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평양서 북한군 성명을 들으며 <한겨레 2008. 11. 6>

동숭동지킴이 2011. 2. 23. 17:18

 

(한겨레신문 2008. 11. 6 게재)

 

평양서 북한군 성명을 들으며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얼마 전 평양을 다녀왔다. 거리엔 아스팔트가 새로 깔렸고, 곳곳의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통행차량도 생각보다 꽤 많았다. 자전거를 이용한 노점상도 시장경제화의 재밌는 단면이었다. 반면에 여전히 전력사정이 나빴다. 옥류관엔 고장 난 화장실변기도 있었다. 방문한 공장에서 직원들 평균월급을 물었더니 어떤 고위책임자는 2만원쯤, 다른 고위책임자는 6만원쯤이라 했다. 월급수준이 국가기밀인가.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것은 남북관계의 뚜렷한 악화였다. 우리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북측안내원들이 전보다 경직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도착 당일 북한뉴스에선 남한의 삐라살포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고, 남한을 불바다 정도가 아니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으며, 북남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북남관계를 전면 차단할 수 있다는 내용의 북한 군부성명을 비장한 목소리로 발표했다. 섬뜩한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위기다. 물론 남북관계에서 이런 식의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약자인 북한의 허풍일 수도 있다. 게다가 북측이 개성공단을 폐쇄하려면 앞으로 외부로부터의 투자유치를 단념할 각오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래도 서해교전 같은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며, 더 극단적 경우도 전면 배제할 수는 없다. 수많은 인민의 아사 속에서도 버텨온 북한정권이 아닌가.

 

  이런 사태전개에 대한 책임의 일단은 북측에 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에 관해선 분명한 사과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밖엔 이명박정권의 책임이 크다. 남한 측이 선제타격 할 수 있다든가 등 정부고위층이나 국책연구원장의 갖가지 부적절한 발언과 행동으로 상황을 위기로 몰아온 것이다. 한국경제의 위기나 남북관계의 위기나 그 발생 메커니즘은 마찬가지다.

 

  지금 정권은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등장한 때문인지 남북관계 역시 10년 전으로 되돌리고 싶은 모양이다. 북한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선 남북관계의 긴장쯤은 감수하겠다는 자세다. 그런데 자존심 빼면 시체인 북한이 군사적으로 겁주고 경제지원 줄인다고 무릎을 꿇을 것인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정권이 남북한 인민의 생존을 놓고 도박을 벌이는 느낌이다.

 

  ‘통미봉남’이란 말뜻도 모른 채 이명박정권의 북한담당자가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정권에 영향을 미치는 수구파에게선 북한의 체제급변 땐 외딴 섬 같은 데 수용소를 만들어 대량의 난민을 처리하면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삼청교육대도 아닌데 이게 도대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무지하고 무책임한 세력이 남북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현재 개성공단의 한국 중소기업은 노동력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정권의 약속대로 기숙사를 지어 개성 이외 지역에서 인력을 데려와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대통령은 노동자를 모아놓으면 곤란하다는 해괴한 핑계로 미적거리고 있다. 실용주의와 친기업을 내건 대통령이 수구냉전논리에 사로잡혀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반실용적 반기업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대북사업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한숨만 쉬고 있다.

 

  대북사업만이 아니다. 남북관계가 자꾸만 악화되면 한국경제 전체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그렇잖아도 외국자본이 빠져나가는 판이 아닌가. 이게 과거의 남북관계 위기와 다른 점이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사고를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담당관료를 바꿔야 한다. 경제위기나 남북관계위기나 해결의 기본원칙이 다를 게 없다. 다만 대통령의 스타일과 정권의 기반을 볼 때 그게 쉬울 것 같지가 않다. 어찌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