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16) : 김씨왕조의 북한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上)

동숭동지킴이 2013. 12. 20. 22:38



베를린 통신 (16) : 김씨왕조의 북한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上)


우선 글의 제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씨왕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게 거슬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수구꼴통’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사실로서 일단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 책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에서도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수구꼴통들과 생각이 다 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북한과 우리가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에서는 그들과 제 생각이 크게 다릅니다. 그러니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고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블로그 글을 올리고 나서 곧바로 장성택이 처형되었습니다. 최고재판소도 아니고 국가안전보위부의 재판소에서 3심제가 아닌 단심제로 판결을 내리고(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국정원에서 재판한 셈임), 곧바로 처형을 집행하는 모습은 남한은 물론 전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더욱이 처형 이후 로동신문에 거론된 죄목들은 “김정일 추대 시에 건성으로 박수를 쳤다”는 등 민주주의 사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이른바 종파 또는 스파이 사건에 대한 처형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번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50년대 박헌영이나 연안파를 숙청할 때는 스탈린의 정적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공개재판이라는 절차를 거쳤고, 박헌영도 사형판결 이후에 1년 이상이 지나서 형을 집행했으니 이번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덕적 비판’이 아니라 ‘비판적 도덕’입니다. 송두율 박사처럼 ‘내재적 접근법’이란 말로 북한사회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거꾸로 개탄만 하고 북한사회의 작동논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장성택의 숙청(처형 포함)이란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앞으로 북한사회는 어떤 길을 걸어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북한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까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리해볼까 합니다.


장성택 숙청 이후 한국과 세계에서는 많은 기사와 해설을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신뢰하기 힘든 추측 기사 또는 허위과장 정보도 많았습니다. 예컨대 장성택이 정치국 회의에서 끌려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장성택이 이미 처형당했다는 보도가 중앙일간지에 실렸을 정도니까요. 이설주와 장성택의 염문 어쩌구도 마찬가지 차원이겠지요.


그리고 전문가들 사이에도 해석이 엇갈렸습니다. 장성택 숙청 원인을 비롯해 장래 전망도 정반대로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원래 전문가를 지나치게 숭상하는 ‘전문가주의’를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만, 특히 정보가 제한된 북한과 관련해선 전문가들의 의견에도 한계가 많습니다.


예컨대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자,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전문가들 대부분은 “북한체제가 곧 붕괴한다”고 예측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예측을 근거로 미국의 클린턴 정권은 1994년 북미 제네바협상에서 약속한 것(경제지원 및 경수로 건설)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커진 것이지요.


다만 1990년대와는 달리 탈북자가 많이 생기고 북한체제가 이완된 지금은 과거보다는 북한에 관한 정보 획득이 용이해졌습니다. 그래서 국정원도 장성택 숙청을 며칠 일찍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그렇다고 국정원 개혁을 방기하자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만). 그리고 전문가들의 신뢰성도 과거보다는 약간 높아지기는 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을 무시하지는 말되 지나치게 신봉하지도 말아야겠지요.


그러면 먼저 북한체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게 다른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실마리이니까요.


이씨왕조는 천황제 국가 일본의 침략으로 몰락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천황제 지배가 물러나자 새롭게 김씨왕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 북한체제입니다. (이씨왕조란 표현은 일본이 조선왕조를 폄하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만, 현재의 북한체제와 비교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왕조체제에서의 왕권은 시기에 따라 달랐습니다. 이건 유럽에서도 그랬고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김씨왕조의 왕권은 적어도 이씨왕조 후반기(세도정치 시기)의 왕권보다는 훨씬 강력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김정은 정권이 1인 지배체제인지 집단지도체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왕조체제란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정은이 점점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할 것도 분명합니다. 장성택의 숙청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겠지요.


이처럼 북한은 근대 시민사회의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북녘에서는 그냥 왕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사우디의 왕정이나 아프리카에서 부족장들이 지배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지요. 그리고 이 왕조는 상징적 존재인 영국이나 북유럽 왕들과는 달리 강력한 독재권력을 행사하므로, 저는 “왕조적 독재체제”라고 불러오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공산주의 이념정당인 로동당이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고요?  원래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이념은 항일투쟁의 하나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80년대의 NL과 PD가 따지고 보면 민주화 투쟁의 방편이었던 것과 비슷합니다.(남한사회가 그런 대로 민주화된 오늘날도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그 방편에 사로잡혀 있기는 합니다.  석가가 "강을 건너면 떼목을 버려라"고 말한 것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김일성 집권 이후엔 그 왕조체제의 포장물 즉 ‘걸치고 있는 옷’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김일성정권이 단행한 산업의 국유화나 지주토지의 무상몰수도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라는 왕토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리해 세습이 이어지면서 북한체제의 왕조적 성격이 강화됨에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은 점점 그 영향력이 사라져갔습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을 읽는 북한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도서관에서도 그들의 책을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최근엔 김일성 광장에 걸려있던 마르크스-레닌의 대형사진도 치워졌지요.


대신에 주체사상이니 선군사상이니 하는 북한왕조에 걸맞은 대체물이 생겨났습니다. 근년에 동명왕릉과 단군왕릉을 건립한 것도 북한체제가 왕조로서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입니다. ‘백두혈통’ 운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김씨 왕조 북한이란 것은 정치 차원에서의 규정입니다. 경제면에선 오랫동안 계획경제적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엔 시장경제적 요소가 상당히 침투해 있는 일종의 '복합경제 체제'입니다. 그러니 왕조체제 하의 계획경제(+시장경제)라는 복잡하고 특이한 사회가 되었고, 이것이 갖는 의미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요.


이런 북한체제와 같은 왕조적 성격을 남한 역시 초기에는 갖고 있었습니다. 국부(國父) 이승만 운운 하고 영구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게 그 하나의 예입니다. 그러나 여러 어려운 과정을 거쳐 남한은 이제 근대적인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4.19혁명, 광주항쟁,  6.10 항쟁과 같은 민중의 투쟁이 바로 그런 변화를 이끌어낸 동력입니다. 게다가 남한은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왕조체제가 자리잡을 수 없는 사회로 거듭났습니다. 그래도 그 잔재는 남아 있습니다. 재벌의 세습독재체제를 보십시오. 그리고 박정희를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숭상하는 모습들도 바로 그런 잔재의 일부입니다.


어쨌든 이처럼 북한체제를 김씨왕조로 파악한 전제 하에서 장성택 숙청사태를 파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장성택은 왜 숙청되었는가?


전문가들에 따라 해석이 약간씩 다릅니다. Lankov 국민대 교수는 제2인자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유방을 옹립한 장자방이 조용히 은둔해서 목숨을 보존한 반면에, 설치고 다닌 한신이 죽음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장성택이 한신처럼 김정은 옹립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설마 고모부인 나를 어쩌겠냐는 심산인지 2인자로서의 처신에 조심성이 결여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난 글에서 장성택이 남한에 왔을 때의 행태를 소개한 것이 기억나시는지요.


한편, 이권을 둘러싼 군부와의 갈등이나 강경파와 개방파(장성택)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또 직접적인 계기로서는 11월 장성택 일파의 술자리에서 일부 인물이 “장성택 만세”를 외쳤다든가, 장성택이 자기 산하의 ‘수산 부업 기지’(수산물 수출회사?)를 무도방어대(특정 군대)에 넘기라는 김정은의 지시를 무시했다든가, 장성택 계열의 일부 인물들이 망명하려고 했다든가 하는 썰(說)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로동신문>에 보도된 죄목으로 보건대, 모월 모시에 장성택이 쿠데타를 결행할 모의를 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장차 나라 상황이 극도로 나빠지면 그때 가서 쿠데타를 하겠다는 막연한 내용뿐입니다. 이것도 고문을 통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성택이 위세를 부렸고, 혹시 장성택과 가까운 인물 중에 남한이나 미국과 내통한 인물이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국정원 등이 어디서 정보를 빼냈을까요? 오직 통신감청에 의해서만?). 하지만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결정적 증거도 없는데 처형당한 것입니다.


제가 페이스북에 썼듯이, 어느 독일인의 해석대로 시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미국(및 남한)이 김정은을 제거하고 장성택을 옹립할 생각조차 아예 하지 않도록 “거추장스럽고 불안한” 존재인 장성택을 미리 제거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왕조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납니다. 예컨대 태종이 자신이 왕권을 잡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무구, 민무질을 왕비의 동생들인데도 처형해버린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심지어 처형의 죄목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태종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뜻을 표명했을 때, 이 민씨 형제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게 죄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김정은이 추대될 때 건성으로 박수쳤다는 것과 어찌 이리도 비슷할까요.


태종은 18년 재위 기간 중 4차례나 왕위를 넘기겠다는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난감했을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면 세자에게 밉보여 장차 후환이 두렵고, 소극적으로 반대하면 태종에게 밉보일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해서 태종은 신하들의 충성을 시험하고 아울러 정적을 숙청한 셈입니다. 도대체 건성으로 박수쳤는가 열성적으로 박수쳤는가, 소극적으로 반대했는가 적극적으로 반대했는가는 주관적인 해석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입니다.


왕조적 독재란 이런 사회를 말합니다. 참고로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왕자의 난을 피해 목숨을 부지한 방식과 양녕대군과 비슷한 스타일의 김정남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방식도 비슷하지요.


또한 장성택을 숙청하게 되는 좀더 구체적인 북한 사정에 대해선 정창현박사가 <통일뉴스>에 쓴 다음 글을 한번 참고해 보십시오. (아래 링크 주소를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십시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351


그리고 장성택의 처형이 갖는 어이없음을 서울대 한인섭 교수도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그리 길지 않으므로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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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재판...약간 정비하여 정리해봅니다]


1.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이 스노우볼에 대해 내린 단죄와 흡사하다. 모든 잘못은 장성택 탓이다는 것.


2. "천하의 만고역적"은 조선시대 역적재판이고, "백두산절세위인"은 해동6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하는 용비어천가의 재림이다. 북한체제의 통치원리는, 왕조시대로 완벽히 복귀했음을 아예 감추지도 않는다


3. "건성건성 박수친" 것도 "천추에 용납못할 대역죄"의 한 부분이다. 쏘련 스탈린시대 때, 스탈린찬양의 박수를 시작하면 중간에 박수+환호를 멈출수없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손에 통증이 와도 말이다. 건성건성했다간~


4. 오스만터키때 새 술탄이 즉위하면, 근위대들은 그 형제들에게 달려가 목졸라죽였다. 유일독점권력 앞에는 형제도 방해물이었을뿐. 그 점에서 제2권력자였던 장성택의 처형은 무법횡포지만, 권력법칙에는 충실했는지도~


5. 죄목 중 "원수님의 친필서한을 화강석에 새겨 모시자는 의견을 묵살하다가 한쪽구석에 건립케한 망동"도 있다. 앞으로 김정은의 친필서한은 천연화강석에 크게 모시게 될 것, 조금이라도 규모 작게 하자는 건의안 냈다간 장성택 꼴이난다


6. 2009년 통화개혁 실패,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외국에 팔아넘겼다~경제정책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 모든 실패의 배후조종자는 장성택이라는 것은, 모든 실패가 스노우볼 탓이라는 동물농장 논법과 일치


7. 개혁가, 대외협력 등의 이미지를 장성택이 갖고있는 모양. 숙청작업 끝나기 전엔 대외관계 중단할 듯.실명 거론 인물이 다수인 것으로 보아, 숙청의 규모는 어마어마. 죄가 있어 숙청하는게 아니라, 숙청할 사람에겐 죄가 있기 마련이다는 식


8.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단심으로 처리한듯. 군사재판소의 법적근거는 있으나, 특별군사재판소(단심)은 이번에 처음 드러난듯. 국가전복음모죄는 "반국가적 목적으로 정변..에 참가한자, 정상이 특히 무거우면 사형..에 처한다"(형법)


9. 판결.판정 집행법에 따르면, 사형집행은 총살형이 기본. 집행지휘문건을 받은 날부터 "10일안으로" 집행한다고 규정. 어느 나라나 조기집행일수록 정치재판임은 우리 경우에도 마찬가지. 인혁당(확정 다음날 집행), 김재규(확정 4일후 집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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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장성택에 대해 판결 후 곧바로 처형한 데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항이 고려된 것 같습니다.

첫째로, 북한은 왕조체제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전시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전시에서의 즉결처분과 같은 식으로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박헌영 때와는 달리 장성택의 세력은 박헌영보다는 뿌리가 깊고, 반대로 김정은의 권위는 김일성보다는 훨씬 취약하기 때문에 “강자의 (약간의)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셋째로, 처형을 미루면 과거에 중국과 소련이 박헌영을 살려둘 것을 요구한 것처럼, 혹시 중국이 압력을 행사할까봐 시간적 여유를 두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북한체제의 성격과 장상택이 왜 숙청되었는가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글이 이미 길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장차 북한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와 이런 북한사회와 우리는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지에 관해선 다음 글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