고 보기 어렵다. 재벌의 비효율성은 이미 말씀한대로 과도한 경제력 집중이다. 이것이 우리 시장경제 체제의 기본인 법치주의 작동을 저해하고 있다.

 

다만 대기업 집단인 재벌의 부작용이라고 꼭 보기 어려운 것들도 재벌 문제로 치부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흔히 경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재벌 해체를 해야 한다는 정치구호가 그것이다. 물론 재벌이 경제 양극화와 무관한 것은 아니겠지만 재벌 개혁을 하면 양극화가 해소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양극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세계화라든지 정보기술(IT) 산업의 발전이 양극화를 부추길 수 있고 기업집단이 아닌 대기업들의 성장도 양극화의 원인이다.

 

따라서 재벌 개혁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세웠다면 착각일 수 있다. 대기업·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문제도 본질적으로 대기업 문제지 대기업 집단인 재벌의 문제는 아니다. 정치권에서 재벌 개혁을 만병통치약처럼 외쳐대는 것은 위험하다.

황인학=기업집단의 효율성 논의를 듣다 보니 재벌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효율성이란 면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2010년 5월 미국 GE의 최고경영진이 세계경제 벤치마킹 순회 출장 도중에 나한테 와서 한국 재벌의 경쟁력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해서 한 시간가량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일류기업들마저 고전했는데 한국의 우량기업들은 어떻게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높이면서 잘 버틸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들이었다. 한국의 기업집단이 어떻게 생성됐고 진화해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쟁력의 원천이 뭐냐고 설명해 달라고 했다.

 

GE는 역사가 100년 넘은 세계 최고 우량기업인데 정작 우리를 배우려 한다. 한국 재벌은 신속한 의사결정, 과감한 투자가 장기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연구개발(R&D) 투자를 엄청나게 했다. 경제력 집중이 일단 시작되면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좌파 경제학자들의 ‘기업패권론’이다. 이들의 가설을 검증해 봤더니 단기적으로 집중도가 오르락내리락하긴 했지만 장기적인 증가 추세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판명 났다. 우리나라와 미국 다 해봤는데 그렇다.

김기원=황 박사가 미국 GE 얘기를 하셨는데 외국 사람 얘기를 존중하긴 해야 하지만 금과옥조는 아니다. 10여 년 전에 미국의 하버드대 교수가 대우그룹 성공사례를 칭송했는데 대우는 얼마 있다가 파산했다. 오바마가 한국 공교육 시스템 최고라고 치켜세운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또 총수 의사결정의 신속함도 신중함과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능력 있는 총수라면 몰라도 검증되지 않은 2, 3세 총수가 경솔하게 신속한 결정을 내리면 망하는 지름길이다. 외환위기 때 30대 기업집단의 절반이 망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지 않았는가. 기업집단은 ‘규모의 경제’ 이외에 ‘범위의 경제’라는 이점을 누린다. 사업 다각화라는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총수 판단이 잘못되거나 아니면 총수가 자기 돈 빼돌리려고 다각화하는 경우가 근래 늘고 있다.

 

이런 경우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지, 기업집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재벌의 공정성과 효율성 문제를 보자. 공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있었다. 효율성은 황 박사 말씀대로 과거에 꽤 괜찮았다. 하지만 재벌이 오늘날처럼 커지면서 재벌 총수와 재벌 그룹, 국민경제 사이에 이해의 균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신현한=대기업 집단의 효율성 문제를 직접 연구해 본 적이 있다. 외국의 경우 사업 다각화 기업과 비(非)다각화 기업 간의 기업가치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연구한 게 많다. 우리나라에 똑같은 연구 방법론을 적용해 대기업 집단에 속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그중에서도 중견기업이라는 걸 빼고 비교해 보면, 외환위기 이전에는 대기업 집단의 기업가치나 경영성과가 비(非)대기업 집단보다 낮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비효율적이다, 덩치만 컸지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에 구조조정을 강요받고 또 스스로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많이 한 덕분에 재벌의 경영 효율성이 높아졌다. 2000년대 이후 대기업 집단의 기업가치나 성과를 비(非)대기업 집단과 비교해 보니 확연하게 좋아졌다.

근데 대기업 집단이 효율성과 소액주주 자본주의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착취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까지 중소 협력업체를 쥐어짜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선가 성과가 나와야 하는데 대기업에 대한 주주들의 감시가 심하고, 효율성을 강조하고, 외국 기업이 간섭하고, 국민연금조차 주주권 행사를 하겠다고 하니, 또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전문경영인이나 임원들에게 책임이 돌아가니 성과를 어디서 뽑을 거냐, 결국은 협력업체 쥐어짜기를 하게 된 것이다.

 

일본·미국의 가족기업들은 실제로 투자 많이 안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엄청난 R&D를 하는 건 오너 기업이기 때문이다. 다각화된 여러 계열사를 갖고 있으면서 한두 회사가 잘못돼도 전체가 망하지 않는다는 계산이 서니까 가능한 거다. 그런데 우리가 다각화 기업을 비판하면 한 가지만 하라는 건데 그러면 위험 부담이 커진다. 그런 면에서 기업집단은 순기능이 많다.

박상인=재벌 내지는 대기업 집단의 과거 순기능에 공감한다.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못해 정부가 외자를 도입해 나누어 주던 시절에 가장 효율적으로 빨리빨리 할 수 있는 기존 기업들이 사랑받았다. 이것이 대기업 집단 형성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제 시장이 작동해야 할 시점인데 시장이 잘 안 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00년대 이후 출자총액제한제도 인센티브나 이사회 기능 강화 같은 조치들을 내놨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시장 친화적인 정책처방들이 먹혀 들지 않은 건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과 수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김기원=외환위기 이후 경영 효율성을 중시하게 됐지만 주주자본주의로 바뀐 게 아니라 여전히 총수자본주의다. 재벌 총수가 과거에는 기업 규모를 키우고 계열사를 늘리는 데 골몰하다가 이제 단기적인 수익을 중시하다 보니 쥐어 짜기가 과거보다 심해졌다.

 

전문경영인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단기적으로 하기도 한다. 이 역시 총수 체제의 영향이 크다. 경영 잘못하면 망하게 놔두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중소기업의 경우는 맞다. 그러나 대기업이 망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 외환위기 때 생생히 보지 않았는가.

 

재벌 계열사들이 줄초상을 맞으니깐 국민경제가 파탄 나고 경제신탁통치를 받게 됐다. 그걸 시장과 정글 법칙에 맡겨두라는 건 무책임한 소리다. 정부가 간섭하라는 것이 아니라 게임룰을 만들어 지키자는 거다.

정용덕=순환출자 금지나 출자총액제한제도 보완 등 최근 정치권에서 오가는 재벌 개혁 논의로 옮겨가 보자. 외과수술이 필요하다면 어떤 것들이 있나. 정치권의 입장을 선명하게 대비시키고 판단을 내려 달라.

김기원=재벌 내부적으로 경영의 투명성·책임성·전문성을 키우면 된다. 전문성이라는 건 능력 있는 전문가가 나서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내부적으로 갖추고 외부적으로는 국민경제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수단은 기업인의 부패를 바로잡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강화다.

 

그리고 앞으로 재벌 견제를 정부 대신 금융이 해야 한다.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는 공정거래법을 강화해야 한다. 한시적으로는 중소기업에 단체교섭권을 주는 방법이 있다. 계열사 간 순환출자는 당연히 금지하고 출총제 역시 보완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다. 영국에서 하는 의무공개 매수제도, 즉 30% 이상 지분을 소유하면 다 공개 매수에 응하게 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황인학=오늘 토의의 문제의식들이 온당한 것인지 따져보려면 세 가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첫째,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논의하는가. 둘째, 개혁 목표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가. 셋째, 거론되는 정책들이 추진되면 소기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다. 여·야의 개혁 정책에 문제가 많다. 전반적으로는 어느 한 면만 보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선거를 앞두고 대기업 때리기가 도를 넘어섰다.

 

경제력 집중은 분명 문제이지만 정책적 접근을 해서 해결될 것이 별로 없다고 본다. 한 시장 내에서 소비자 복지를 희생시키거나 해당 시장 내에서 경쟁기업을 부당하게 배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작은 것은 아름답지 않다(Small is not beautiful)’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과거 금과옥조였던 ‘작은 것이 아름답다’ 명제를 뒤집는 내용이다. 대기업은 줄고 소기업이 과도하게 늘어난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의 경제가 침체를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대기업 집단을 규제해서 그 규모를 쪼갤까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으로 클 수 있을까를 연구해야 한다. 이쪽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분모를 늘려야지, 분자를 줄이면 안 된다.

신현한=기업 지배구조는 진화론적으로 봐야 한다. 이론적으로 좋은 제도를 도입했는데 잘 되는 기업도 있고 잘 안 되는 기업도 있다. 자기 몸에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해도 성과가 나쁜 기업이 많다. 사외이사를 두지 않아도 잘나가는 기업도 많다. 지배주주의 빠른 의사결정 때문에 두산은 90년대의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오늘날 중공업 그룹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충격을 외국보다 덜 받은 것도 지배주주가 뚜렷한 대기업이 많기 때문이라고 외국학자들은 평하기도 한다. 자본시장과 헤지펀드·기업사냥꾼 활성화를 통해 재벌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배주주가 경영을 잘못해 기업가치를 떨어뜨릴 경우 경영권을 도전받도록 시장의 힘을 키우는 것이 순리다. 정작 중요한 건 중소기업 개혁이다. 중소기업 졸업을 꺼리는 풍토를 완화하기 위해 ‘중소기업 졸업제’ 같은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 정부 지원에 안주하려는 기업들이 몸집을 불릴 유인을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