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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씨의 억울함과 우리 사회의 치사함 (2)

동숭동지킴이 2011. 3. 27. 09:49

신정아씨 책에 관한 두번째 글인 여기선 그녀의 학위 논란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씨 책에 따르면 그녀는 트레이시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예일대 박사과정을 밟았고,  그 사람이 대신 써준 논문으로 심사(defense) 과정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 학위를 갖고서 동국대에서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후 그 학위논문이 1981년의 다른 사람 논문을 베낀 사실이 들통나 학위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학위논문 대필이냐 학위위조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검찰은 학위위조로 몰고가려 했고, 신씨는 대필이라고 끝까지 버텼다. 학위위조란 논문심사도 받지 않았으면서도 학위증을 위조했다는 말이고, 대필은 심사에 제출된 논문이 남이 대신 써준 것이란 의미다. 책이 나온 뒤에 신씨와 관련해 보도하는 대부분의 언론도  학위위조 사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학위위조를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대필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형사적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신씨가 동국대에 채용되고 나서 곧바로 동국대측에서 예일대에 신씨의 박사학위증에 대해 문의했을 때 그 학위증이 사실이라고 답신을 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나중에 동국대가 학교명예를 훼손했다고 예일대에 소송을 제기했을 때 예일대 대학원 부원장 사무실에서 학위증 원본도 발견되었다고 한다(책 23면).

 

이런 정황들을 고려하면 학위위조라기보다는 논문대필이라는 신씨의 주장에 더 신뢰가 간다. 신씨를 의심하는 사람들에 의해 신씨 논문이 표절임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예일대가 학교 명예를 지키고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 아예 학위증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다면 오리발을 내민 예일대는 치사한 족속에 속한다.

 

동국대의 첫번째 문의에서 예일대가 학위증이 진짜라고 답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신씨가 그 답신 과정에도 개입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신씨는 미국의 형사법정에도 섰어야 할 듯 싶다. 그리고 예일대측은 답신과 관련해선 자신들이 행정적으로 실수를 저질렀다는 공문을 총장 명의로 나중에 동국대에 정식으로 보내왔다.

 

어쩌면 트레이시가 포함된 논문 사기단에 신씨가 걸려들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미국 경찰에서 트레이시를 조사하긴 했는데 증거불충분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풀어주었다고 한다.

 

물론 미국의 명문 예일대가 이렇게 일을 엉터리로 처리할 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이에 대해선 조금 있다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대필이라고 전제했을 때, 그 행위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따져보자.

 

신씨는 박사학위 논문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는 그녀의 커다란 과오다. 박사학위란 독자적으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할 자격을 갖췄다는 증명서다. 그런데 대필한 논문으로 교수가 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현실은 어떻든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거짓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여기서 활동하려고 해서야 될 일인가.

 

신씨 책에선 교수들 사이의 다툼을 "밥그릇 싸움도 아니고 밥풀떼기 싸움"이라고 평하고 있다. 참으로 통큰 여성이다. 신씨가 볼 때 교수란 사람들은 시시껍절한 사안을 놓고 아웅다웅하는 집단으로 비친 것이다. 그래서 신씨는 자신이 동국대에 임용되고 소속 학과 교수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그 차가운 반응에 놀라 바로 사표를 제출해 버렸다고 한다.  (불행히도 신씨는 학교당국이 붙잡는 바람에 6개월 휴직했다가 다른 학과 소속으로 이전 발령났다.)

 

신씨는 외할아버지가 재야인사였고 외할머니는 당시 신여성으로 불리던 여성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지금 인터넷에 펴져 있는 대로 만약 그들이 계훈제선생과 이휘호여사라면 대단한 피를 이어받은 셈이다. 신씨가 통크고 당찬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교수직이나 학위논문 대필 따위를 우습게 생각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씨에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로부터 제대로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바르게 산다는 걸 배우지 못한 것이다. 학위논문을 대필해도 되는 것인지 상의할 만한 정의로운 친구나 어른도 갖지 못했던 것같다. 신씨처럼 능력 있는 인물에겐 애석한 일이다. 앞으로라도 신씨가 한두명의 정의로운 이웃을 주위에 두기 바란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인물을 찾기가 쉬울지 의문이긴 하지만.)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에 대해 신씨는 "겉으로는 고상한 체 하지만 도덕관념은 제로"라고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학위논문을 대필해서 교수직을 취득한 도덕관념으로 다른 사람의 도덕에 대해 운운하면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아직도 신씨는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다. 다만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의 차원에서 신씨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씨의 논문 대필이 아주 예외적인 현상은 아님을 지적해 두고 싶다. 본인이 아는 목사 중엔 신씨처럼 가끔씩 미국을 들락거리면서 신학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사람이 있다. 그 목사가 신씨처럼 대필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공공연히 학위대필을 광고한 나라가 한국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의학박사나 신학박사 중엔 신씨 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특히 개업의는 진료하기 바쁜데 논문 쓸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고위직 공무원들의 박사논문 중에도 대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개업의보다 더 바쁘다.

 

오래 전 일이지만 본인도 300만원을 준다면서 박사학위 논문 대필을 제안받은 바 있다. 모 대학 이사장의 학위논문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본인이 대필작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에서 그 제안을 한 분은 당시엔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유명인사였다.

 

본인은 어떻게 그 분이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두고두고 황당한 생각이 들곤 했다. 속지 말자. 굳이 신씨 책을 끌고 올 필요도 없이 사회적 저명인사도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너무도 많음을 우리는 목도해 오지 않았는가.

 

학위 논문이 아닌 교수들의 일반 논문은 대필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자신이 연구에 참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논문에 공동집필자로 이름만 그냥 걸치거나 아예 자기 것으로 둔갑시킨 사례는 본인도 꽤 알고 있다. 얼마 전 자살한 시간강사가 자기가 다른 교수 이름으로 대필해준 논문이 50편이나 된다고 밝히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미국의 대학, 특히 최고 명문인 예일 같은 데서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신씨의 대필 이야기는 날조가 아닐까. 본인도 처음엔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대필은 일대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좀체로 드러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대필해주는 사람이 예일대의 심사를 통과할 만큼 수준 높은 논문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당연히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신씨  논문을 대필해준 사람은 여러 석사 논문을 대필해 왔었고 신씨의 경우가 최초의 박사논문 대필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석사논문은 가볍게 취급된다. 다만 명문대의 박사논문은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신씨의 대필자가 제대로 된(?) 대필논문을 쓰지 못하고 옛날 다른 사람 논문을 그냥 가져왔던 게 아닌가 싶다.

 

자 그렇다면 명문 예일에서 논문 표절을 거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될까. 하지만 말이 될 수도 있을 듯싶다. 워낙 옛날 것을 표절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황우석씨의 가짜 논문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 'Science' 의 심사과정을 통과했음을 보라. 나중에 극성스런(?) 한국인들이 들쑤시는 바람에 황우석씨의 가짜 논문이나 신씨의 표절 박사논문도 들통나긴 했지만.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우리 재벌 가문 사람 중엔 같이 수학한 한국인이 논문을 대필해 준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바 있다. 그 공로가 작용해 그 대필자는 해당 재벌기업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게 정말이라면 대필자가 학문적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들통이 나지 않은 셈이다.

 

구미선진국이나 명문이라고 무조건 믿는 사대주의에 빠져선 안 된다. 미국의 명문 저널에 실린 엉터리 논문을 본인이 확인한 경우도 있다(한국 사례에 관한 것이니까 쉽게 확인 가능했다). 2주쯤 전엔 독일 국방부 장관의 박사논문이 표절로 들통나 장관직에서 사임하기도 했다.

 

장하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도 영국 신문 Guardian에서 호평을 받고 출판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review를 거친 걸로 나오지만 놀랍게도 여러 부분에서 사실왜곡이 있음을 필자가 밝힌 바도 있다(그 비판 글은 이 블로그에도 실려 있음). 광복 직후 "소련놈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구미 선진국 것이라고 다 옳은 게 아니다.

 

그런데 구미선진국이라고 우상숭배하는 사대주의도 곤란하지만 구미선진국이나 한국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그 반대편향도 곤란하다. 한국도 썩었고 미국도 썩었고 유럽도 썩었으니 인간 세상 다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하긴 신씨처럼 통큰 여성이거나 고승처럼 세상사를 초월하면 구미선진국과 한국의 차이 따위는 하찮은 일일 수는 있겠다.)

 

논문 대필 같은 경우도 나라에 따라 정도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 전반의 부패상황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경우를 보자. 미국에서도 엔론 같은 부정 사건이 생긴다. 하지만 그건 한국과 달리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나 잊을만 하면 터지는 총수의 비리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선 대부분의 재벌총수들이 비자금을 조성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재수 나빠 들통나면 대개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미국에선 수십년의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호와 처벌강도의 차이 때문에 부정의 빈도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에선 회사 전체의 이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는 가끔 있는데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회사 돈을 우리처럼 자기 호주머니에 빼돌리는 일은 아주 드물다. 북유럽같은 복지국가에선 경영이 더 투명하다. 세금을 많이 거둬야 복지국가가 돌아가는데 그러러면 돈 돌아가는 걸 국가가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신씨의 책에선 기업체와 공공기관 건물에서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조형작품의 납품을 알선하고 리베이트를 받는 건 미술계의 공공연한 관행이었다고 한다(339면). 본인 역시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아마도 구미선진국에선 이런 일이 '관행'이 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의 부정과 부패는 후진국일수록(다만 시장경제가 존재하는 경우) 대체로 더 심해진다. 아프리카 국가나 이웃 중국, 그리고 요즘의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80년대까지 북한에선 부패의 소지가 적었으나, 체제가 위기에 봉착하고 시장경제가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부패상태가 한국은 저리가라 할 정도다.

 

인간 사회가 증류수처럼 오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정도에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도 시장의 공정한 경쟁질서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패를 줄여나가는 개혁의 과제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 진보 세력 일부는 진보만 이야기하고 이런 개혁 과제에 둔감하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음 글에선 신씨 책과 관련해 교수, 기자 등의 치사한 행태 문제를 다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