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4년 2월 26일 기고>
재벌총수와 재벌기업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전기를 맞고 있다. 어느 그룹이 얼마를 줬나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돈을 어디 썼나 하는 사용처가 부분적으로 밝혀졌다. ‘화대’ 같은 이적료가 한 예인데, 선거를 빙자해 한몫 챙긴 정치인들을 본격조사하면 그 폭발력은 만만찮을 것이다. 그러니 “한나라당 못해먹겠다”는 난리가 벌어지고 이제 그만하자는 요구도 거세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와 경제를 정말로 거듭나게 하려면 불법자금의 생산, 유통, 소비의 전 과정을 낱낱이 파헤쳐 단죄해야만 한다.
이 경우 보험과 특혜를 위해 불법자금의 생산을 담당한 재벌총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검찰은 수사협조여부에 따라 처벌수위를 달리 할 뜻을 비쳤다. 그리고 국민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대통령도 비슷한 취지의 의견을 피력했다. 30대재벌 매출이 국내총산출의 절반 가까운 현실에서 재벌기업이 위태로우면 국민경제가 위태롭다. 그런데 재벌총수를 엄중 처벌하면 과연 국민경제가 위태로워지는가. 이에 답하려면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의 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과거엔 창업주가 곧 전문경영인이었고 그가 회사주식 대부분을 소유했으므로 총수와 기업의 이익은 그런대로 일치했다. 하지만 경영능력을 검증받지 않은 2세와 3세 총수가 등장하고 총수지분이 전체의 10%에도 미달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즉 총수가 무능하거나 부패할 확률이 크게 높아졌고, 이에 따라 바로 ‘총수이익과 기업이익의 불일치’라는 재벌체제의 모순이 생겨났다.
얼마 전 이와 관련해 눈에 띄는 발언이 있었다. “그룹을 개인 회사처럼 생각하고 특히 능력 없는 자식에게 회사를 넘겨주려는 경향이 큰 문제다”라는 것이다. 진보적 시민단체가 이렇게 말했을까. 아니다. 박용성 상의회장의 주장이다. 자본의 관점에서도 전근대적 재벌체제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한 셈이다. 재벌기업들이 줄초상 난 아이엠에프 사태가 그런 각성의 계기가 된 듯싶다.
사실 대기업과 총수의 분별은 선진국에선 이미 상식이다. 일본과 유럽에선 대기업이 여러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사회적 그릇(재산)이라는 인식이 정착되어 있다. 특정 가문이 대그룹을 지배하는 스웨덴 등에서도 그 가문은 일상적 기업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미국에선 철강왕 카네기가 “총수는 사회적 재산의 관리자일 뿐”이라면서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았다. 최근 빌게이츠는 자식에게 기업경영을 넘겨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재산 460억 달러 중 1천만 달러만 상속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업과 가문을 분별하지 못하면 기업도 망치고 자식도 망친다는 사실을 오랜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다들 깨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압축적 자본주의 발전을 겪은 탓에 이런 인식이 자리잡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선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을 동일시한다. 재벌이란 말이 일반인에게 둘 다를 의미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깨트려야만 재벌개혁이 이뤄진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사실상 국민재산인 재벌기업을 재벌총수가 마치 자기 호주머니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것을 바로잡는 일이기 때문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식의 ‘재벌의 왕조적 독재체제’를 혁파하고 투명성 책임성 전문성을 갖춘 선진대기업에 이르는 길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대선자금 수사는 이런 재벌체제 개혁의 결정적 계기다. 제공된 불법자금이 기업 돈인지 총수 돈인지도 제대로 밝히고, 관련자를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해야 한다. 물론 총수가 구속되면 기업이 다소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진정한 전문경영인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 대주주가 쓸데없이 일상적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 게 선진대기업이다. 재벌총수의 처벌은 ‘정경불륜’의 고리를 끊을 뿐만 아니라 총수와 기업을 분별함으로써 재벌기업과 국민경제의 선진화를 앞당긴다. 1995년 불법 재벌총수들을 봐준 것이 경제위기를 재촉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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