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33) : 동독 엘리트와 북한 엘리트

동숭동지킴이 2014. 7. 6. 22:26

 

 

베를린 통신 (33) : 동독 엘리트와 북한 엘리트

 

지난달에는 동독정권 말기의 수상을 역임했던 모드로프(Hans Modrow)를 면담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86세의 고령임에도 정정했고 눈빛도 날카로웠습니다. 특히 동독 말기를 회상할 때는 날짜까지 일일이 밝히는 놀라운 기억력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하고 한반도 문제에 주는 시사점을 짚어볼까 합니다. 다만 이번 인터뷰는 제가 조직한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인터뷰에 갑작스럽게 합류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제가 알고 싶은 내용을 충분히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모드로프는 198911월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잠시 수상을 지냈다가 19903월 동독 최초의 민주선거 이후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독일 통일 이후엔 동독 집권당 SED의 후신인 PDS의 명예의장을 거쳐 지금은 Die Linke(‘좌파라는 뜻으로, PDSSPD좌파가 합친 정당)의 원로회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은 Die Linke 본부건물(아래 사진) 내에 있었는데, 3평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크기로 6명의 인터뷰팀이 들어서니 제대로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모드로프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올 줄 몰랐다며 미안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독재정권의 고위직을 지낸 인물답지 않게 겸손했습니다. 자기가 강연하듯이 말을 길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중간에 몇 차례나 했으니까요.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에 가까운 SED개혁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드레스덴의 민주화시위를 그가 저지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통일 이후 그에겐 동독 시절의 정치행위에 대한 재판이 행해져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면 그의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먼저 그가 김일성을 만난 내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984년 김일성은 동독을 방문했고 모드로프가 책임자였던 드레스덴에도 사흘이나 머물렀습니다. (아래 사진 참조.) 김일성의 동독 방문에 대해선 예전에 한국 기자들이 모드로프에게 질의한 적이 있고, 그때 모드로프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1984년에 김일성이 유럽여행 중이었다. 김일성이 어느 역에서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긴 기차를 타고 왔고, 모든 필요 물품을 다 싣고 왔다. 또 정권 내 거의 모든 사람이 타고 왔다고 보면 된다.

 

당시 동독 정치가들은 이를 두고 김정일만 평양에 남겨뒀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쿠데타 등에 대비하기 위해) 반대자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김일성이 드레스덴에서 사흘을 묶었고, 당시 드레스덴 지역 책임자였던 내가 대접을 했다.

 

김일성이 아침에 산책했을 때도 모든 수행자가 수첩을 들고 김일성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적었다. 김일성은 엘베 강에서 유람선을 타기도 했고, 산악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인상적이었다는 말과 함께 마음에 들어 했다. 김일성이 나의 북한 방문을 요청해 같은 해 방북했다.]

 

 

1956년 김일성이 동유럽을 순방할 당시 국내에서는 김일성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1984년 김일성의 행태도 이해할 만하지요. 그리고 김정은의 수행자들이 수첩을 들고 다니는 행태는 할아버지 때부터의 일인 셈이지요. 박근혜의 국무회의 모습이 유사한 것도 한반도 문화의 한 모습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인터뷰에서 김일성의 동독 방문이 아니라 모드로프의 평양 방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평양에 가서 북한인들을 만났더니 김일성 주석의 동독 방문은 TV에서 16번이나 방영되었다. 그리고 그 45분짜리 방영분 중 30분가량이 드레스덴에서 모드로프 당신과 같이 다니던 모습이었다고 했답니다. 드레스덴과 모드로프에 대한 김일성의 인상이 아주 좋았던 모양입니다.

 

또 김일성은 자신과의 면담에서 한반도에 앞으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통일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엔 중국과 소련이 힘이 있었는데, 그때 북한이 남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김일성이 평화통일을 강조한 것이 눈여겨 볼 부분이지요. 다만 김일성이 말한 남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발휘가 뭘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했습니다. 아마 모드로프도 그걸 캐묻지 않았을 것이고, 또 우리 인터뷰에서 그걸 따지고 물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주된 인터뷰 주제였던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에 대한 차별을 먼저 언급했습니다. 같은 경력자인 경우 동독인은 서독인보다 약 10% 은 연금을 받으며, 통일 이전에 태어난 아이들도 차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힘없는 노인-아동 차별인가요.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가운데 아직 통일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문제는 여러 사람들도 지적한 사안들이라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90년 통일 사이에 다른 선택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기존의 서독 기본법(헌법은 아니지만 헌법에 해당)을 그대로 둔 채 실제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동서독이 대등한 지위로 통일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과연 정치적으로 가능했을지 의문이지만, 그의 회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남북한 통일 시에는 새로운 헌법이 필요할까요.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남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프랑스인 감독이 평양시장과 인터뷰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사전 질문지에 없던 통일이 되면 수도는 어디로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시장 주위의 북한인들은 당황해하면서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하면 어떡하느냐는 표정과 몸짓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평양시장은 태연자약하게 그 문제에 대해선 일찍이 주석께서 교시를 내리신 바 있다. 평양과 서울 두 곳을 동시에 수도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노무현정권 무렵 수도이전에 대해 위헌판결이 내려진 바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통일 이후 북한주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서울과 평양 두 곳을 수도로 정하거나, 서울도 평양도 아닌 제3의 장소를 수도로 정한다면 그 때문에라도 헌법을 개정해야 하겠지요.

 

한편, 모드로프는 19901월 수상으로서 고르바초프를 방문했을 때, 연방제 등을 거치는 3단계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이를 관철하지 못했고, 특히 고르바초프는 통일독일의 군대는 중립적이어야 하고 NATO에 가입하지 않게 한다는 자신과의 합의사항도 지키지 못했다고 고르바초프를 비판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독일이 군사적으로 중립적이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미국 측 주장에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의 철수비용을 독일이 부담케 하는 문제에만 집중했다고 합니다. 이리해 NATO의 일원이 된 독일이 지금 군사 외교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고, 이는 Die Linke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에게 SED개혁파로서 과연 무엇을 개혁(Umgestaltung)하려 했는지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던 듯 눈에 생기를 띠면서, 이건 긴 설명이 필요한 큰 문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으므로 짧은 답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동독이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그것은 월세, 교통비, 식료품비 등이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므로 이를 바로잡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동독인의 월세는 월급의 8~10%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월세가 가처분소득의 40~50%인 지금 상황과 비교해보면, 동독의 월세가 얼마나 낮게 책정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낮은 월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정부가 재정적으로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고, 이는 재정파탄을 초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재정개혁과 더불어 모드로프가 강조한 것은 기업의 국제경쟁력 확보였습니다. 동독기업들이 통일 이후 대거 파산에 내몰린 이유 중의 하나가 국제경쟁력 상실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의 지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서독과 일본의 기업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이기도 했던 모드로프여서 이런 개혁방안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모드로프에 따르면, 동독기업은 단지 동유럽권 내에서의 경쟁력이 아니라 세계무역에서의 경쟁력확보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선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대폭 줄여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공산당독재 하에서도 국제경쟁력을 갖는 기업들로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는데, 북한이 만약 개혁-개방 노선을 취한다면 어떤 정도로 획기적으로 변화할까요.

 

모드로프는 어찌 보면 통일독일에 대한 반동적 불평분자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서독의 인권침해가 동독보다 더 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독일사회에서 지나치게 좌편향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Die Linke의 주요 멤버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공산독재정당의 지도자였다고 생각되기 힘들 정도로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옷차림과 말투가 그러했고 사무실 크기가 그걸 보여주었습니다. 통일 이후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악명 높은 Stasi의 책임자 Erich Mielke도 이런 면에선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게 동독 엘리트들의 수준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들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속에서도 온갖 지저분한 행태를 보이는 후진국 아니 이탈리아,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 지도자들보다는 동독엘리트는 높은 직업윤리를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게 제가 요즘 계속 강조한 문화수준문제입니다.

 

서독은 이런 높은 문화수준을 유지했던 동독을 흡수했는데도 통일 이후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반도는 어떨까요. 남한의 문화수준이 서독에 비해 형편없다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요즘 정치판을 보시고 재벌들을 보시고 고위직 물망에 올랐던 교수나 법조인의 행태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어떨까요. 북한엔 모드로프처럼 나름대로 직업윤리에 충실한 엘리트가 뿌리를 내리고 있나요. 김정은 같은 세습왕조의 후손은 제외하고 생각해 봅시다. 장성택이 개혁파 지도자로서 외부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었지만, 그는 돈과 여자 문제에서 별로 자유롭지 않았고, 결국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업차 북한 고위층을 접촉했던 분들에 따르면, 김달현과 연형묵이 북한경제의 현실과 어려움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했던 엘리트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 말고 북한에 어떤 엘리트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내각총리인 박봉주는 어떤 인물일까요.

 

분단된 2개의 나라가 통합될 때에는 대중의 통합과 아울러 엘리트들의 통합도 중요합니다. 동독의 엘리트들은 많이 소외되긴 했지만, 그래도 SED의 후신인 Die Linke를 비롯해 나름대로 동독 엘리트들을 통합할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해왔습니다.

 

다만 베트남처럼 일방적 군사정복으로 통일된 경우엔 남베트남의 엘리트들은 숙청되거나 망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점령이 아니었던 예멘의 경우엔 통일되었다가 다시 분단되었다가 무력정복이 행해진 어려운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

 

독일통일을 염두에 두고 통일대박론을 박근혜가 제창했습니다. 대박이란 말에선 갑자기 넝쿨 채 굴러드는 복이 연상됩니다. 하지만 통일은 결코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애당초 별 고민 없이 정치적 쇼를 벌인 박근혜가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감당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남북한 관계가 지지부진하지요.

 

엘리트의 통합 문제 하나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동독의 정치 엘리트가 집결했던 SED는 변신을 거듭해 Die Linke로 자리잡아 동독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버텨가고 있습니다. 조선노동당 간부들도 어쨌든 북한의 엘리트입니다. 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이들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을까요. 용인하지 않을 경우 북한 엘리트들이 그냥 참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통일을 아예 포기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들은 남북한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 조치는 취하지 않거나 오히려 후퇴시켰습니다. 그들은 통일을 말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지요. 반면에 진보파들은 어느 정도 심각하게 통일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까요. 아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