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걸리버 삼성과 진보세력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최근 삼성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2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상용화에 성공한 게 그 첫째다. 모두 기뻐할 일이다. 노동자와 연구기술자가 열심히 일하고, 전문경영인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진 덕분이다. 시민단체가 삼성전자의 경영을 감시하고 돈 빼돌리기를 견제해온 공도 없지는 않으리라.
그런가 하면 삼성은 노동법 개정 문제에선 복수노조 허용을 또다시 연기시키는 위력도 행사했다. 삼성중공업 등을 경총에 가입시키면서 재계를 주무르고 나아가 정부와 한국노총까지 요리한 것이다. 이리하여 삼성에선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악용해 유령노조로 정상노조 설립을 계속 저지할 수 있게 된다.
또 삼성은 박원순 변호사의 희망제작소에 7억원을 지원했고, 더 큰 돈이 드는 사업도 서로 협의한 바 있다. 오랫동안 시민운동에 몸바쳐온 박 변호사의 공적은 아무리 존중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희망제작소를 설립한 취지나 운영상의 어려움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재정을 주로 삼성에 기대는 연구소가 얼마큼 독립적이고 진보적일 수 있을까. 박 변호사는 재벌과의 생산적 긴장을 이야기하지만, 근년에 그의 활동에서 긴장된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다.
소인국의 걸리버는 다른 소인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그런데 걸리버가 혹시 술에 취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그래서 결국 걸리버는 추방당한다. 삼성도 걸리버와 비슷하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국제 경제전쟁에서 맹활약을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작년의 불법도청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정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를 좌지우지한다. 이제 그 ‘삼성의 덫’에 노동계와 시민운동계도 부분적으로 걸려들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걸리버와 달리 삼성을 추방할 수는 없다.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에 취하지 않게 하는 지배구조 개선에 온 나라가 힘써온 셈이다. 물론 선진적 대기업 체제가 자리 잡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술 취하지 않게 하는 일 못지않게 삼성이 나쁜 마음 먹지 않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삼성의 덫을 해체하는 작업이 요청되는 바다.
삼성의 지배구조와 삼성의 사회지배를 동시에 바로잡는 좋은 방안의 하나는 삼성생명을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현재 삼성생명의 상장과 관련해 계약자 몫을 얼마나 인정하느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그런데 삼성생명을 일본생명처럼 천만 계약자의 기업으로 거듭나게 하는 길도 있다. 그리 되면 계약자 돈으로 삼성이 황제경영을 유지하고 사회를 쥐고 흔드는 폐해가 완화된다. 산업과 금융 사이에 견제와 균형도 작동하게 된다.
사민당이 패배한 얼마 전의 스웨덴 선거에선 높은 실질실업률이 쟁점이었다. 이 실업문제에는 노사대타협의 주도 등 여러 면에서 모범적인 발렌베리라는 거대그룹의 존재가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고용증대에 결정적인 중소기업 성장이 거대그룹의 위세 아래 위축되었을 공산이 크다. 스웨덴의 50대 기업 중 1970년 이후 창립된 경우는 겨우 하나뿐인 형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지배하에 중소기업이 도약할 틈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발렌베리와 달리 삼성은 우리의 민주주의까지 위협한다. 그렇다고 삼성을 쓸데없이 괴롭혀선 안 된다. 단지 삼성의 부당한 경제력, 정치력, 사회력을 바로잡으면 된다. 그러려면 삼성생명을 계열 분리함과 더불어 진보세력이 우선 삼성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즘 화두인 ‘진보의 위기’는 도덕적 우위가 흔들린 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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