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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존경했던 선배 이정우교수님의 추도사

동숭동지킴이 2018. 3. 19. 19:34

그리운 김기원 선생

 

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 경제학)

 

김기원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훌쩍 한 해가 지났다.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다지만 지난 한 해는 더 빠르게 느껴진다. 사람은 가도 어김없이 꽃은 피고 지고, 지금 온 천지에 단풍이 노랗고 붉다. 이제 곧 눈도 내리겠지.

김선생하고는 오랜 세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것은 대학원 시절이었지 싶다. 내가 김선생보다 4년 선배이니 대학을 같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대학원 다닐 때 김 아무개가 천재라는 명성을 익히 들었고, 학교에서 더러더러 만날 일이 있었다. 그 뒤로도 이런 저런 일로 만날 일이 많았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김선생은 한결 같았다. 학구적 자세, 성실함, 철저함, 예리한 관찰력과 기억력.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운 좋게도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를 몇 명 만난 적이 있는데, 김선생은 단연 그 선두그룹에 속한다. 천재는 흔히 교만한 법인데, 김선생은 항상 겸손했다. 뛰어난 두뇌에 늘 열심히 공부하니 일취월장, 항상 만나면 배울 게 많은 후배였다. 後生可畏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나는 <삼국지>에 나오는 여몽의 고사 士別三日 刮目相對란 구절을 좋아하는데, 김선생이야말로 사흘만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도 또 배울 게 있는 선비였다.

몇 년 전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 김기원 선생, 윤진호 선생과 함께 참석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틀 꼬박 회의를 하고 그 뒤 하루는 시내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둘 다 워낙 이름난 학구파이니 가본 데가 태국에서 쌍벽을 이루는 탐마사트 대학과 출라롱콘 대학, 그리고 엄청 큰 부처를 모신 사찰 등이었다. 기온이 워낙 높아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종일 걸었다. 점심은 일본인이 하는 식당에 들어가 먹었는데, 김선생이 일본 말을 잘 하니 주문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밤에는 학회 주최 측에서 배를 타고 강변 야경을 구경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주었다. 강에서 보는 방콕은 꽤나 멋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여러 나라에서 온 학자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거기에 전통의상을 입은 태국 아가씨들이 외국 손님 옆에 서서 즉석 기념사진을 찍고 사진값으로 약간의 돈(1-2 만원 정도)를 받아갔다. 유럽에서 온 학자들도 기념사진을 찍었고, 김기원 선생도 찍고, 나도 찍었다. 나는 그 사진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데, 김선생은 그 사진을 한국에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배에서 내린 뒤 내가 물었다. “갖고 가지도 않을 사진을 왜 찍었어요?” 김선생 대답이 그 아가씨들은 그게 유일한 수입인데, 그걸 외면할 수가 있나요?” 나는 김선생이 휴머니스트임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애처가인줄은 몰랐다.

작년 11월 말 베를린 학회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베를린에 1년 전에 가 있는 김기원 선생에게 9월쯤 이메일을 보냈다. 드레스덴 구경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가는지를 물어보자 교통편을 상세히 알려주는 답이 왔다. 11월 말에 베를린에서 만나자고 이메일로 약속했다. 11월 말 학회는 원래 김선생도 참석 예정이었다.

11월 독일로 출국하기 얼마 전 김선생한테서 이메일이 왔다. 불가피한 사유로 이미 귀국했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만날 수 없노라고. 이유는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출국 전날 김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베를린에 있었으면 여러 가지로 도와줄 텐데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며 전화로 몇 가지 안내를 해주었다. 나는 시내 교통, 시외버스 타는 법 등을 물어보았다. 김선생은 예의 그 성실함으로 열심히 설명해주고 전화를 끊었는데, 몇 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설명에서 빠진 게 있다며 추가 설명까지 해주었다. 게다가 자기가 베를린에 없어서 도움을 못 주는 대신 혹시 안내가 필요하면 연락을 취해 도움을 받으라고 한국인 학생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베를린에 가서 이 학생하고 통화는 했으나 별로 도움 받을 일이 없어서 만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베를린 학회에 참석하면 독일인 아무개를 만나게 될 텐데, 그 사람은 자기가 왜 일찍 귀국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되더라도 한국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마고 약속했다.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를린 회의에 김선생이 말하던 그 독일인은 불참했고, 그래서 나는 김선생의 조기 귀국 이유를 정확히 모른 채 돌아왔다.

1주일 베를린에 가서 잘 지냈고, 김선생이 안내해준 대로 드레스덴까지 잘 구경하고 왔다. 귀국한 11월의 마지막 밤쯤인가 보다. 김선생한테 전화를 해서 덕분에 베를린 잘 다녀왔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어디 어디 갔느냐고 묻기에 어디 어디를 가보았다고 했더니 “1주일 동안 참 많이 보았네요하며 놀랐다. 박물관을 몇 개 보았느냐고 묻기에 페르가몬 박물관 등 5개를 봤다고 하니 자기는 1년 넘게 베를린에 살면서 페르가몬 1개밖에 못 봤다고 하며 웃었다(베를린에는 박물관, 미술관이 150개나 있다). 속으로 나는 이 양반 베를린에서 틀어박혀 공부만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기 직전 내가 물었다. “김선생 귀국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니 내가 묻지는 않겠는데, 그 이유라는 게 혹시 걱정할만한 거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거요?” 그는 웃으면서 별 문제가 없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1주일 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부음이 들려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며칠 전만 해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금도 환자 같지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전화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나는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보다 짐작하면서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김선생 장례식에 참석해서 며칠 전 통화를 생각하니 기가 찼다. 본인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은 채 별로 중요할 것도 없는 나의 베를린 여행을 도와주기 위해 그렇게 최선을 다했구나.

김선생은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었다.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끝까지 파고들었고, 논리를 개발하고, 사람들을 설득해낼 키워드까지도 생각했다. 그러니 그냥 책상머리에 앉아 책만 읽는 서생하고는 많이 달랐다. 그는 진정한 실사구시의 학자였다. 몇 년 전에는 심지어 경제학자들이 다루기를 꺼리는 매춘 문제까지 깊이 연구했다. 네덜란드, 스웨덴의 제도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참여정부의 매춘 불법화, 단속 정책이 잘못 됐다고 열을 올렸고, 비판하는 글까지 썼다.

본인은 정치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민주시민으로서, 또 경제학자로서 정치가 좋아져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선거 때마다 야당을 도와주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심지어 소위 도사까지 찾아갔다. 김선생은 철저한 과학자인데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희한하게도 점장이, 미신을 믿는 할머니 수준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리고 재미있어 했다. 그만큼 절박하게 생각했다는 뜻일 게다. 선거철에 둘이 만나면 이런 저런 의논을 하고, 작전을 짜고... 이런 걸 참 많이 했다. 그의 기발하고 용감한 아이디어가 실제 정치권에서 채택된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는 심야토론같은 TV 토론에 나가서 조리정연하고 침착하게 논리를 전개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몰아붙이곤 했다. 아마 김기원 선생이 출연한다고 하면 보수 진영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었지 싶다. 진보경제학자로서 드물게 새누리당 의원들 세미나에 초청받아 본인의 지론을 거침없이 펴기도 했다. 이럴 때는 혹시 오해를 받을까봐 참석 자체를 꺼리는 게 일반적인데, 김선생은 거리낌이 없었고, 주변의 어느 누구도 김선생을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진보학자는 별로 없다. 그는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지만 진보파 중 누구도 김기원 선생에 섭섭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보 진영 모두 그를 믿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김선생은 워낙 정책, 정치를 열심히 궁리하고 아이디어가 많기 때문에 내가 김선생에게 밖에서 자꾸 훈수만 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정부에 들어가서 뜻을 펴보시오라고 권한 적도 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본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김선생 건강이 뭐가 문제요? 내가 보기에는 젊었을 때는 빼짝 말랐었지만 중년 이후에는 체중도 조금 불어난 것 같고, 안색도 좋아졌고, 건강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 김선생은 본인의 정부 참여는 한사코 반대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건강이었다. 이제 건강 문제로 김선생이 떠나고 나니 아마 하늘이 책사를 필요로 해서 일찍 데려갔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도 방송통신대 부근을 가면 김기원 선생이 생각난다. 사당역 부근을 지나갈 때면 김선생이 천하대사를 논하던 다방이 생각난다. 이런 저런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문득 김선생이 그립고, 김선생한테 전화만 한 통 걸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고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세상은 날로 혼탁해지는데, 진보 진영은 너무나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김기원 선생은 이 시대 보기 드문 선비이자 책사였다. 이제 내년 총선, 후내년 대선이 다가오는데 참으로 걱정이다. 누구와 천하대사를 논하고 정치와 정책을 의논할꼬. <삼국지>에는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쫓는데’(死孔明走生仲達), 김기원 선생이시여! 부디 혼이라도 돌아와 우리를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