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논문, 칼럼 등 소개

신정아씨의 억울함과 우리 사회의 치사함 (3)

동숭동지킴이 2011. 3. 31. 18:45

 

세번째 글인 여기서는 교수들의 치사함에 대해서 따져보기로 한다.

 

신정아씨의 책엔 억울하게 당한 데 대한 복수극 즉 물귀신작전의 측면이 있다. 신씨의 주관적 의도가 어떻든 책의 객관적 효과가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책 출간 이후 여러 언론들이 이 복수극이란 점을 들어서 또다시 신씨를 비난하고 있다. 아니 그러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참회록 같은 걸 기대했단 말인가. 오뉴월에 서리 내리게 하는 여자의 한 같은 게 있지 않은가. 또 복수극이라고 무조건 나쁜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할 때도 있다.

 

그 복수극 한풀이의 주요 대상 중 하나가 교수다. 다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수든 다음 글에서 다룰 기자든 그 집단의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신씨가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교수나 기자들도 있다. 미술의 명암을 대조시키는 기법이라고나 할까. (미술에 백치인 본인이 감히 할 말은 아니지만. ㅎㅎㅎ)

 

그리고 앞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학위논문을 대필한 처지에 남의 도덕성에 시비 거는 신씨가 우습기는 하지만, 그녀의 책이 우리 사회의 치사한 면을 드러내준 의의는 있다. 신씨가 대필에 대한 후회도 털어놓고는 있으므로 자기나름으로는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수행한 셈이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비난받는 교수는 정운찬 총장과 경기대의 박모 교수다. 정운찬 총장과 신씨 중 어느쪽 주장이 더 신뢰가 가는지 본인은 말할 형편이 아니다. 다만 예전엔 알고 지냈던 정총장이 총리로 나서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는 하다.

 

그리고 만약 신씨 주장이 진실이라면, 서울대 교수직 제안 스캔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국립대에선 총장이 학과 교수를 일방적으로 임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학과 교수의 정원을 늘릴 수 있는 권한은 총장이 갖고 있다.  거기다가 정총장이 해당 학과 교수들과 친분이 있다면, 신씨가 미술사 담당교수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 볼 수는 있고, 정총장의 제안도 그런 취지였을 것이다. 

 

이제 신씨 책을 계기로 교수들의 치사함을 살펴보기로 하자. 거듭 강조하지만 이는 교수 집단 일부에 관한 이야기이니 쓸데없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그 몰지각한 일부라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본인도 모른다.

 

교수들의 부적절한 행태는 <교수들의 행진>이나 <교수괴담> 등의 책에서도 재미 있게 묘사되어 있기는 한데, 여기서는 치사함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학위논문 대필, 학생 성폭행·성추행·폭행, 의료기자재 및 연구기자재 리베이트 수수, 건설공사 입찰심사와 관련한 뇌물 수수, 연구비 횡령과 같이 파면 또는 구속에 해당되는 큰 사안은 논외로 한다. 그건 치사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첫째로, 질투와 시기라는 치사한 행태보이는 교수들이 있다. 신이 아닌 인간들의 질시는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교수들에게선 그게 약간 독특하다. 좀스럽다고나 할까. 그러니 신씨가 밥풀떼기 싸움을 한다고 한 것이리라. 다음에 하나의 예를 소개해보자.

 

한국의 명문대학 법학과에서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두 교수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저서는 사법고시 준비에서 필수교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둘은 학계의 대가 답지 않게 서로를 질시했다. 그래서 같은 시간대 상대편 교수 강의실에 학생이 얼마나 몰리는지 살그머니 확인해 보려고 했고, 심지어 상대편 교수의 제자가 쓴 학위 논문에 대해선 가혹한 점수를 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선배교수들을 비판하는 글을 쓴 탓에 재임용 탈락했다가 복직된 서울대 김민수 교수, 다른 교수의 입시문제 출제오류를 지적했다가 재임용 탈락하고 석궁사건을 일으켜 결국 옥살이까지 한 전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 지방대 출신으로 고려대교수에 임명됐다가 텃세에 못견뎌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는 정인철 교수 등은 교수사회의 질시가 야기한 대표적인 희생사례가 아닐까 싶다.

 

원래 교수란 쪼짠해질 가능성이 큰 직업이다. 독창적 논문 중엔 사고틀을 뒤흔드는 엄청난 것도 있지만 그건 가뭄에 콩나듯 한다. 보통은 기존의 연구성과에 아주 조금 새로운 걸 보태고 그게 쌓여서 학문 발전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씨 같은 통큰 사람들이 보기엔 시시껄렁한 연구를 가지고 대단한 체 하는 게 교수다.

 

게다가 한국에선 요즘 교수들이 더 쪼그러들고 있지 않나 싶다.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씨 말대로 대학은 기업의 하청업체처럼 변해가고 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교수가 고전적 의미의 스승이 되기를 바란다면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또한 업적평가가 강화되면서 교수들은 논문 편수 늘리고 SCI 급 같은 유명 학술지에 논문 게재할 길을 찾는 데 헉헉거린다. 덕분에 교수들이 열심히 연구하게 된 건 좋은 현상이지만, '시대의 지성'은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다. 지성인이 멀리 높게 보지 않게 되면 자기 옆 사람을 질시하게 되는 건 필연적 귀결이 아닐까 싶다.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인텔리겐차로서의 과제도 잊지 않게 하는 대학개혁 방안은 없을까.

 

둘째로,의 약점을 치사하게 이용하는 교수들이 있다. 시간강사에게 논문을 수십편이나 대필시킨 교수가 그런 사례다. 시간강사를 거쳐 교수가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도 올챙이적 시절은 잊어버린다. 그래서 시간강사 처우개선에 적극적인 교수는 얼마 안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오히려 시간강사를 치사하게 부려먹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생은 교수들의 밥이다. 학부생은 교수 앞에서 맞담배 피우기도 하는데 대학원생의 경우엔 그러기 힘들다. 민주화 바람이 불 땐 학부생은 교수배척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학자의 길을 걸으려는 대학원생에겐 지도교수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음악 같은 분야는 사정이 달라서 서울음대 김교수처럼 학부생까지 우습게 보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대학원생은 교수들의 하인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교수의 운전기사 노릇도 하고 이삿짐도 날라 준다. 심지어 교수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먼 시골까지 대학원생들이 상여꾼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에게 장래를 의존하는 처지인 대학원생들의 약점을 교수가 치사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게 학문적 도제관계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구미는 물론이고 어쩌면 우리보다 도제관계가 더 심한 일본에서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한국 같은 식으로 치사한 일본 교수의 사례는 들은 바 없다. 우리는 대체로 학회 행사에서 대학원생들을 그냥 부려먹지만, 일본은 그럴 경우엔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다.

 

구미나 일본에서도 지도교수가 대학원생의 장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한국처럼 치사한 행태를 보이지 않는 걸로 볼 때, 진짜 문제는 대학문화 나아가 사회문화가 아닌가 싶다. 사회구성원의 인격이 대등하게 취급되고 또한 친소관계보다 실력이 더 중요한 사회라면 치사한 교수가 발붙일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치사하게 삥땅 뜯는 교수들이 있다. 재벌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그 재벌로부터 강연 연사로 초청받아 보통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강연료를 받고, 결국 그 재벌의 사외이사로까지 출세해 한 몫 챙긴 경우가 있다.

 

한편으로 특정 재벌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 그 재벌 비서실에 연락해 지원을 요청한 교수도 있다. 본인도 삼성그룹의 행태를 비판했더니 아마도 그런 부류의 교수에 속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그 비서실 간부가 자기네 자문교수직을 제안한 일이 있다.

 

학회나 연구소 운영과 관련해 재벌에게 손 내미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 돈으로 비싼 호텔에서 학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건 보수학회에 국한된 게 아니다. 진보를 내걸고 있는 인사들 중에도 그것의 문제점에 둔감한 경우가 없지 않다.

 

일본에서 놀란 게, 큰 학회인데도 학회장 교수의 학교연구실을 그냥 학회사무실로 쓰고 있는 경우였다. 학회 행사는 대학을 빌려서 했고, 비용은 참가한 사람들의 회비로 다 충당했다. 한국과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처럼 교수들이 치사하게 돈을 구걸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돈 문제와 관련한 교수들의 치사한 행태는 재벌과의 관계 외에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예컨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의 인건비를 자기 호주머니로 빼돌려서 문제가 되는 사례는 언론에서도 접하는 바다. 이리 해서 큰 재산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검사들의 떡값(뇌물)처럼 그런 돈 쓰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은가 싶다.

 

그런데 교수들이 이렇게 각종 치사한 행태를 보이게 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인의 종자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니다. 우선 한국의 개혁이 미진한 탓이 있다. 교수 채용시장의 경쟁이 불공정하며, 부패한 재벌들이 약점을 가리기 위해 말깨나 하는 교수들을 구워삶을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사회가 식민지, 한국전쟁, 압축성장을 거쳐온 점도 크게 작용한 듯싶다. 그 속에서 과거의 선비전통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남고 한몫 챙기는데 급급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 교수들도 지성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치사함이란 다름아니라 자긍심의 결여다.

 

말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문화'가 자리잡은 셈이다. 고위 공직 임명을 위한 청문회장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 지도층의 모습들을 보라. 특히 이번 정권에선 그런 비리와 치사함이 드러나도 막가파식으로 임명을 강행한 경우가 많았다. 압축적 고도성장하의 기업들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막가파식으로 경쟁해 온 가운데서 커나간 대통령이라서일까.

 

이쯤 하고, 교수와 거지의 공통점을 모아놓은 우스개 농담을 아래에 소개해 본다. 다음 글에선 기자들의 치사함을 다룰 예정이다.

 

(교수와 거지의 공통점 9가지)

* 출퇴근이 제멋대로다.

* 되기는 어렵지만, 일단 되고 나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극도로 낮은 이직률의 평생직장)

* 뭔가를 들고 다닌다. (가방과 깡통)

* 작년에 한 말 또 한다.

* 얻어먹을 줄만 알지 대접할 줄 모른다. (입만 가지고 다녀서 입으로만 때우려 든다.)

* 뛰는 만큼 번다.

* 오라는 데는 별로 없지만 갈 데는 많다.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 딴에 나라 걱정은 혼자 다 한다.

* 왕초 앞에서 설설 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