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균형감각을 기르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 월간 넥스트 2004년 3월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41

 

< 월간 넥스트 2004년 3월호 기고>

    

균형감각을 기르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진보란 무엇이며 진보세력은 누구인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말들이 많지만, 이 질문들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어떤 세력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가 내려지는 경우조차 적지 않다. 예컨대 노무현대통령에 대해 한나라당이나 전경련은 좌경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는가 하면, 민주노동당이나 노동계일각에서는 그를 전경련과 한통속의 보수인사로 몰아치기도 한다. 김대중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보면 부처님 눈에는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모두가 돼지로 보인다는 무학대사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싶다. 사상의 스펙트럼이 진보(이를테면 왼쪽)에서 보수(이를테면 오른쪽)까지 죽 펼쳐져 있다고 할 때 자신보다 왼쪽에 있는 것은 진보로 보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보수로 보이는 것이다. 즉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일단 주관적인 셈이다. 혹시 사회성원 전체의 스펙트럼을 절반씩이든 어떻게든 양적으로 뚝 자를 수 있다면 보다 객관적이 될 것이다. 이때 사회성원은 크게 진보 (중도) 보수로 구분할 수 있다. 더 세분하면 진보는 급진과 진보, 보수는 수구와 보수로 갈라질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그런 구분의 경계선이 어디냐는 것이다. 사회현상이 으레 그렇듯 경계선은 칼로 두부 자르듯 정할 수 없다고만 답하면 될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어느 쪽이 왼쪽이고 또 오른쪽이냐는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엔 자유, 평등, 박애가 왼쪽 즉 진보의 가치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 이후엔 마르크스주의가 진보를 의미하기도 했고, 또 소련체제가 붕괴할 무렵엔 되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수구세력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의 개념정의가 어렵고 또 상대적․주관적이라면 진보와 보수를 논하는 게 무의미할지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의 폐기를 주장하는 논자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이념과 실천의 대립은 분명히 존재하였다. 일제하 친일파와 독립운동세력의 대립, 박정희 이후 군부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대립, 가부장적 권위주의세력과 여성해방세력의 대립이 그런 예들이다. 여기서 친일파 등 전자가 보수세력을 대표하며, 독립운동세력 등 후자가 진보세력을 대표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 오면 한나라당,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대신문, 재계가 보수진영의 핵심이며 민노당,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일부언론, 시민단체와 노동계가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 비해 그 영향력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군부나 학생운동도 여전히 각각 보수와 진보의 한 축이다.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양 진영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구분에 대해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김영삼의 민주화운동을 진보운동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 ‘집밖에선 진보, 집안에선 보수’라는 양태는 어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세력의 범위한정이 어렵긴 하지만 기존의 지배질서를 옹호하는 게 보수, 이에 반기를 드는 게 진보라고 한다면 대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나 싶다. 여기다 오늘날 우리 사회 보수는 사회적 강자(기득권 층)와 자본의 논리(시장경제, 경쟁)를, 진보는 사회적 약자(소외계층)와 인권의 논리(민주주의, 공생)를 대변한다고 하면 논의는 좀더 엄밀해 질 수 있겠다. 또 보수 쪽은 냉전적 사고 하에 미국정부와의 우호관계를 중시하고, 북한정권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견지하고, 환경보다는 개발을 앞세운다고 보여진다. 반면에 진보 쪽은 평화와 대미자주를 중시하고, 북한인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주장하며, 개발보다는 환경을 앞세운다고 여겨진다.

 

  우리 역사에서 진보세력은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족자주와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아직 대미 종속적 측면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국가주권을 되찾았고,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는 구축하였다. 경제적 평등 면에서도 선진국에는 뒤떨어지지만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오랜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시민운동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인사들이 해직․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고초를 겪었다.

 

  흔히 보수세력은 파이를 키우는 일에, 진보세력은 파이를 나누는 일에 관심을 쏟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생산을 직접 담당한 층은 노동자와 농민이고, 만약 이들을 진보세력에 포함시킨다면 진보세력이 경제성장까지 담당해 온 셈이다. 보수세력 일부에 대해선 성장의 지휘관역할을 했다는 공로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다수의 보수세력은 성장에 기여하지도 않으면서 제국주의 및 독재체제에 기생해서 과실을 챙겨왔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리고 농지개혁과 노동자대투쟁이 우리 사회의 중산층형성에 기여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진보세력은 생산의 담당자로서만이 아니라 분배개혁을 통한 성장촉진이라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자본주의발전에 큰 몫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기술개발과 산업구조 고도화도 임금인상이 촉매제였다.

 

  그런데 진보세력에는 공적만 있고 과오는 없는가. 비록 보수세력에 비해 적을지 모르지만 과오가 결코 없지는 않다. 다만 진보세력 중 어떤 집단을 논의의 대상으로 해야 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처럼 진보집단 내의 스펙트럼은 보수집단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보수파 내에서 어디 예전 운동권의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파)과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주의파)의 격렬한 대립 같은 양상이 있었는가. 또 한나라당엔 최병렬파, 서청원파 또는 소장파 정도가 있으나 이념은 별로 다를 게 없지만, 민노당 내에는 적어도 넷 많게는 열 개이상의 이념적 분파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이렇게 많고 복잡한 갈래 중 편의상 진보운동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주요 그룹들의 주된 과오에 논의를 한정키로 하자.

 

  첫째로 진보세력은 민주성을 강조한 나머지 효율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회발전은 생산력 발전과 생산관계 발전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지는데 생산력 발전을 위한 효율성 쪽에는 눈을 잘 돌리지 않았다. 효율성은 곧바로 자연파괴, 인간성파괴 혹은 착취로 인식되었다. 그러니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예컨대 노조가 생산성향상에 협력한다는 말은 꺼내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여기엔 국가 및 자본에 의한 노동탄압과 어용노조의 조종이라는 어두운 역사가 있다. 노동자권익 향상과 생산성 향상이 반드시 배치되지는 않는데도 그 어두운 역사에 짓눌려버린 것이다. 생산력 발전이 생산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도움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셈이다.

 

  효율성 경시는 시장기능의 무시와도 연결된다. 시장이 갖는 부정적 측면 즉 약육강식의 폭력성이나 공황의 발발과 같은 불안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자원배분의 효율성이라는 시장의 긍정적 측면을 도외시한 것이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던 일부 진보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세력들 역시 시장 운운하는 말은 입에 담아선 곤란했다. 기업이 부실해져서 시장원리에 따른 처리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엔 시장의 보완장치 즉 사회보장제도의 미비라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작용하기는 했다.

 

  또 시장기능을 무시하다보니 국가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국가계획경제를 주창하는 경우는 이젠 거의 없지만 그 대신 공기업 민영화에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물론 공공적 성격이 강한 네트워크 기업을 함부로 민영화해서는 안되며, 더구나 그 민영화가 재벌이나 외국자본의 소유로 귀결될 위험성이 큰 상황에서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공공성이라는 미명하에 효율성을 무시하여 민영화를 무조건 반대하거나 내부개혁조차 거부하는 경향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한편 시장기능에 대한 무시는 자본을 악으로 파악하는 일부 인식과도 연결된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일부 진보파에게는 이게 당연할지 모르지만 (진보파 전체에 해당되지는 않는데), 적어도 자본주의 타도가 당면한 과제가 아닌 현실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까가 문제다. 사실 마르크스는 이미 ?공산당선언?에서 자본의 문명화작용을 화려한 문체로 묘사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자본과 대립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선 자본의 이런 문명화 작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파는 이를 간과하기 때문에 대외개방을 과도하게 기피하는 것이다.

 

  둘째로 진보세력에겐 구체적 대안이 부족하였다. 과거 일제나 군부독재와 싸울 때에는 그들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전술 수립이 급선무였다. 가혹한 탄압 속에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여유도 없었고 입수가능한 정보도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족해방과 민주주의가 도래한 이후엔 사정이 달라진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진보파에겐 이 대안의 준비가 부족하였다. 그 때문에 김대중정부나 노무현정부처럼 부분적이나마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진보세력은 정부 내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두 정부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수색이 짙어진 것이다.

 

  근년에 와서 진보세력 내에서 화두로 된 신자유주의 반대론도 대안결핍의 한 예이다. 우리 사회에서 IMF사태 이후 시장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에 저항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이 저항 자체는 군부독재반대와 같은 하나의 반대일 뿐 분명한 대안제시는 아니다. 또 정부정책이 신자유주의 일변도이지는 않으며, 우리 사회의 주요문제를 모두 신자유주의로 환원시킬 수도 없다. 재벌개혁이나 사회보장제도 정비 등은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정경불륜 같은 개발독재체제의 유산도 우리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도 상당수 진보세력들은 서구에서 유행하는 신자유주의 반대를 직수입해서 가공처리도 하지 않았다.

 

  대안제시의 취약성은 거대담론주의와 구체적 연구부족에 기인하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른바 한국사회의 변혁방향을 둘러싼 사회구성체논쟁이 진보세력 내부에서 불을 뿜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엔 거의 흔적도 없이 꺼져버린 바 있다. 여기엔 소련 동구체제의 몰락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지만, 그 논쟁이 우리 현실에 대한 실사구시적 연구의 축적 없는 사상누각이었던 점도 한 요인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이처럼 거대담론으로부터 무매개적으로 현실을 재단하고, 정부정책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 없이 비판에만 치중하는 악습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예컨대 일부 진보세력은 해외매각은 나쁘다는 선입견 하에 대우차의 실제 경영상황이나 정부․채권단의 태도에 대한 깊은 분석 없이 대우자동차 매각반대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셋째로 진보세력은 이밖에도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보수세력도 마찬가지지만 IMF사태와 같은 위기를 예측할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 대북정책과 관련해서 인도적 지원을 제창하고는 있지만 북한체제의 민주화방안을 뚜렷이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북한민주화란 의제는 조선일보 등 보수세력에 선점당하고 말았다. 또 경직된 이념 탓인지 연고주의가 남아있기 때문인지 노동계 등 진보세력 내에 불필요한 분열이 방치․조장되고 있다. 민중을 위한다는 게 지나쳐 민중은 무오류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 우상숭배가 깨지면서 보수진영으로 전향하여 오히려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 진보세력의 주요 과오를 지적해 보았다. 민주성과 효율성에 대한 균형감각이 결여되었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감당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 주요 문제였다. 이는 가혹한 환경 때문에 불가피했던 부분도 있고, 우리 사회전체의 수준을 반영한 것도 있다. 또 보수세력과 비교한다면 결코 특별히 더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서구에서와 같은 합리적 보수가 없고 극단적 수구가 판친 상황에서 진보세력이 이만큼 한 것만 해도 장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변화한 시대적 환경 속에 우리 사회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고, 북한동포를 제대로 끌어안고, 인류전체의 발전에까지 기여하려면 진보세력도 거듭나야 한다. 과거의 사고와 행동방식에 머물러 있다간 그들이 도리어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세력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