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9) : 아련한 혁명의 그림자

동숭동지킴이 2013. 11. 3. 20:52

 

 

베를린 통신 (9) : 아련한 혁명의 그림자

 

지지난주 김누리교수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김교수를 따라 두 곳의 묘지를 찾았습니다. 오늘은 그 묘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까 합니다. 일종의 베를린관광 안내인 셈입니다.

 

 

첫 번째로 방문한 묘지는 U-Bahn 6 Oranienburger Tor 역 근처의 Dorotheenstädtischer Friedhof였습니다. 원래 동베를린 지역에 속했던 곳입니다. 여기엔 독일의 정신적인 지도자 묘비가 많았습니다. 이 묘지에 들어가면 입구 근처 오른쪽에 누구의 묘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보여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제일 먼저 가본 곳은 독일의 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Bertolt Brecht 부부의 묘였습니다(아래 사진). 브레히트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작품 중엔 “서푼짜리 오페라”처럼 한국에서 공연된 것도 있습니다. Brecht Haus(아마도 기념관)도 여기 묘지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만, 시간에 쫓겨서 들르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선 한국에도 알려진 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소개하겠습니다. 독일어 원문과 번역문을 이어서 옮겨봅니다. 나치 시대 등 어려운 시대를 살아 온 아픔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ICH, DER Ü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그 브레히트 묘 바로 옆에는 Hanns Eisler의 묘가 있었습니다(사진). Eisler는 음악의 K. Marx라고 불렸던 인물로 동독국가(DDR Hymne)를 작곡했습니다. 오늘날도 베를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음악대학(Hochschule für Musik Hanns Eisler)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면 동독 국가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곁들여 서독 국가(國歌)였으면서 오늘의 독일국가로 된 노래도 같이 링크했으니, 들으면서 비교해 보십시오.

 

 

 

 

http://www.youtube.com/watch?v=DTV92wqYjfA

http://www.youtube.com/watch?v=5q8xvkjqeHQ

 

 

그 묘지를 지나니 Herbert Marcuse 교수의 묘가 보였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알아보기 힘든 작은 묘였습니다(아래 사진). 제가 대학 다닐 당시 일종의 의식화 서적인 『이성과 혁명』등의 책을 쓴 뉴 레프트(New Left) 운동의 사상적 리더였지요.

 

 

 

 

 

그런데 베를린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공부하긴 했지만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그의 묘비가 어찌해 여기 베를린에 있는가 했더니, 그가 독일에 강연하려 왔다가 사망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묘지에는 나치 희생자들의 묘도 있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진보적 신학자-목사 Dietrich Bonhoeffer(아래 사진) 묘도 거기 있었습니다.

 

 

 

 

 

이어서 쉽게 찾기 힘든 작은 길로 접어드니, Hegel과 Fichte의 묘도 보였습니다.(헤겔 묘는 아래 사진). 헤겔 묘비도 브레히트나 마르쿠제 묘비보다는 컸지만 피히테 묘비보다는 작았습니다. 약간 의외였던 것은 이런 유명 인사들의 묘비보다 훨씬 크고 멋진 묘비는 양조장 주인의 묘비였습니다. 죽고 나서 묘비가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겠습니까만,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명성에 어울리게 멋진 묘비는 다음으로 찾아간 과거 동독 국립묘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동독 국립묘지의 현재 명칭은 Zentralfriedhof(central graveyard) Friedrichsfelde입니다. U-Bahn 5의 Lichtenberg역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묘역의 명칭은 Armenbegräbnisse(paupers' cemetery)였는데, 동독 정권 시절에 Gedenkstätte der Sozialisten로 바뀌었다가(아래 사진 참조), 독일통일 이후 현재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베를린에서는 제일 유명한 묘역으로, 상당히 넓어서 산책하기에도 좋아 보입니다.

 

 

 

 

 

묘역에 들어가니 곧바로 커다란 묘비가 보였습니다. 묘비명은 “DIE TOTEN MAHNEN UNS”(The dead admonish us. 죽은 자가 우리를 경고한다)였습니다.(사진) 뭔가 의미심장하지요. 그 묘비 밑에 대표적인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묘들이 놓여있었습니다.

 

 

 

 

 

Rosa Luxemburg, Karl Liebknecht처럼 1차대전이 끝나고 우익 무장단에 의해 살해된 인물들의 묘가 맨 앞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Rosa는 1980~90년대 한국 운동권에게도 잘 알려진 혁명가이지요.

 

 

당시 운동권 남성들 특히 PD계열들이 레닌을 닮으려고 했다면, 운동권 여성에겐 Rosa가 우상이었습니다. Rosa는 저와도 인연(?)이 있습니다. 제 석사 논문에서 Adam Smith, Karl Marx, Rosa Luxemburg의 이론을 비교했으니까요. Rosa에게 경제이론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만, 그녀는 Die Akkumulation des Kapitals(The Accumulation of Capital)라는 역작을 쓴 바 있습니다.

 

 

제 논문에선 Rosa 이론의 허점을 지적했지만 그녀에 관한 나름의 정(?)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묘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김누리교수와의 혁명가 묘지 순례가 끝나고, 저녁에는 김교수와 친분이 깊은 베를린공대 Manfred Kappeler 명예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교수가 베를린 연수팀에게 가볍게 이런저런 생각을 전했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김교수에 따르면, Kappeler교수는 70년대의 독일 적군파 (RAF, Die Rote Armee Fraktion) 창시자인 Ulrike Meinhof와 같은 68운동 세대였다고 합니다(Meinhof는 아래 사진 참조). 찾아보니 Meinhof는 Kappeler교수와 마찬가지로, 시설에 수용된 불량(?)청소년에 대한 부적절한 처우를 바로잡으려는 운동(Heimkampagne)을 벌인 바 있습니다.

 

 

 

 

 

그러다 Meinhof가 더욱 과격해지면서 지하로 들어갈 때 Kappeler교수에게 같이 지하운동을 벌이자고 권고했답니다. 그녀의 제안에 대해 Kappeler교수는 가족 문제 때문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일 적군파를 다룬 영화 Der Baader Meinhof Komplex가 2008년에 제작되어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습니다. 독일 적군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상이 주는 또 다른 효과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본 저에게 이상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독일어 공부를 하다보면 단어의 미묘한 차이를 영어보다는 더 많이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Meinhof의 글 중에 "Vom Protest zum Widerstand"라는 게 있습니다. 이 글 첫머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Protest ist, wenn ich sage, das und das paßt mir nicht. Widerstand ist, wenn ich dafür sorge, daß das, was mir nicht paßt, nicht länger geschieht." (Protest란 이러저런 것들이 나에게는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Widerstand는 나에게 불편한 것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Meinhof와 관련해서 꽤 알려진 글입니다만, 소극적 저항과 적극적 저항의 차이를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Meinhof 일생의 상세한 부분에 대해선 wikipedia등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소련 볼세비키를 비판했던 Rosa라면 아마도 Meinhof의 테러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Rosa든 Meinhof든 유명한 여성혁명가로서 혁명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김누리교수팀 덕분에 같은 날에 두 여성혁명가를 생각하게 되었으니 묘한 날이었던 셈입니다.

 

 

일제치하를 겪었고, 남북한 사이의 갈등이 훨씬 심각하고, 오랫동안 독재에 시달렸던 한국에서는 독일보다 혁명가, 운동가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처절한 스토리도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항일 빨치산, 해방 후 빨치산,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NL, PD 등등 무수하지요. 앞으로 Der Baader Meinhof Komplex를 훨씬 능가하는 영화가 만들어질 소재는 한국이 더 풍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혁명의 이상은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뭔가가 있습니다. 쪼잔한 일상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그런 점 때문에도 독일이든 한국이든 많은 이들이 혁명에 몸과 마음을 내던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이 현실과 너무 괴리되면 당사자에게나 주위에 모두 피해가 가겠지요.

 

 

일본의 극단적인 좌파는 원래의 동료를 린치 살해한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몰락했습니다. 독일의 적군파도 극단적인 테러(일본에 비하면 정도는 덜했음. 보수파 신문사에 대한 공격을 예고하고 폭발물을 터트렸는데, 그 신문사에서 경고를 우습게보았기 때문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음)를 거치면서 몰락했습니다.

 

 

한국의 극단적인 좌파는 어떨까요. 한때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이정희는 당내 선거부정과 이석기 사태를 겪으면서 진보의 애물단지로 변해버렸습니다. Meinhof의 몰락과 비슷할까요. 다만 말과 행동에 철저했던 Meinhof라면 이정희처럼 이석기 사태를 ‘농담’으로 변명하거나 부정선거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묘지를 왔다갔다 하면서 Karl Marx Straße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Rosa Luxemburg라는 이름의 거리도 있었고, Rosa Luxemburg Gymnasium도 남아 있었습니다. 심지어 베를린 외곽에는 Leninstraße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서독지역인 Hagen에서도 Karl Marx를 거리 이름으로 사용한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다만 Stalin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과거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이름을 거리명에 그대로 남겨둔 독일 사회의 원숙함이 부러웠습니다. 물론 남기려는 쪽과 없애려는 쪽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기는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거리명만이 아니라 동독의 기념물도 그대로 존치된 셈입니다. 만약에 남북한이 통일되면 북한의 각종 기념물들은 어찌될까요. 거대한 김일성 동상들, 에펠탑보다 높은 주체사상탑과 같은 것은 개인숭배와는 거리가 멀었던 동독에선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통일 후에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이런 동독과는 사정이 다른 북한의 거대한 기념물들은 과연 어떻게 처리되어야 마땅할까요.

 

 

어쨌든 우리의 좌파도 적어도 Rosa처럼 이름이 남겨질 정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정희 부류라면 그게 가능할까요.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