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개혁과 '특경가법' (한겨레 칼럼)

동숭동지킴이 2012. 2. 23. 09:18

 

<한겨레> 2012년 2월 23일자에 실린 칼럼입니다.

 

재벌개혁과 ‘특경가법’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재벌개혁이 또다시 화두로 등장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재벌개혁을 선거이슈로 내세우고 있다. 재벌총수가 전횡을 휘두르고 재벌그룹이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재벌체제’의 폐해가 심각해졌고, 이명박정부의 재벌친화적 아니 재벌종속적 정책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상시에는 1원1표라는 돈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선거시에는 1인1표라는 민주주의 논리가 작동한다.


   그러나 아이엠에프 사태로 재벌의 헤게모니가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도 재벌개혁은 어정쩡하게 끝나고 말았다. 국민들 표를 의식해 지금은 요란스럽지만 결국엔 ‘태산명동 서일필’로 될 공산이 농후하다. 이런 결말을 피하려면 개혁에너지를 위력적으로 집결시켜야 한다. 재벌개혁의 올바른 방향설정이 필요한 소이다. 


  재벌개혁은 재벌 죽이기나 재벌 혼내주기가 아니다. 재벌이 선진적 대기업으로 거듭나게끔 도와주는 일이다. 경제성장의 견인차라는 긍정적 측면을 살리면서 재벌체제의 부정적 측면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재벌총수, 재벌그룹, 나라(경제)라는 3자의 이익이 과거에는 얼추 균형을 이뤘으나 근래 들어 점점 불일치하게 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재벌총수의 부패와 무능, 재벌그룹에 대한 국민적 견제력의 약화라는 문제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재벌의 금융지배 차단, 재벌세, 기업집단법 등등의 방안이 거론되는 배경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재벌개혁에는 똑바른 방향만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도 필요하다. 2차 대전 직후의 일본에서처럼 한방에 재벌개혁을 달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재벌체제의 맥을 제대로 짚어 일단 약한 고리를 공격해야 한다. 그 약한 고리란 재벌과 선진국 대기업의 차이다. 선진국에도 경영진의 비리가 없지는 않지만 한국의 재벌총수는 거의 일상적으로 회사 돈을 빼돌리고 오직 재수 없을 때만 걸린다.


  미국 엔론의 최고경영자는 분식회계로 종신형에 가까운 징역살이를 선고받았는데, 그보다 더 무거운 범죄인 횡령과 배임을 저지른 우리 재벌총수는 대개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검찰과 법원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 이런 솜방망이 처벌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사법부의 새 양형기준에 따라 태광그룹 총수에게 엊그제 중형을 선고한 게 그런 바람직한 흐름의 단초였으면 좋겠다.


  여기에 발맞춰 국회가 할 일이 있다. ‘특정 경제범죄 가중처벌법’(약칭 특경가법)의 강화다. 이 법에 의하면 횡령·배임액이 50억원 이상일 때는 징역 5년 이상,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일 때는 3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한다. 


  특경가법을 강화해 각각에 대해 징역 10년 이상과 7년 이상으로 처벌토록 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현행 형법상 판사가 정상을 참작하더라도 형량의 절반만 깎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선고형량이 3년을 넘어가면 집행유예가 아니라 실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총수가 감옥가면 회사가 위태롭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내다버리자. 엄청난 회사 돈을 멋대로 빼돌리는 총수는 경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오히려 회사에 보탬이 된다. 또 이렇게 강화한 형량은 특경가법의 재산국외도피 등 다른 처벌조항에 비해 과도하지도 않다. 따라서 특경가법의 강화를 통한 재벌개혁에는 저항할 명분이 없다.


  특경가법을 강화하면, 경영이 투명해져 재벌의 세습독재체제도 흔들리며, 재벌이 나라를 농락하는 행태에도 제동이 걸린다. 어려운 개혁과제에 매달리기 전에 이처럼 비교적 쉬운 일부터 당장 착수해보자. 다들 재벌개혁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파가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는 특경가법 강화와 같은 구체적 행동에서 확인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