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엔엘'과 '피디'의 발전적 계승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북한의 핵실험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다. 이런 가운데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는 혐의로 몇몇 남한 인사가 구속되었다. 그러자 이때라는 듯이 수구세력들은 공안정국을 조성하려고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색깔몰이가 예전만큼 위력을 발휘하진 못하고, 피의자들의 인권도 어느 정도 존중되고 있다. 우리를 많이 실망시키는 노무현 정권이지만 적어도 이런 점에선 보수정권보다 나은 셈이다.
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이들이 우리 운동권 중 엔엘(NL: 민족해방) 계열이었음은 분명하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학생과 노동자의 저항운동에선 엔엘과 피디(PD: 민중민주)라는 양대 진영이 그 전위부대였다. 이들은 나름의 이론으로 무장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뜨거운 꿈을 안고 군부독재를 허물어뜨려 갔다. 그런데 세계 정세가 변하고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그들 주장의 허점도 드러났다. 특히 오늘날 엔엘과 피디의 일부 극단적 분파는 오히려 운동의 질곡으로 작용하는 느낌이다.
엔엘의 극단적 분파는 주체사상파로서 북한 사회를 이상화한다. 친일파가 득세했던 남한과 달리 항일투쟁 경력의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고에 이해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과거의 정당성이 현재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게 역사의 변증법이다. 북한은 해방 후 한동안은 그런대로 굴러갔다. 그렇지만 ‘계획경제와 절대왕정’ 체제는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고 마침내 인민에게 지상낙원이 아니라 대량 아사를 가져다주고 말았다. 이런 체제를 계속 숭배할 것인가.
피디에도 극단적 분파가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사회주의혁명을 주창하는 세력이다. 사회주의 이념에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극복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이는 지켜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옛 소련과 동유럽 체제의 붕괴로 효율적 자원배분이 이뤄지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가능한지 막막해졌다. 현실에서 사회주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체제는 북유럽이다. 우선 여기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공허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외쳐본들 민중과 괴리될 뿐이다.
이처럼 엔엘과 피디에 극단적 분파가 존재한다고 뉴라이트처럼 수구세력의 품으로 ‘돌아간 탕아’가 될 필요는 없다. 엔엘과 피디엔 발전시켜야 할 합리적 핵심이 살아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횡포에 짓눌리지 않고 북한 인민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것은 바로 엔엘 이념의 계승이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생산적 긴장관계를 구축하고 모두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 피디 이념의 계승이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 같은 진보세력 안에선 엔엘과 피디를 중심으로 각 정파들이 다투고 있다. 그런데 군사독재 반대투쟁 때와는 달리 이런 정파 대결은 운동을 고조시키는 게 아니라 퇴조시키는 분위기다. 민중과 유리된 채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파들에겐 자기 이념에 대한 자신감도 희미해졌다. 그러다 보니 조직이 부패하고 민주적 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폭력 사태마저 벌어진다.
요즘 화두인 ‘진보의 위기’는 이념의 위기에도 근원이 있다. 국내외 현실의 변화에 진보의 이념이 뒤처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주체사상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같은 비현실적 이념에서 벗어나 민중과 호흡을 함께하는 이념으로 거듭나야 할 상황이다. 이를 토대로 정파 사이에 생산적 정책 경쟁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민중의 결집을 도모해야 한다. 그리해서 ‘효율성과 공정성의 균형적 발전’을 지향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부터 우선 한반도에 제대로 자리잡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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