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6) : 뉴 라이트의 '오버'와 비극의 상대성

동숭동지킴이 2013. 10. 13. 20:38

 

베를린 통신 (6) : 뉴 라이트의 '오버', 비극의 상대성

 

 

지난 10월 3일엔 독일통일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7월 1일 동서독의 경제적 통일이 결정된 데 이어, 1990년 10월 3일에 정치적 통일이 달성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왜 통일의 날짜를 10월 3일로 결정했는지를 이번에 좀 알게 되었습니다. 통일의 직접적 계기가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인데 왜 정치적 통일도 그 날짜로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지요.

 

 

독일에서 11월 9일은 여러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베를린장벽 붕괴와는 달리 나쁜 일도 있었습니다. 1923년 히틀러가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날과 1938년 히틀러가 유태인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개시한 날(Reichspogromnacht, Kristallnacht)이 바로 11월 9일이었습니다.

 

 

그래서 11월 9일을 택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동독 정권에 결정타를 날린 1989년 수만 명 라이프치히 시위의 날인 10월 6일을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통일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동독인의 대량이주 방지?) 때문에 10월 3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한반도 통일의 날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어쨌든 이번 통일 기념행사는 Baden-Würtemberg 주의 주도(州都)인 Stuttgart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미국 상원이나 일본 참의원 비슷한 Bundesrat 의장이 선출된 주에서 통일기념행사가 열리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념행사는 TV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총리인 Merkel은 연설하지 않고 대신에 연방대통령 등이 연설하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몇몇이 발언하는 사이사이로 가벼운 공연을 집어넣어 덜 지겹게 만든 것도 특이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행사를 어찌 하나요.

 

 

베를린에서는 정치적 기념행사 대신에 Brandenburger Tor 앞에서 공연행사가 열렸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일종의 가라오케였습니다. 그런데 이 공연행사를 Coca-Cola회사가 후원한 탓에 그 회사의 광고가 공연장을 뒤덮었습니다.

 

  

 

 

 

 

장엄한 통일의 현장을 Coca-Cola 광고가 휩싸고 있는 모습을 본 제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광고를 하더라도 어디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하는 게 아니라 통일기념행사인지 코카콜라 행사인지 알 수 없게 하는 게 좋은 일일까요.

 

 

통일의 상업화가 이루어질 정도로 이제 통일을 둘러싼 갈등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요. 역사를 너무 우습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에서 역사논쟁이 과도하게 열기를 띄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반대로 독일에선 역사가 너무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뉴 라이트가 과도하게 식민지근대화, 이승만-박정희 공적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바로 현재의 권력투쟁에서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정치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하기 위해 자신들의 반대파를 ‘종북’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독재시대엔 ‘빨갱이’란 말로 지배세력과 생각이 다른 편을 공격하더니, 유사 독재시대엔 빨갱이란 말의 유사어로서 종북이란 말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독일처럼 여야가 합리적인 보수-진보 대결을 벌인다면, 이런 식의 과도한 논쟁이나 왜곡이 일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보수파에선 극단적인 수구세력이 판을 좌지우지하고, 진보파에선 이석기와 같은 시대착오적 흐름이 미미하나마 아직 남아 있으니, 이렇게 비이성적인 역사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 상황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일부 학자라는 분들까지 뉴 라이트에 가세해 역사를 불균형적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수구세력을 키우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철도가 건설되는 등 근대적인 문물의 도입이 없지 않았고, 이승만시대에 농지개혁이 시행되어 한국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쌓았고, 박정희 시대에 압축적 고도성장이 달성된 것은 분명합니다.(비록 그런 긍정적 유산이 오직 '영명하신' 지도자의 덕분이라기보다 내적 외적 조건의 결과라 할지라도.)

 

 

사실 역사상 어느 인물이나 시대에도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입니다. 악명 높은 인물에도 공이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히틀러는 고속도로인 아우토반(Autobahn)을 건설하고 경제를 안정-성장의 길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스탈린시대에도 박정희시대 못지않은 고도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시대, 이승만-박정희 시대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남북이 분단되었고, 이승만-박정희 독재시대의 부정적 유산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국정원이 그 중 하나지요.


식민지시대,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천평 저울의 양쪽에 놓고 그 무게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분단의 비극이나 독재의 폐해 같은 것과 경제적 성과는 같은 계량 단위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식민지시대,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긍정성과 부정성 중 어느쪽이 더 큰가 하는 식의 논란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진짜 중요한 문제는 현재의 시점에서 긍정적, 부정적 측면 중 어떤 측면이 강조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이게 E. H. Carr가 말한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진리는 정세적(conjunctional)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남북한 분단이 해소되고 식민지의 나쁜 유산들이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약화되었다면, 식민지근대화 부분을 강조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나요.

 

 

또한 남북한의 체제경쟁이 치열하다면 이승만-박정희의 공을 강조해도 양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남북한의 체제경쟁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따라서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바로잡는 데 더 중점이 놓여야 합니다.

 

 

과거 식민지시대에는 수탈만이 있었다거나, 이승만-박정희 시대는 온통 암흑천지였다고 평가하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뉴 라이트가 나타난 것이고, 이런 점에서 뉴 라이트는 일면 이해 가능합니다.

 

 

하지만 뉴 라이트는 ‘오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수구세력, 그것도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사회적 강자와 결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거리입니다.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지요.

 

 

원래 뉴 라이트는 극단적인 좌파였습니다. 그러다가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대로 극단적인 우파로 전향했습니다. 극단적 흐름의 특징은 현실을 냉정하게 관찰하려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아는 한 뉴라이트 학자의 예를 한 가지만 들겠습니다. 그와 만났을 때 그는 “북한에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3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 300만 명이라는 숫자의 확실한 근거가 있느냐. 300만 명이 아니라 3만 명을 굶어죽게 하는 정권이라도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적어도 학자라면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말하는 게 좋지 않으냐. 그냥 많이 죽었다고 하는 게 좋겠다.”

 

 

제 말에 대해 그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00만 명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 분은 이미 학자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틀렸음을 지적받아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요.(사고가 경직화되면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polifessor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polifessor(politics + professor)란 학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비난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엔 정계로 좋은 인사들의 유입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학자라고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자질이 부족해 직업정치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미국의 진보적 학자인 Robert Reich는 클린턴 정권의 노동부장관을 지냈는 데, 그렇다고 polifessor로 비난받지 않았습니다. 진짜 비난받아야 할 polifessor는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이고, 이미 여러 뉴 라이트 교수들은 그리 되었습니다.(좌파학자 중에도 물론 그런 polifessor들이 있습니다.)

 

 

누구도 북한의 정확한 아사자 숫자를 모릅니다. 300만 명 이야기는 한 인권단체에서 탈북자를 대상으로 조사 추정한 것입니다. 이런 추정에 허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좀더 엄밀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30만~100만 명 정도가 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물론 이 수치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뉴 라이트 정치가의 대표로는 김문수 지사가 있습니다. 그의 천박한 정치행태에 대해선 제가 이전에 블로그에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블로그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log.daum.net/kkkwkim/168

 

 

“빛은 없고 열만 뜨거운” 한국의 역사논쟁과는 정반대로 독일에선 과거사에 대해 너무 조용해서 탈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통일 행사도 너무 상업화되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건 독일의 보수-진보가 모두 상당히 합리적이라서 생긴 일이기도 하니 꼭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혹시 이런 현상에는 통일 후 동서독 갈등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이 동서독 갈등 문제는 제가 독일에 체재하는 동안 계속해서 공부할 과제이기 때문에 앞으로 차근차근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독일통일 기념일에 언론에서는 동서독 지역간의 소득격차, 정부 고위직의 동독인 비율 등을 소개했습니다. 통일 이후 격차가 상당히 좁혀지긴 했지만 일정 시점 이후로는 그 격차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독일통일 기념일과 관련해 WCC(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주최한 "Peace Train"이라는 기념행사가 10월 7일 베를린에서 열렸습니다. 이 기념행사의 홈페이지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peacetrain2013.org/

 

 

WCC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비난받던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이 단체 분들 특히 독일 목사들은 아직도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해 강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보다 상황이 더 어려운 아프리카 등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해선 계속 관심을 갖고 있고, 그래서 이번 행사가 개최된 것입니다.

 

 

행사는 먼저 베를린한인교회에서 심포지엄 등의 형태로 먼저 열렸습니다. 독일인 몇몇과 노정선 연세대 명예교수 등이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 현장은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행사에는 한국에서 조정헌 향린교회 목사 등 80여 명이 참가했고 독일목사들을 비롯해 세계 15개국에서 참가했습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일행은 Brandenburger Tor 앞에 가서 농악대 춤판도 벌이고 기도회도 개최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제가 함께 사진을 찍은 분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목회활동을 했던 Lutz Drescher(한국명 道如水, 이름이 멋지지요.)라는 분입니다. 한국말을 잘 하는 게 신기해 같이 사진을 한번 찍었습니다.

 

  

 

 

 

베를린에서의 행사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원래 북한을 통과해 남한으로 들어가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당국은 심양에서 관련 회의를 갖자고 했는데, 남한당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한반도를 통과하는 것은 무산될 것 같습니다.

 

    

 

 

이미 한국목사들이 2003년에 북한에 들어가기 시작해 평양에서 예배를 본 일도 있으므로 북한 당국의 협조는 기대할 수 있었는데, 북한의 무릎을 꿇리려는 남한당국에 의해 행사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최근 남북한 관계가 험악해진 원인을 이 교회 행사에서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 언론에서도 이 행사에 대해 동행취재를 했습니다. 한겨레와 연합통신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러시아 등에서의 행사에 대해서도 한국 언론에서 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597428.html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606327.html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10/13/0200000000AKR20131013033900004.HTML?input=1179m

 

 

그리고 베를린 한인교회에서의 행사 중 어쩌다 바로 앞에 앉은 한국인 이금준 여성목사와 잠깐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계통인데,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 30년 이상 한국 땅을 밟고 있지 못한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런 분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는지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어느 정도 유신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도 빨갱이로 몰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것입니다. 예전의 동백림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이야기는 삼가고 그분 이야기를 잠깐 듣기만 했습니다.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독일에서 기술교육(Ausbildung)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해 Siemens에 취직해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해 농장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분으로 베를린에는 송두율 박사 한 명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외에 다른 사람도 있는 셈입니다. 해외에서 보는 분단의 상처는 한국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베를린의 Tränenpalast(눈물의 궁전)을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사는 기숙사 측에서 주선한 행사였습니다. '눈물의 궁전'이란 말은 동서독의 이산가족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던 데서 나온 말입니다.

 

 

동서독 쪽에서 서로 오고가는 통로로 흔히 알려진 곳은 Checkpoint Charlie입니다(아래 사진 참조.) 하지만 동독의 민간인들이 서독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은 Tränenpalast였고, 이 사실을 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베를린의 S-Bahn Friedlichstraße 역을 나오면 바로 이 기념건물이 있습니다. 기념건물 안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내하는 역사전공자의 설명이 곁들여지자 과거가 살아서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동독인이 통과증을 받는 좁은 통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출입국 심사를 받을 때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도장을 찍어주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색안경을 즐겨 쓰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얼굴 표정을 숨기려는 것이지요.

 

 

 

 

게다가 그 통로에는 위 옆쪽에 거울이 달려 있고, 심지어 밑바닥에도 거울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무슨 몰카 같지요.) 마치 범죄자를 심문하는 식으로 동독인 출국을 조사했던 것입니다.

 

 

들은 이야기 중에는 동서베를린 사이의 경계인 Spree 강에 어린이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도 어느 쪽도 구조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는 놀라운 내용도 있었습니다. 혹시 구조하려다가 동서독 나아가 미소의 충돌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어린이의 생명 따위를 내팽개쳤던 것이지요.

 

 

그리고 전시해 놓은 물건 들 중에는 Wolf Biermann의 동독 여권도 있었습니다(사진 참조.) 그는 동독의 유명한 반정부 작곡가-가수(김민기 같은 인물)였습니다. 그가 1976년 서독으로 출국한 이후 동독정권이 그의 동독 시민권을 박탈함으로써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동독체제를 뒤흔드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동독체제를 보면서 자꾸 느끼는 것인데, 동독은 서독보다야 낙후된 사회였지만 적어도 박정희-전두환 시대 한국보다는 (정치적으로는) 나은 사회라는 점입니다. 그건 이 Biermann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지만 동독에선 반정부인사에 대한 고문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Stasi가 비판받고 있지만, 한국의 정보부(국정원의 전신)에서 서울대교수조차 고문 타살당하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민주적이었던 것이지요.(독일영화 “타인의 삶”과 한국영화 “풍산개”를 비교해보시길.)

 

 

Biermann 같은 인물도 박정희-전두환 시대 한국이라면 외국으로 보낸다든가 하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으로 보내면 반정부 비판을 계속할 테니까요. 그 대신에 한국에선 정보부나 보안사나 치안본부에서 간첩으로 조작하거나 고문으로 반병신 만드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생각하십시오.)

 

 

아니 박정희정권은 반정부인사만이 아니라 자기편이던 정부(및 의회) 고위층 인사들도 100% 자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고 정보부에서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치사시켰습니다.(김성곤, 길재호 등의 항명파동.) 그런 인물을 미화하는 게 뉴 라이트이지요.

 

 

사실 동독은 북한에 비하면 ‘양반’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남한보다 나았으니, 북한과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게 독일사회 전반의 수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련, 동유럽 등이 똑같이 체제전환을 했지만, 마피아가 설치는 러시아와 동독을 비교해도 그 수준 차이는 느낄 수 있지요.

 

 

Tränenpalast의 안내인은 동서독에서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런 야만적인 일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는 저는 “야만 제곱”인 한반도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지만, 그 자리는 토론의 자리가 아니었으므로 발언을 삼갔습니다.

 

 

독일에서는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상당히 자유로웠습니다. 서독인은 1년에 일정 기간 동안 자유롭게 동독을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독인도 65세 이후 은퇴하면 역시 1년에 일정 기간 동안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 몇 년 만에 이루어지는 이산가족 상봉조차 남북한 정권의 힘겨루기 탓에 무산되는 한반도 사정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동서독을 보면 분단의 비극도 상대적이라는 걸 절감하게 되는 셈입니다. 동서독의 분단 비극은 한반도 앞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이지요.

 

 

사실 인간사의 비극이란 게 모두 상대적입니다. 비극을 겪는 당사자로선 자신의 경우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없겠지만, 그 아픔의 정도는 분단의 상처처럼 상대적이지요. 한국사회의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도 소말리아나 팔레스타인에 비교하면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니지요. 북한과 비교해도 그럴 것입니다.(주체사상파는 달리 생각하겠지만.)

 

 

따라서 어쩔 수 없는 힘든 상황에 대해선 일단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게 살아가는 지혜일 것입니다. “지혜로서의 긍정적 체념”이지요. 동시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활력으로서의 긍정적 투쟁”도 필요합니다. 이게 체념과 투쟁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달관’입니다.

 

 

물론 이 경지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현실에 안주하기는 쉽습니다. 반대로 불만세력으로 입만 열면 분노를 쏟아내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넘어서서 ‘탁(濁)한’ 에너지가 아닌 "맑은 에너지로 분투"하는 경지는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게 ‘도통(道通)’의 경지이니까요. 동서독 분단의 비극과 남북한 비극을 비교해보면서 또다시 떠오른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