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의 정치학 : 증세를 우습게보지 말자>
오늘자 조선일보는 세제개편 문제에 따른 GH지지율 관련 기사로 신문을 도배했습니다. 그 중의 일부 기사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http://news.chosun.com/…/htm…/2013/08/17/2013081700234.html…
‘한국 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세제 개편소동으로 GH 지지율이 54%로 지난주에 비해 5% 가량이나 떨어졌습니다. 특히 중산층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화이트컬러의 경우엔, 지지율이 52%에서 38%로 14%포인트나 급락했습니다.
한국의 여론조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GH가 급히 세제안을 수정한 것을 보건대, 이 여론조사가 크게 틀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번 세제개편 특히 중산층 증세에 대해 민심 이반이 일어난 데에는 기본적으로 조세의 형평성 문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소득층이나 거대기업에 비해 중산층에게 세금이 부당하게 높게 부과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GH정권 출범 이후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해 국세청을 통해 국민들에 대한 세금공격이 대대적으로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얼마 전 몇 사람과 자리를 같이 했는데, 거기서 세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모두들 자기 자신이거나 가까운 주위사람이 세금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과거 여러 해 동안의 세금기록을 모두 뒤져, 때로는 어처구니없이 세금을 추징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중산층이었는데도 이런 세금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세금공격이 세금 형평성 문제보다 더 민심이반을 불러오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세금의 정치학’이란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GH정권의 증세안이 발표되자 민주당은 처음에 ‘세금폭탄’이란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종부세에 대해 새누리당이 세금폭탄이라면서 공격한 것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진보개혁파쪽에선 민주당의 이런 반응을 비판했습니다. 과거 새누리당의 잘못된 정치를 답습하는 정략적 반응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복지확대를 위해선 증세가 필요한데, ‘세금폭탄’이라는 저차원적 대응을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해 민주당은 더 이상 ‘세금폭탄’이라는 식의 공격을 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공격과는 무관하게 민심은 많이 이반했습니다. 국정원 댓글 사태에서는 별로 동요하지 않던 GH 지지가 몇 푼 안 되는 것 같은 증세 (월 1만원 남짓)에 기우뚱한 것이지요.
사실 민주당의 ‘세금폭탄’ 공세는 바로 이런 민심이반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지만, 권력투쟁의 장(場)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정략적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진보개혁파 지식인들은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증세의 당위성을 설파했습니다. 복지확대를 위해서 증세하지 않고 무슨 다른 방안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OECD에 비해 낮은 복지수준을 고려할 때, 한국의 증세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진보개혁파 지식인들이 고려하지 않는 것이 ‘세금의 정치학’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증세를 좀 우습게보고 있습니다. 증세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타협해도 자기 재산을 뺏어가려는 쪽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대부’에서 어떤 마피아 세력이 다른 마피아 거두인 말론 브란드를 죽이고 그 아들과 협상하려는 전략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전략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위의 경구가 일정 정도 진실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조세저항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의 진보개혁파는 당위론(當爲論)에 몰두하는 탓에 현실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봅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직접적 계기는 국왕이 증세를 위해 3부회를 소집한 일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는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이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한 데에도 공약을 어기면서 증세한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처럼 증세는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 증세 대신에 (직접적 부담을 덜 느끼는)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조달해 왔습니다. 일본의 부채비율이 GDP의 2배를 넘어서고, 미국과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자꾸만 국가채무가 늘어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입니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증세와 관련해, 혁명정권은 조세저항을 개혁정권보다는 쉽게 돌파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혁명정권이 아닌 오늘날의 대부분 정권들은 증세문제에 과감하기 어렵습니다.
GH의 세제개편안 발표 이후 어떤 증세가 바람직한가 하는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고소득층의 구간을 세분화해서 증세를 한다든가, 거대기업의 법인세율을 높인다든가, 부가가치세율을 유럽 수준으로 높여간다든가 하는 여러 안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안 중에 제대로 정치적 고려를 하고 있는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논의는 현실의 무게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않은 논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라는 책에서 강조한 것은, 한국의 진보파들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노정권의 정치문제까지 분석해 보았던 것입니다.
증세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위론도 중요하지만 그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전술론도 중요합니다. 그게 없으면 자민당에게 정권을 내준 일본의 민주당 꼴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진보파들이 북유럽의 고부담-고복지를 주창합니다. 그런데 제가 견문이 짧아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고부담-고복지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가능했는지에 대한 한국의 연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 대한 ‘증세의 정치학’ 연구를 기대하겠습니다. 그것 없는 복지확대론은 ‘안코 없는 진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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